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는 것이 청정입니다

보십시오. 마음인데, 사방이 툭 터졌는데
여자 남자가 어디 있으며, 동서가 둘입니까.
이 세상에 뭐가 그렇게도 걸리는 게 많습니까.

L.A.에 와서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를 하게 된 것을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모든 생명이 이 세상에 나서 필수적으로 해야 할 문제를 넘기고 그냥 갈 수는 없다고요.

불교라고 하는 그 뜻은 어떤 것인가. 불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될 것이고, 종교라는 그 자체의 교라는 것은 바로 여러분과 더불어 좋은 말을 하는 것을 좋은 말씀이라고 해서 교라고 하죠. 그렇다면 풀 한 포기, 벌레 하나도 불교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불교가 어떻게 국한돼 있겠습니까. 불교를 국한된 종교라고 생각하신다면 영 틀린 일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린 인간으로서 인간의 도리를 먼저 알아야겠고, 인간의 도리를 알려면 나 자신부터 알아야 된다는 조건입니다. 나 자신부터 알아야 하며, 나 자신의 주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며, 또는 남을 나무라기 이전에 항상 나를 한번 돌아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으로써 모든 가정이 편안하고 또는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그런 지혜로운 지견이 나올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왔다가 그냥 갈 수는 없다는, 필수적이라고 한 문제는 이런 겁니다. 우리가 잘한다 못한다를 떠나서, 정법이다 사법이다라는 것을 떠나서, 또는 기독교다 불교다 가톨릭교다를 떠나서, 그 이름은 한계가 있는 상표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지구가 버스라면 우린 지금 같이 타고 가는 그 버스가 어디를 돌아서 이렇게 다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불교가 어떠니 종교가 어떠니 하고서 이것이 나쁘다 좋다, 무슨 대승법이다 소승법이다 하고 싸우겠습니까? 벌레 하나도 버릴 게 없는 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 몸뚱이 속에 조그마한 별성들이 지금 운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를 돌아다니는지,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면 그 속의 오장 육부나 세포에서는 어디로 돌아다니는지도 모르고 있는 판국입니다. 우리가 이 도리를 상세히 알고 본다면 너무나 어마어마하고 광대무변한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구에 있는 인간이라면 인간 속에 들어 있는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 벌레라고 하고 지구 벌레라고 해야 되나요?

아까도 말했지만 불교가 따로 국한돼 있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금 현 생활이 그대로 불교며 그대로 진리이며 그대로 평등하며 그대로 종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계신 곳에 바로 종교가 있고 진리가 있고 부처가 있고, 생각을 안 내면 부처인 것이고 생각을 냈다 하면 법신인 것이고 움죽거렸다 하면 화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99%가 부처라고 말씀하죠.

이런 것을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마는, 법당에 가면 석가모니를 모셔 놓고 문수, 그다음에 보현을 모셔 놓습니다. 그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깨달은 분들은 한생각을 내는 것을 바로 법신으로, 문수로 칩니다. 그리고 움죽거리는 것을 보현으로 칩니다. 그렇다면 한생각에서 바로 움죽거림이 나온다는 것이죠. 생각을 안 하면 부처고 생각을 했다 하면 법신이고 움죽거렸다 하면 화신이자 보신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우리 한생각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거는 좋고 이거는 언짢고 하는 말을 잘하죠. 여자 남자도 가립니다. 비구 비구니도 무척 가립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죠. 옛날이 아닙니다. 이 미국에 와서 그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째 비구니인데 ‘큰’ 자를 붙이느냐고요. 전화에다 대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여직껏 당신이 비구라는 것도 모르고 내가 비구니라는 것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근데 스님께서는 비구도 알고 비구니도 아시니 참 훌륭하십니다. 난 훌륭칠 못해서 비구니 비구를 아직까지도 모릅니다.” 그랬죠. 이런 말을 한 예가 있고, “그러면 비구 비구니를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라면 한번 오시죠.” 이런 말도 한 예가 있죠. 그런데 안 오셨어요.

여기 앉으셔서 여러분 마음이 여러분 가정에 갔다 와 보십시오. 어디 뭐가 놓이고 어디 뭐가 놓였다는 것도 잘 아실 겁니다. 그리고 금방 갔다 오실 겁니다, 빛보다 더 빨리. 여러분이 마음으로 우주 바깥으로 훌쩍 떠나서 이 지구를 한번 보십시오, 안 보이나. 이 마음이라는 건 내놓을 수 없는 까닭에, 그리고 분별이 많은 까닭에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주어져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생각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쁜 거 좋은 거는 잘 알지만 나쁜 거 좋은 거를 해결할 수는 없는 걸로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왜냐하면 내가 과거에 살던 바로 그 업보가 인으로 인해서 과가 돼서 뭉쳤으니 너는 인과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런 말이죠. 유전성이나 영계성이나 또는 세균성 이 모두를, 오간지옥의 업보도 당신이 저질렀으면 그것을 해결치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난 안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다 물질로서, 여러분이 지금 생명을 유지하는 것도 바로 지수화풍이 있는 관계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 지수화풍이 지수화풍을 먹고 삽니다. 어떻습니까? 틀립니까?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대로 지금 시쳇말로 이산화탄소라고 합니다마는 이렇게 내놔 주는 것이 있다면 저장을 했다가 주는 무정물도 있고, 저런 목신들도 다, 나무들도 저장을 했다가 우리에게 바로 줍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주고받고 먹고 산다는 것을 이렇게 말하죠. 공생·공심·공용·공체·공식화 하고 있다고요. 그리고 조화를 이룬다고요. 그리고 우리가 생각을 해 본다면, 사장이 없으면 직원도 없다는 사실이죠. 서로가 먹지 않고 서로가 공생을 안 한다면, 또 서로가 공용을 안 한다면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종교가 따로 있는 줄 알지 마시고 여러분 생활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지 않았다면 상대성도 없을 것이고 또는 종교도 없을 것이고 부처도 없을 것이고, 내가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수화풍으로부터 이런 컵도 출현을 했습니다. 이 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출현을 한 겁니다. 흙에 물을 붓고 그렇게 만들어서 바람에 말려서 불에 구웠습니다. 바로 우주 개공이 이 안에도 있다는 사실이죠. 이거 하나도 그냥 있는 게 아니라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거 하나 그냥 놓여 있는 게 없죠.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땅에 발을 붙이고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을 해 보신 분 없습니까? 우리는 지수화풍의 뒷받침이 돼 있기 때문에 자력과 광력과 통신력과 전력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뒤따르고 있기 때문에 그 큰 재료로 인하여 우리 마음속에, 우리 인간이 하나 이 세상에 났다면 모두 여러분 각자에게 바로 오신통이라는 시스템이 돼 있습니다. 불가에서 오신통이라고 하는 것을 내가 한번 지금 현재 용어로다가 대 보죠. 이 천안통을 바로 천체망원경이라고 비유한다면 숙명통 그것을 바로 컴퓨터라고 칠 수 있습니다. 천이통을 천체무전통신기라고 칠 수 있습니다. 탐지기를 바로 타심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족통을 팩스라고 해도 됩니다. 누진통을 바로, 뭡니까? 레이더망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 다섯 가지가, 누진통 빼고 다섯 가지가 우리에게 시스템이 돼 있는 겁니다. 이것이 돼 있는 까닭에 바로 들어오고 나가는 그런 문제를, 바깥에서 들어오든지 안에서 이런 파워가 일어나든지 모든 통신을 해 주고 있습니다, 누진에서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할 때 우리가 지은 과거의 업보, 인과응보, 유전성 그 모든 것이 어떻게 해서 지워질 수 있을까요.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즉 말하자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하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을 하느냐. 숙명통이라는 그 자체의 컴퓨터에는 이 세상을 거쳐 오면서 과거에, 내가 나기 전에 살던 그 모든 것이 거기 그냥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 있던 겁니다.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 있던 거니까 현실에 누가 팔자다 운명이다 하기 이전에 그냥 술술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죄도 안 짓고 이렇게 잘 사는데 왜 이렇게 고통이 오고 이렇게 쓰라림이 오나.’ 이러시죠? 그것은 과거에 입력된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그 입력된 데다가 다시금 입력을 한다면 앞서 입력한 것이 없어지지 않을까요? 잘 생각해 보실 점이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댑니까? 앞으로는 더할 겁니다, 아마.

그렇다면 어떻게 그거를 없애는가? 그걸 거기다가 놓는 반면에 ‘어, 거기에서 입력이 된 거니까 거기서밖에 해결할 수 없다.’ 하고 거기다 맡겨 놓는 겁니다. 주인공이라는 그 자체는 왜 주인공이라 하는가?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라 했으니 가만히 따져 보십시오. 내가 주인이라 하면서 주인은 공했어. 그러니까, 공했으니까 주인도 없다는 얘기죠. 왜? 찰나로 돌아가니까. 고정됨이 없으니까.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자기 주인공에다 되맡겨 놓는 겁니다. 자기 주인공만이 해결을 할 수 있고 자기 주인공만이, 거기서 병난 거니까 거기서 해결을 할 수 있는 것이요, 또는 거기서 고독함도 생긴 거니까 거기다가 맡겨 놓는 것이에요. 고독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능력이 거기밖엔 없으니까. 그래서 나왔던 구멍으로 다시 놔라 이 소리죠.

일체를 그렇게 해 나가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한테 그렇게 말씀드린 거고, 육조 스님이 말씀하실 때 ‘내 불성이 청정함을 어찌 알았으리까.’ 그 청정한 것은 더럽고 깨끗하고 높고 낮고, 또는 여자고 남자고 남녀노소 할 거 없이 전부 평등하다. 그 평등한 거를 청정이라고 그럽니다. 똥물이고 더러운 물, 핏물이고 다 들어가도 그냥 가라앉히는 그런 너그러운 바다의 물과 같은 것이 바로 청정입니다. 선반에 얹어 놓고 깨끗하게 잘 두는 것만이 청정이 아니라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는 것이 청정입니다. 그래서 ‘청정함을 어찌 알았으리까. 여여함을 어찌 알았으리까.’ 하셨는데, ‘내 불성이 여여함을 어찌 그렇게 알았으리까.’ 이 소리죠. 여러분이 배고프면 그냥 아무 소리 없이 먹죠? 배고픈데 이유를 붙이고 밥 먹는 법은 없고, 목마른데 이유를 붙이고 냉장고 문 열고 물 먹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여여한 뜻이라고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은 갖추어 가지고 있다. ‘내 어찌 갖춰 가지고 있음을 알았으리까.’ 이런 것은 여러분이 아까 내가 말했듯이 그렇게 갖춰 가지고 있어. 그래서 자동적으로 돌아가. 용광로에 모든 헌쇠를 넣으면 자동적으로 새 쇠로 재생이 돼서 나가듯이 그렇게 자동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갖추어 가지고 있음을 어찌 알았으리까.’ 했죠. 그런데 또 비유를 하나 하자면 여러분 몸뚱이를 오븐으로 치고요, 그 재료가 모두 갖춰져 있기 때문에 자기 먹고 싶은 대로 오븐에다 넣어서 다 해 먹죠? 안 그렇습니까?

또 ‘우리가 갖춰 가지고 있는 반면에 여여하게 일체 만법을 들이고 냄을 어찌 알았으리까.’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여여하게, 집 안에 들어오면 집 안에 들어오는 대로 “여보, 오늘 몇 시간이나 일했어? 피곤하진 않아?” 자동적이에요, 이게. 근데 그때는 남편이 됐어요. 아내가 됐고요. 그런데 자식이 들어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금방 아버지가 되고 엄마가 됐죠. 그런데 부모가 “얘, 아비야! 벌써 갔다 왔니?” 하니까 어머니한테로 이렇게 돌아보면서 자동적으로 자식이 되고 며느리가 됐답니다. 그러면 어떤 거 됐을 때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라고 할 수 없는 것이 그대로 평등한 것이며, 그대로 불법인 것이며, 그대로 부처라는 것이고, 그대로 바로 여여하다는 뜻입니다. 그대로 여여하죠. 그리고 ‘일체 만법을 들이고 냄을 어찌 알았으리까.’ 하는 것도 그 여여함에서 그대로…. 여러분이 이유 없이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런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항상 조그만 일에도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한테 이런 말을 하죠. 사람은 따뜻한 데로 고이고, 여름에는 시원한 데로 고인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가정을 이루고 사시면서 자식들이 좀 잘못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도둑질을 한다 하더라도, 또는 나가서 폭행을 한다 할지라도 될 수 있으면 ‘주인공!’ 하고 말입니다. 아들이라는, 어머니라는 가설이 돼 있거든. 그게 마음의 가설이거든요. 그러니 그 주인공과 그 주인공이 둘이겠습니까. 여러분은 불을 켤 줄 몰라. 여기 스위치만 누르면 거기까지도 불이 들어올 수 있는데 말이에요. 가설이 돼 있으니까. 한방 식구거든. 천 리를 간들 만 리를 간들 한방 식구거든요. 그러니 가깝고 멀고가 없다 이런 겁니다. 빛보다 더 빠른 마음은 가깝고 멀고가 없다.

여러분, 이 마음은 보지도 못하고 내놓을 수도 없지만, 비유를 한다면 이 전력이 들어오고 나가는 건 못 보지만 이렇게 밝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전력이 나가고 들어오는 건 못 보시죠? 통신력도 그렇고요. 우리가 전화를 받을 때도 그렇습니다. 그 신호가 들어오고 나가는 건 못 봐도 바로 전화기를 들고 전화는 할 수 있죠. 이렇게 되듯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을 우리는 뭐가 그렇게 사단이 많은지 들어오기만 하면 “또 왜 이렇게 늦었니? 아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녀?” 이렇게 하거든요. 이게 참 기분 나쁜 소리예요. 남편한테도 그렇고 아내한테도 그렇고 자식한테도 그렇고. 여기 와 보니까 더해요. 한국보다도 더해요, 아주. 냉랭하고. 그리고 아침에 나가고 저녁에 들어오고 또 저녁에 나가고 아침에 들어오고 이렇게 해서 부부지간에도 참, 정답게 화목하게 만남을 갖는 사람이 적더군요. 그러니 자식들하고는 더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마음까지도 그렇게 ‘빌어먹을 새끼! 또 저거 저럭하고 일도 안 하고 빙글빙글 돌면서 저런다.’ 하니 이게 될 수가 없죠.

왜냐하면 마음 한생각이 그렇게 중요하단 말입니다. 마음 한생각이 ‘야! 당신밖에, 내 주인공하고 쟤 주인공하고 둘이 아니니 이 주인공밖에는 이 몸을 이끌어 가지고 갈 수 없고 마음을 이끌어 가 줄 수가 없어. 그러니 당신밖에는, 내 님밖에는 해결할 수 없다.’ 하고 그렇게 믿고 거기에 맡겨 놓고 지켜보는 게 바로 실험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 애를 지켜보세요. 자꾸자꾸 그렇게 하면서 지켜보면 바로 통신력과 밝음과 전력 광력, 그것이 서로 통해서 애가 아주 착하게 됩니다. 남편도 그렇죠. 그래서 내 사랑을 찾지 못해서 왔던 사람이 내 사랑을 찾게 되고 내 가정에 화목을 못 찾던 사람이 화목을 찾고 병을 앓던 사람이 병이 낫고 가난했던 사람이 가난을 면하고 자유스럽지 못하던 사람이 자유스럽게 되고, 이렇게 자유스러운 것을 무슨 이거는 내 종교니 네 종교니 하고선 아니, 끼리끼리 싸우는 거 보면 말도 못합니다. 신도 수를 세어서 팔아먹지를 않나, 부처님 뼈다귀를 우려서 먹지를 않나, 이름을 팔아서 먹지 않나. 그러면서도 비구니 비구를 따지지 않나.

보십시오. 마음인데, 사방이 툭 터졌는데 여자 남자가 어디 있으며, 동서가 둘입니까. 이 세상에 뭐가 그렇게도 걸리는 게 많습니까. 모자라는 사람을 봐도 ‘전자의 모자랐던 내 모습이로구나.’ 하고 봤으면 얼마나 그것이 지견으로써, 지혜로써 보람 있는 인생을 걸어가겠습니까. 그런데 이거는 만날 틀리고 이거는 좋고, 이거는 잘하는 거고 이거는 못하는 거고…. (컵을 들어 보이며) 이 항아리 속에서 항아리 바깥으로 벗어나야 이 항아리를 굴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항아리 속에서 전부 제각기 이게 틀리다 옳다 하고 이 속에서만이 그러는 겁니다.

이 공부를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는 뜻은 우리가 조그마한 거를 가지고 실험하고 체험하고 이렇게 생활 속에서 하면서, 절에 가는 것은 충전을 하러 가는 건데, 옛날에 한암 스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절은 많으나 그 절에 사람이 있어야 부처가 있지.” 이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또 한 가지는, 예전에는 짚신을 신고 방울을 달고 작대기로다 휘휘 둘러 가면서 팔자걸음을 걸었거든요. 왜냐? 생명을 죽일까 봐.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긴 애초에 글렀고요, 오히려 이 불교도 서로 뜯어요. 그러니 한마음으로 뭉쳐야 살 텐데 전부 제가끔들 헤어지니 그게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 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종교를 가졌든지 종교가 아니라 진리인 것입니다, 진리!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무슨 종교라는 상표를 가지고 이 상표가 옳고 저 상표가 옳고 이렇습니까.

내가 이런 소리를 가끔 합니다. “얘, 너희 아들은 요새 좀 어떠냐? 손버릇이 나쁘다더니.” 하고 물으니까 “스님, 참 고맙습니다.” “왜 날더러 고맙대?” 하니까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스님이, 가설이 돼 있어서 내 주인공에다 스위치를 누르면 그 주인공에도 불이 들어온다고 하셔서 유년 그렇게 했더니 지금은 너무나 착해지고 엄마의 고생도 알아주고 월급을 타면 꼭꼭 들여옵니다. 그러고는 빵 한 개라도 사서 그게 식을까 봐 겨드랑에다가 넣어 가지고 옵니다.” 이러거든. “엄마, 시장하지 않아?” 하면서 갖다 주더라는 겁니다. 생전에 스물다섯 살이 되도록 그런 소릴 처음 들어 봤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먹고살기도 바쁘고, 생각하면서 먹으면서 뛰고, 뛰면서 생각하면서 먹고, 내가 여기 와서 그런 거 많이 봤어요. 우유 하나 빵 하나 들고 먹으면서 차 타고 가면서 머리 빗으면서 말하면서 이러고 가더군요. 그러니 한 사람이 몇 가지를 합니까? 허허허. 그런 세상인데도 아침이면 주문 외워라, 백팔배 해라, 삼천배 해라 이렇게 한다면, 또 몇 시간씩 좌선해야 되고요. 이것이 지금 세상에는 맞지 않아요.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한생각이에요, 이게. 우리가 생각하고 먹고 자고 똥 누고 그냥 부지런히 뛰고 일하고 하는 것이 그대로 참선이에요. 그대로 행선이란 말입니다. 조금 여유가 있을 때, 내가 앉고 싶다 이럴 때 진짜로 앉는 것이 그것이 바로 참(眞) 좌선이고 그래요. 시간을 정해 놓고서 ‘나는 요 시간이면 꼭 좌선을 해야겠다.’ 하는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이 우주 전체가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인간이 시공이 없이 돌아가는 이치도 모르고요. 만약에 그것을 모르는 분들은….

서울에선 또 이럽니다. 여기선 모르겠습니다. 여기선 못 봤습니다. 방생을 한다고 말입니다 아, 자꾸 고기를 한 자배기씩 사 가고 두 자배기 세 자배기씩 사 가니까, 거북이 새끼 뭐 이런 것도 다 사 가니까 어부들이 자꾸 잡아다 놓는 겁니다. 그러니까 잡아다 놓을 때 죽죠. 잡을 때 죽고 갖다 놨을 때 죽고, 가지고 갈 때 죽고 갖다 넣었을 때 죽거든요. 그럼 갖다 넣었을 때도 그렇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일제 시대 때, 즉 보급대로 끌려가고 정신대로 끌려가고 또 무슨 뭐, 그때 또 한 가지 있었는데 잊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끌려가서요, 8·15 해방이 되니까 털썩 그냥 놔 놨단 말입니다. 아무 데나 그냥 놔 준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기차 꼭대기고 어디고 다 타고 오다가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산 사람 얼마 안 됩니다. 그와 같이 그냥 방생한다고 가서 넣으니까, 자기 집 찾아가느라고 온통, 10리든 뭐 20리든 30리든 그런 거 아랑곳없이 찾아갑니다. 그러다 죽습니다. 사는 것도 있고요. 이것이 방생입니까?
연세 드신 분은 아실 겁니다. 예전에 웅덩이 물이 위로 솟아서 다시 떨어질 때에 이 산에도 미꾸라지니 붕어니 새우니 가재니 뭐 이런 것이 늘비하게 떨어졌습니다, 지렁이도 그렇고. 우린 그런 거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통에다 물 담아 가지고 이렇게 집어넣어서 물 있는 데 갖다 넣어 줬습니다. 그래서 방생이라는 유래가 생긴 겁니다. 그랬는데 물에서 잘 사는 놈의 거를 왜 잡아다가 그렇게 합니까? 그건 놀부지. 응? 하하하. 아니, 그러면서도 지금 자기 이웃에 병을 앓고 드러누워서 자식을 학교에 못 보내는 사람이 있어도 그건 방생 안 하고 그걸 해요, 그걸. 그걸 하면서 정말이지 지금 여기 돈으로 몇백 불을 버리면서까지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0년 4월 28일 남가주 불교 청년연합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 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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