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母열전- ⑥ 일기(一機) 스님

색난 스님 후배나 제자로 추정돼
생몰 미상… 문헌 통해 활동 가늠
부안 변산반도 능가산에 거주하며
주로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
조성·중수 불상 전국 10여 점 산재

구례 화엄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1703년 일기 스님이 주도적으로 만든 불상으로 그 실력이 매우 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사진=최선일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에 고흥 능가사에서 거주한 색난(色難) 스님과 같이 많은 불상을 조성한 일기 스님은 불상 제작의 우두머리인 수화승(首畵僧)으로 만든 불상이 많이 조사되지 않았지만, 18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불상 가운데 아미타불을 주도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아 색난 스님이 믿을 정도로 실력을 갖춘 조각승이다. 현재 일기 스님이 불상을 만들거나 중수한 작품은 전국에 걸쳐 10여 건에 이른다.

아직까지 일기 스님은 언제 태어나서 열반에 들었고, 조각승(彫刻僧)이 된 배경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불상에서 발견된 조성 발원문을 통하여 스님의 활동 시기, 지역, 조각승의 계보, 불상 양식 등을 추정할 수 있다.

일기 스님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698년에 색난 스님과 전남 해남 성도암 목조보살좌상(제주 관음사 봉안)을 개금하고, 1699년에 개인 소장 목조여래좌상과 1700년에 해남 성도암에 석가삼존상과 나한상(가섭존자는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나한상 1구는 영암 축성암 소장)을 제작하였다.

또한 스님은 색난 스님과 1701년에 해남 대흥사 응진전 불상과 1703년에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목조칠존불상을 제작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원래 670년에 의상대사가 건립한 삼층 장륙전으로, 내부에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봉안하였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99년~1702년에 성능대사가 중건하였다. 전각의 내부 중앙의 수미단 위에 석가불·아미타불·다보불(多寶佛)이 있고, 그 좌우에 보현보살·문수보살·관음보살·지적보살(知積菩薩)을 배치하였다. 불상과 보살상들은 3m가 넘는 거대한 불상으로 18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안성 칠장사 목조관음보살삼존상. 1719년 일기 스님이 제자들과 만든 불상이다. 사진=최선일
일기 스님은 이 가운데 아미타불을 주도적으로 만들었다. 각황전을 세운 계파 성능(桂坡性能) 스님은 경상북도 학가산(鶴駕山)의 승려였지만 화엄사(華嚴寺)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4-1659)의 계보를 이은 스님이다. 벽암 각성은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의 직계 제자로 색난과 그 계보 조각승이 부휴 문도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기 스님은 1703년에 색난 스님과 전남 영암 도갑사 견성암 목조보살좌상(서울 경국사 봉안)과 1705년에 경남 하동 쌍계사 보현과 문수동자상 등을 제작하고, 1707년에 고흥 능가사 불상을 만들었다. 또한 일기 스님은 색난 스님과 1709년에 전남 고흥 금탑사 보살좌상(고흥 송광암 봉안)과 목조삼존불좌상(광주 덕림사에 봉안되어 있다가 1980년에 화재로 소실)을 웅원 스님과 혼평 스님 등과 조성하였다.

그리고 1719년에 수화승으로 경기 안성 칠장사 원통전 목조관음보살삼존상을 선각 스님과 선일 스님 등과 조성하고, 1720년에 전남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을 개채(改彩)하였다.

일기 스님이 어느 사찰에 주석했는지는 1703년에 만든 화엄사 각황전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능가사사문(楞伽山沙門)’으로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북 부안 변산반도 내 능가산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거주한 부안 지역은 양질의 나무가 많이 자라던 지역으로, 고려 후기 원나라가 일본을 침략할 때 전남 장흥 천관산과 같이 선박을 만들었던 지역이다.

이런 문헌을 통하여 일기 스님은 1660년을 전후하여 태어난 1698년부터 1708년까지 색난과 불상을 제작하였다. 1703년에 그가 색난과 구례 화엄사 각황전 불상을 제작할 때, 아미타불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이전부터 수화승으로 활동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의 마지막 활동은 1720년에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을 개채하여 이후에 열반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님은 18세기 초에 부안 변산반도 능가산에 거주하면서 전남 해남, 고흥, 구례, 순천, 경기 안성 등 서해와 남해에 위치한 사찰에 불상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일기 스님은 색난 스님의 계보에 속하고, 스님의 조각승 계보는 색난(色難, 色蘭)→ 일기(一機, -1698-1720-) → 선각(善覺, -1703-1720-), 선일(善一, 善日, -1718-1720-), 하천(夏天, -1703-1730-)으로 이어진다.

일기 스님이 1719년에 수화승으로 만든 안성 칠장사 원통전(圓通殿) 불상은 관음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자(童子)가 서 있다. 이와 같은 존상의 배치는 다른 사찰의 원통전이나 관음전(觀音殿) 등에서 볼 수 없다.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높이가 120㎝로, 조선후기 제작된 중대형 보살상이다. 관음보살의 신체와 상투는 은행나무, 양손은 버드나무, 밑판은 소나무로 제작되었다. 또한 대좌의 연판은 버드나무, 연화좌와 팔각대좌는 소나무로 만들어졌다. 높고 커다란 보관(寶冠) 가운데 봉황(鳳凰)을 중심으로 좌우에 운문(雲文)과 화문(花文) 등이 빽빽이 장식되었다. 관음보살은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신체에서 얼굴이 차지하는 비율은 1:0.3 정도이다. 이러한 신체비례는 17세기 초반의 대표적인 보살상인 1605년에 제작된 전북 익산 관음사 목조보살입상과 비교해보면 인체의 비례가 깨지면서 얼굴이 커진 것을 알 수 있다.

각이진 사각형의 얼굴에 반쯤 뜬 눈은 일자(一字)로 가늘게 뜨고, 코는 얼굴에 비하여 작고 가늘며, 입은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 보살상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이목구비(耳目口鼻) 처리에서 색난이 만든 작품과 다르게 눈을 일자로 처리되고, 눈과 입에 비하여 코가 작고 길게 표현된 점이다. 또한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보살상보다 어깨와 무릎 폭이 넓은 편이다. 양손은 손목에 끼우게 따로 만들었고, 오른손은 가느다란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바닥을 무릎 위에 올리고 있다.

바깥에 걸친 대의는 오른쪽 어깨에 걸친 후 팔꿈치와 복부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는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와 복부에서 오른쪽 어깨를 덮은 대의자락과 겹쳐져 있다. 특히, 하반신의 대의처리는 네 겹으로 접힌 주름이 안쪽에서 넓게 접히고, 나머지 주름이 물결이 출렁이듯 펼쳐져 있다.

안성 칠장사 목조관음보살좌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 내 작가들. 사진제공=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결가부좌한 무릎 아래에 갑대(甲帶)를 착용하고 있는 것은 조각승 색난이 제작한 보살상에서 아직 발견된 예가 없고 1660년대 활동한 혜희가 제작한 충북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좌상에서 볼 수 있는 요소이다. 대의 안쪽에 입은 승각기(僧脚崎) 표현은 조선 후기 불상에서 흔히 나타나는 연판이 위를 향한 앙련형(仰蓮形)으로 처리되었다. 보살상 뒷면의 처리는 목 주위에 대의(大衣)를 두르고 천의 자락이 펼쳐져 있는 듯이 표현되었다. 

그밖에도 일기 스님은 18세기 전반에 사천왕상 개채 등을 주도하여 조선후기 불교조각사의 절정기를 이끌었던 전북을 대표하는 조각승이다. 

일기 스님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은 경남 밀양 표충사 대광전 목조삼세불좌상이다. 이 불상은 당당한 신체 표현이나 일자(一字)로 처리된 눈, 가늘고 길 코의 표현 등에서 18세기 전반에 색난 스님보다 일기 스님이 주도적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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