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그놈한테다가 딱 맡기고 콧방귀 콱 뀌세요!

진짜로 사랑을 하는 것은 정신력을 길러 주는 것이고,
그 보배를 찾게 하는 것은
전세계, 전 우주를 맡겨 주는 거나 다름없는 겁니다.

백지 한 장을 뚫으려면
질문 스님 법문 중에 부(父)와 자(子)는 원래 둘이 아니라고 하셨는데요, 둘이 아닌 부와 자가 만나기는 해야 되겠는데, 백지 한 장 차이로 만나기가 어렵다 하셨습니다. 그 백지 한 장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뚫을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 말하자면 영원한 근본의 그 마음이 현실의 나를 진화시켜서 끌고 가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도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 자체는, 그 테두리는 부(父)가 되고, 즉 마음 내기 이전을 말하고, 마음 내는 것은 자(子)가 됩니다. 전력은 부가 되고 이 들어오는 전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알아들으시겠습니까? 전력은 부가 되고 이 전구에 불 들어오는 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구에 불 들어오는 거와 전력이 둘입니까, 어디? 둘이 아니죠. 전구가 없어도 안 되고 전력이 없어도 안 되죠. 그 가운데 가설이 되지 않아도 안 돼요. 찾는 마음이 없어도 안 된다는 얘깁니다. 삼합이 한데 합쳐져야만 무난히 돌아갑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 전구 자체가 바로 전력을 알아야 이게 상통한다는 얘깁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나를 끌고 다니던 내가 과거뿐 아니라 현실에도 과거에도 미래에도 있을 겁니다. 나를 끌고 다니는 내가 없으면, 부모한테 몸을 받았어도 영원한 내가 없으면 거기에 삼합이 한데 합쳐지지를 않아서 태어나질 못합니다. 그리고 과거에 지은 대로, 업대로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인연이 돼서 만남이 뭉쳐지는 거는 바로 이 몸속에 들어 있는 의식들입니다. 생명들, 모습들이죠. 그러니까 부(父)와 자(子)가 둘이 아닌 줄 알아야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자기가 온 데가 어딘지, 가는 데가 어딘지, 지금 하고 있는 자리가 어딘지 그것을 상세히 알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둘이 아닌 도리를 알아야 하고, 둘이 아니게 나투는 도리를 알아야만 모든 것을 간파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좀 더 열심히 정진을 하려면
질문 저는 재가 신도로서 나름대로 매일매일 좀 더 열심히 정진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떤 시간에 얼마 정도, 어떤 방법으로 하면 좋을는지요. 다른 절에서는 용맹정진 비슷하게 특별히 시간을 마련해서 일과 중에 하나 둘 이렇게 하기도 하던데요, 저도 좀 더 열심히 정진을 하고 싶은 마음에 하루 중에 새벽이면 새벽, 저녁이면 저녁, 특별한 그런 시간을 마련해 가지고 열심히 정진을 하고 싶습니다. 그 방법을 좀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여러분이 시간을 정해 놓는 것이 참선이 아닙니다. 그대로 우리가 똥 누고 밥 먹고 자고, 우리가 그냥 앉아 있고 싶으면 앉아 있고 서 있고 싶으면 서 있고 그냥 명상을 하고 싶으면 명상, 앉아서 좌선을 하고 싶으면 앉아 있는 것이, 그것이 그대로 일하면서도 참선이요, 자면서도 참선이요. 아니, 그러면 앉았을 때는 지구가 돌아가고 그래, 참선을 안 할 때는, 좌선 안 할 때는 지구가 안 돌아가나요? 모두가 자나 깨나 돌아가요, 그냥. 이 탁자도 지금 돌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옛날에 이랬거든요. 모두들 공부한다고 토굴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들어가서 좌선을 하고 꽉 앉아 있었거든요. 앉아 있으니까 그런 말을 했어요. “당신은 일어나지도 말고 오줌 누지도 말고 똥 누지도 말고 먹지도 말아야 이 돌아가는 진리가 끊어지지 않지.” 일어나면 끊어지지 않느냐고 하는 동안에 그만 무릎을 탁 치고 깨쳐서 일어났단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악회양이 말입니다, 마조 스님더러 그랬죠. 가만히 마조 스님 하는 행동을 보니까 좌선을 하고 앉아 있는데 뭉치고 앉아 있거든요.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다 아시죠? 아, 그래 기왓장을 갖다가 좌선하는 앞에 앉아서 싹싹 갈고 있었단 말입니다. 하도 답답하니까 또 마조는 “스님, 그거 뭐 하시려고 기왓장을 갈고 계십니까?” 그러니까 “나는 이걸로 거울을 만들려고 그런다.” 그러니까 “아이고, 저분 망령 나셨군.” “나는 망령 났다 하더라도 너는 앉아서 뭐 하려고 그러느냐?” 그러니까 “나는 부처를 이루려고 그럽니다.” 이러거든. “앉았다 일어나면 부처가 이루어지느냐?” 하니까 그때 그만 선뜻 그 뜻을 이루었다고 봅니다.

사람이 앉아 있고 싶으면 앉아 있고 그러지, 누가 그럭하질 말라나요? 정해 놓고 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게 그대로 참선이에요. 앉았다 일어났다 말하고 그냥 자유스럽게 사는 게 그대로 참선이란 말입니다.

대상과 둘 아니게 하나 되려면
질문 관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책을 보다가도, 남과 대화하다가도 관한다는 생각에 나를 의식하게 되어 오히려 집중이 깨지고 걸림이 되고 있습니다. 분명히 둘 아닌 도리를 말씀해 주시고 모두가 한마음일진대 저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걸림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마음 도리로 대상과 둘 아니게 하나 되어 걸림 없이 공부하고 싶습니다.

답변 우리가 ‘관하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믿고 맡겨 놓으라는 것입니다. 한군데서 들고 나는 거다. 역대를 한군데서 들고 나면서 이렇게 해 왔는데 바깥으로 방황하기 때문에, 그 한군데로 들고 나는 걸 모르기 때문에 돌아가지를 않는 겁니다. 그것을 비유하기를 요새 이렇게 하죠. 용광로에 모든 것을 넣는다면 자동적으로 새 쇠로 생산이 돼서 나오는데, 생산될 걱정까지 하면서 거기 놓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자기가 믿지 못하는 탓이다 이런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빠르고 빠른 세상에 앞장설 수 있는 인등이며, 마음의 향기로운 향이며, 밥 한 그릇을 놓고 바로 다 먹이고도 한 그릇이 되남을 수 있는 그런 중용을, 바로 무의 세계 유의 세계를 같이 계합해서 부처님의 마음과 중생의 마음이 따로 없이 계합해서 중용을 하는 것이 그대로 법이다 이 소리죠. 그러니 관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나올 때, 이런 말들을 하더군요. 자기는 하루 종일 일을 했다 이겁니다. 그런데 모두 달라요. 참선하고 좌선하는 사람들이 모두 마음들이 달라요. 이거는 저녁에 단 한 시간이나 30분 앉았는데 말입니다, 하루 종일 있다가 저녁에 하는 소리를 들으면 전부 끊어졌다는 소리만 들립니다. “아이고, 오늘도 끊어뜨리고 이렇게 잊어버리고 있다. 이러니 언제 공부는 하느냐.” 하고 한탄들을 하거든요. 그래 나는 그때 빙긋이 웃었죠. 왜? 시간과 공간이 초월됐는데, 즉 말하자면 둥근 톱니가 아래 위의 게 마주쳐서 같이 돌아가는데 거기 끊어진 게 붙을 자리가 어디 있고, 이어지는 게 끊어질 자리가 어디 있느냐 이거죠. 그대로 돌아간 건데. 그대로 돌아갔고, 그 24시간 끊어졌다는 생각 하기 이전에, 그냥 그 생각이 순간 날 때에 톱니는 24시간이라는 게 없이 그대로 돌아갔다 이겁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죠.

또 하루 종일 일한 것은 누가 일을 하게 만들었던가요. 내가 있기 때문에 일을 하는 걸 만들었지 누가 딴 사람이 시킨 게 아닙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소가 언덕이 있으니까 비비듯,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부처가 있고 모두 있는 거지 내가 없는데 뭐가 있을까요? 내가 나를 시자 부리듯이 그렇게 부렸지 누가 부렸을까요? 그놈이 시킨 거지. 그놈이 시킨 거니까, 그놈이 하는 거니까, 그놈의 집이니까, 그놈의 시자니까 어쩔 수가 없는 거지. 그냥 순응해서 따라갈 뿐인 것입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고 있는데…
질문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열심히 노력하고 살다 보니까 자식들의 즐거움이 저의 즐거움보다 더 좋은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모든 생활을 가족들이 좀 더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면서 생활을 해 나가고 있는데, 이게 옳은 건지 아닌지 가끔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아버지로서 오직 일념으로 살아가고 있는 저의 생활이 옳은 일이겠지요?

답변 아버지이니까요. 하하하…. 이 세상의 어떤 회사든 중역으로 돼 있는 사람은 중역이기 때문에 직원을 다스려야 한다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죠? 또 댁도 아버지가 됐기 때문에, 아버지가 되기 전하고 아버지가 돼 가지고는 다릅니다. 아버지가 됐기 때문에 자식들한테 사랑을 베풀 수 있고, 더러운 것도 볼 수 있고, 망나니 같은 것도 볼 수 있고, 그렇게 너그러움이 있는 거지 만약에 장가들기 전이라면 딴 자식들이 그럭하는 거를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됐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머니나 아버지가 돼서 자식들을 사랑하고 내 생명보다도 더 귀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니라. 그러니 곤충에 이르기까지 개개인이 다, 자식을 생각하고 사랑을 하는 그 부처의 마음은 모두 갖춰 가지고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마음은 찰나찰나 나투면서 아니 되시는 게 없기 때문에 청수에다가 비유를 하고 또 바다에다가 비유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이란 그저 내 자식, 내 재산, 내 것만 아는 개별적인 그릇으로서만의 얘기고, 부처님께서는 삼라만상 대천세계의 모든 생명들이 다 내가 될 수가 있고, 나로서 행할 수가 있고, 나로 나투면서 이끌어 주시는, 즉 말하자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뭐 갖은 이름의 일체 보살이 다 될 수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또 일체 각계각층 중생들이 다 될 수가 있으니까 부처인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여서 그런 거니까, 그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시라는 점에서 나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말로 행으로, 또는 돈을 잘 주거나 옷을 잘 입히거나 잘 먹이거나 이러는 것이 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로 사랑을 하는 것은 정신력을 길러 주는 것이고, 그 보배를 찾게 하는 것은 전 세계, 전 우주를 맡겨 주는 거나 다름없는 겁니다. 재산 물려주는 것보다도 더 좋은 거죠.

그러니까 내가 항상 이렇게 말을 하죠. “여러분 가정에서 부부지간에 사랑이 없고 어떠한 문제가 있더라도 그대로 사랑하면서, 그대로 부드럽게 행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부드럽게 하면서 거기다가 다 맡기면, 서로 남편이다 부인이다 하는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바로 거기까지 불이 들어오게 돼 있다. 그래서 망하게 하는 모든 나쁜 습성을 고칠 수 있게끔 돼 있으니까 그렇게 하라. 또 자식도 몸을 잡아서 되는 것도 아니고 말로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잘해 줘서 되는 것도 아니다. 단 하나, 그 모든 업식을 녹여 주면 스스로 밝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거를 당신 주인공에 둘 아니게 맡겨라.” 하는 겁니다. 바로 거기서만이 부드럽게 행하게 하고, 아주 정말 보배로운 인간으로서 자유인이 되게끔 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게 하고, 모나지 않은 사람이 되게 하고, 자비하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뿌리를 싱싱하게 키워 주고 보배를 찾게 해 주는 것이 원칙이죠. 그건 거짓이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 연방 해 보세요.

나가서 뭐 어떻게 하고 다니더라도 절대로 욕하거나 때리지 마세요. 또 부부지간도 그렇고 다 그래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마시고, 저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저 속에 들어 있는 업보가 그러는 거니까, 바로 의식들이 그러는 거니까 ‘주인공! 그 뿌리는 너하고 나하고 둘이 아니야. 그러니까 주인공만이 그걸 해결할 수 있다.’ 즉 말하자면 뿌리만이 싹을 푸르르게 살게 할 수 있다 이 소리죠. 그러니 그렇게 해 주면서 겉으로는 부드럽게, 진짜 진실로써 그렇게 해 주고 한다면 정말 이 고(苦)의 테두리에서 몰락 벗어날 겁니다. 정말입니다. 그리고 착한 자식이 되고 화목을 가져오고, 질서를 문란치 않게 할 수 있고, 아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입니다.

서원과 욕심의 구별이 잘 안됩니다
질문 불교에서 말하는 욕심, 탐심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돈을 구하고자 하는데 그 돈이 결국은 우리 삶에 있어서 떠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고, 뭐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일으키는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서원과 욕심 탐심의 구별이 애매한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서원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탐심 같기도 하고, 그래서 ‘불교를 믿는 네가 돈에 대해서 욕심을 내면 그게 제대로 믿는 건가.’ 하는 내면의 이야기가 들리기도 하고 또 그런 이야기를 주변에서 듣기도 하는데, 이 서원과 욕심이나 탐심을 불교하고 연관지어 여쭙고 싶습니다.

답변 우리들이 같이 살고 있지만 돈이 없으면 참 궁하고 괴롭고 그렇죠. 그런데 묘한 법이 있습니다. 돈을 꼭 써야 할 때는 돈이 나오게끔 만드는 방법이 있죠. 남한테 꾸러 가지 않고 돈을 쌓아 놓지 않고도 어느 거든지 내 것 아님이 없이, 내가 쓸 때가 되면 딱 나오게끔 말입니다. 하하하…. 그런 방법을 몰라서야 어찌 부처님의 길을 따른다고 하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아, 이거 바가지가 없어서 물을 풀 수가 없는데….’ 이러면 벌써 주인은 알고 ‘어, 바가지가 있어야 내 심부름을 하겠구나!’ 이러고 바가지를 덜컥 갖다 주는 거예요. 그러지 않는다면 돈이 당장 없을 때, ‘돈이 없는데 이거 참, 어떡해야만 돈을 만들어서 쓰나. 어떻게 해야만 이걸 갚나.’ 하고, 그냥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에게는 돈이 빼꼼히 들여다보다가 달아나가요. ‘저 집으로 내가 들어갔다가는 그냥 찢기고 온통 야단나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돈도 사람의 마음도 몸도 모두, 일거수일투족 한마음이 돼서 그 가운데서 다스리는 주인이 다 하게끔 돼 있어요.

옛날에 이런 점이 있었죠. 이 법당를 지을 때 말입니다, 돈 한 푼이 없었어요. 그랬는데 이런 집 한 채를 갖다가 그냥 털컥 내려주시는 겁니다. 이거 무슨 뜻인지 모르시죠? 그러더니 사람들이 돈을 그저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이게 된 겁니다. 오래 끌지도 않고요. 만약에 내 사사로운 욕심을 내서 이거를 그냥 움켜쥐려고 했다면 이거 안 됐습니다. 이거는 모두의 집이기 때문에 된 겁니다. 그래서 마음을 넉넉히 쓰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욕심을 부려서 돈 없다고 돈을 생기게 해 달라고 원을 한다면 그건 안 되죠.

그러나 내가 없는 것을 그 자리에서도 알고 있기 때문에 갖다 줄 거…. 네가 형성시켰고, 네가 움죽거리게 하고, 살게 하고, 심부름을 시키면서 심부름꾼에게 돈을 안 줘서 심부름을 못하게 한다면 어떻게 하느냐 이거예요. 아, 그놈이 다 시키는 거니까 그놈한테다가 딱 맡기고 콧방귀 콱 뀌라고요. 아, 무슨 걱정입니까? 예를 들어 주인이 있고 하인이 있으면 하인은 그 주인의 심부름만 하면 그뿐이지, 돈이 없고 있고에 무슨 참견을 하느냐 이겁니다, 네? 살림할 게 없으면 주인이 어련히 줄까 봐. 아, 주인이 주면 하고 주인이 주지 않으면 안 하면 될 거 아닙니까? 그런 마음을 가져야 나중에는 진짜 주인이 돼 버리는 거예요. 주인도 없고 하인도 없고, 진짜 그 가운데 그냥 자기가 자유스럽게 하는 거죠.

불을 지피는데 말입니다, 젖은 나무로 불을 지피느냐 마른 나무로 불을 지피느냐에 따라서 쏘시개가 덜 들어가고 더 들어가고 하죠. 그러니까 마른 나무와 젖은 나무에 똑같이 불쏘시개를 한다면 젖은 나무는 안 타요. 그렇죠? 마른 나무는 불쏘시개를 조금만 해도 타 버리는데 젖은 나무는 불쏘시개를 똑같이 갖다 놓고 하더라도 그 불쏘시개만 홀랑 타 버리고는 안 타죠. 그거와 같은 겁니다. 우리가 수행이 어느 정도 돼 있어야 나무가 말라서 잘 타는 것과 같고, 수행이 돼 있지 않다면 아주 젖은 나무와 같아서 안 타죠. 그러니까 아직도 껍데기에, 즉 말하자면 타의에서 구하는 습성이 많이 있으니까 그것을 녹이려면 아예 진짜로 무조건 믿고 그렇게 해 보세요. 그러면 훨훨 탈 테니까요.

좌선할 때의 마음가짐
질문 좌선을 할 때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앉아 있어야 합니까? 생활 속에서 내 안에서 올라오는 모든 의식들을 내 근본에 맡겨 놓듯이 좌선할 때도 머리로 끊임없이 생각을 하면서 근본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지요?

답변 생각으로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닙니다. 생각이 그렇게 자동적으로 들었으면 그냥 생각이라는 생각도 말고 그냥 거기서…. 그 뜻, 뜻이 있지 않습니까? 무거운 뜻! 그 무거운 뜻이 있다면, 그냥 그 뜻을 알면 되지 생각은 무슨 생각입니까. 생각은 머리로 하는 것이고 우리는 바로 뜻으로 해 나가는 거죠, 그 뜻! 그 뜻으로 관한다 이겁니다.

이런 공부를 하다가 머리로 상기가 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러면 머리로 올라갔던 걸 자동적으로 내려오게 하는 겁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야! 머리로 올라가면 어떡해? 머리 뜨거워서 내가 견딜 수 있겠어? 그러니까 아래로 쭉 내려가!’ 이렇게 하라고요. 허허허…. 그것도 다 생명이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어떻게 관하고 앉아 있느냐.’ 하는 거죠? 똑같이 관하라는 게 아니에요, 원칙으로는 똑같은 거지만. 여러분이 일체가 한군데 주처에서 나고 든다는 것만 알면 그냥 가만히 앉아서 뜻으로 무겁게…. 왜, 이런 게 있죠? 뜻으로 ‘아 참, 광대무변하고 뭐하고도 바꿀 수 없고 참 신비하구나!’ 하는 그 즐거움이 있죠? 네. 그것입니다, 바로. 그것만 알면 내가 급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알아서 다 할 거라는 거죠. 참 이거, 여기에서는 천차만별로 돌아가면서 갖은 짓 다 하기 때문에 어떠한 힘만 있다고 할 수가 없죠. 그게 원심력이죠, 원동력이고. 그게 주처고, 그게 바로 오신통을 굴릴 수 있는 능력이죠.

그러니까 그것은 이름지어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러한 묵직한 뜻이 있다 이겁니다. 그 뜻이 있으면…. 그전에는요, ‘이 뭣고?’ 하고서 관했는데 지금 세상에는 너무 아는 게 많아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무, 정말이지 훌쩍 뛰어 넘어가리만큼 아주 머리가 선명해지고 지혜가 많아지고 물리를 많이 깨쳤다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아는 게 많기 때문에 ‘이 뭣고?’ 한다면 빈 맷돌 돌아가는 거와 같다는 얘기를 했잖아요.

그러니까 뜻으로 본다면, 이게 들이고 내는 데 들어갈 문도 없고 나올 문도 없이 나고 든다는 걸 안다면…. 이거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잘하든 못하든 자기가 하는 거지 누가 하는 겁니까? 근데 자기가 아니라 자기예요. 그러니까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나, 지금 현실의 나에게 내놓을 수 없는 나가 있어요. 거기서 다 들이고 내는데,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든 보이는 세계든 천만 가지를 다 이 육신과 더불어 같이 그냥 회전하면서 하고 있는 거죠. 그걸 알고 있다면 그 알고 있는 묵직한 심력이 있단 얘깁니다. 그럼 그 심력을 딱 인정하고 들어가는 거죠.

그러니 관한다 하면 마음의 눈으로 거기를 지켜보는 겁니다. 언제나 거기만 보고 있습니다. 육신의 눈은 지금 더 뜨지도 않고 내려뜨지도 않고 이러고 있는데 이 마음의 눈은 (가슴을 짚으시며) 여길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마음의 눈이 여길 향하고 그 너무나…. 그래서 지장이라고 그랬거든요, 지장. 지장은 땅속에 묻혀 있는 보배를 말한 겁니다. 이 몸속에 묻혀 있는 보배를 말한 겁니다, 지장이. 그러니까 그 보배가 바깥으로 나와서 광을 내면 바로 관세음입니다. 그러니까 관세음이 따로 있고 지장이 따로 있고 뭐가 따로 있고…, 이거 어지러워서 종교를 어떻게 믿습니까, 귀찮아서요. 나같이 게으른 사람은 “야, 산신 찾으러 가라. 칠성 찾으러 가라.” 이런다면 나 못 믿어요. 내가 피곤해서 죽겠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여기 가야 되고 저기 가야 되고, 여기 놔야 되고 저기 놔야 되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것을 아예 다 타파하고 부처님 한 분 모셔 놓고, 그 몸이 내 몸이고 그 마음이 내 마음이고 그 생명이 내 생명이고 둘이 아닌 그 도리를 아시라 이겁니다. 그러면 일체 만물의 근원과 물질, 모든 이름과 이치, 허공, 유생 무생(有生無生)을 다 알 수 있고 다 말할 수 있고, 이런 풀잎하고도 같이 말할 수 있고 송장하고도 말할 수 있고 말 없이도 말할 수 있고,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의 눈으로, 눈은 이렇게 건성 뜨고 마음의 눈으로 (가슴을 짚으시며) 여기를 지켜서 관하면서 하시라 이겁니다. 마음의 눈이 있지 않습니까, 마음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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