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도 노예가 되지 말고 바깥에도 노예가 되지 말라!

마음이 펄펄 뛴다 하더라도 펄펄 뛸 게 없어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쪼개져서 산산조각이 난다 하더라도
한 번 죽지 두 번 죽습니까?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2(여) 저는 불교를 믿는다는 것보다도 불교를 숭상한 것은 한 30여 년이 넘었습니다. 예전에 어떤 스님께서 받침대도 주셨고 향로도 주셨고 조그마한 부처님도 주셨어요. 그래서 그걸 한 20여 년 집에다가 놓고서는 숭상하면서 절에 나갔는데 그 『도』, 『무』를 보고서는 그걸 그날로 다 없앴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 제사를 지내는 데는 둥그런 떡 하나로 해 놓으라고 그러셨어요. 근데 제가 결혼한 이후부터는 고기를 일절 안 썼습니다. 안 쓰고 하다가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인제 떡 하나로 해 놓고선 제사를 올렸는데 스님, 저를 꼭 성불하게 해 주셔야 됩니다. (대중 웃음)

큰스님 하하하…. 우리 식구가, 한 식구가 이 세상 식구라고 본다면 우리가 수박 하나를 갖다 놓고 그 수박을 짜개서 식구가 다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씨는 되남았거든요. 그래서 그 씨를 심어서 또 중생들이 다 먹고 그 씨는 또 되남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떡 한 그릇이 중생들을 다 먹이고도 되남는 떡이죠.
제사 지낼 때 얘기 좀 해 드릴까요? 스님네들이 상을 차려 놓고 염불을 하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상을 차려 놓으면 스님네들이 공부를 했든 안 했든 스님네들이 아는 것만치, 스님네들이 ‘아, 돈 얼마를 내놔서 내가 이 음식을 이렇게 차려서 요렇게 해 놨다.’ 이걸 알고 있겠죠, 스님네들이. 그러면 영가가 들어와서 그것만 압니다. 공부를 못한 스님네들한테 밥 한 그릇을 올리고 제사를 지낼 때는 그 상에 차려 놓은 것밖에는 모르니까 영가도 들어와서 그것밖엔 모른다 이겁니다. 그러나 공부한 스님네들이나, 예전에도 선사들한테, 그 산 부처님한테 밥 한 그릇을 올리면 그 공덕이 수미산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공덕이 크고, 그래서 그 선사들이 문을 탁 열어 놓고선 이 세상 삼라대천세계를 전부 요리를 해서 그 밥 한 그릇에다 포함해서 탁 놓으니까 그 밥 한 그릇을 먹고도 되남더란 얘깁니다. 그러니 이 세상만사 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거 아님이 없는데 내가 뭐 부족할 일이 있겠는가 하고 영가가 스스로 그냥 한자리를 하게 되는 거죠. 마음먹은 대로요.

그렇게 자유스러운 거를, 만약에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은, 예를 들어서 진짜로 이걸 믿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 한해서 하는 얘깁니다. 돈이 없어 가난해서 그것을 못할 때는 “스님, 스님과 한마음이 돼서 천혼문만 써서 밥 한 그릇 놓고 저 좀 해 주세요.” 해도 그것은 됩니다. 우리가 가난하든지 가난치 않든지 이 불교를 배우는 데는 무슨 지식이나 학식이나 또는 이론이나 또는 가난한 거나 부자나 이런 거를 떠나서 배우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런 말이 있었죠. 안양의 신도들은 전부 부자만 와 가지고 어려운 사람은 갈 수가 없다고. 허, 그러더니 그렇지 않은 거를 알고는 지금은 그러지를 않습니다. 부자도요, 초라하게 입고 오는 사람도 있고요, 가난한 사람도 깨끗하게 하고 와요. 그건 왠 줄 아십니까? 인간 됨됨이에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없어도 깨끗하게 냄새 안 나게 하고 다니는 것도, 위생상 남들에게 보기 좋게 하는 방편의 그것도 자비죠. 사랑이고요. 자기만을 위해서, 자기 생각만을 위해서 ‘뭐, 냄새가 나든 말든 나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이런 건 자기주의자죠. 그러니까 모든 걸 남을 위해서 산다면 내가 위해지죠.

또 예를 들어서 이 가정에서도 그래요. 어떤 때 속상할 때 보면요, 부인들이요, 남편도 그렇고요, 물건을 턱턱 놔 가면서 “이그!” 그냥 그렇게 미워서 “으이그, 지가 뭐, 잘될 줄 알아, 그렇게 하면?” 아, 이러거든요. 그 남편이 잘 안되면 벌써 자기 앞에 온다는 생각은 못하거든요, 화나는 것이 앞서니까. 그래서 한번 굴려서 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 한 생각 한 마디가 그냥 그렇게 중요한 겁니다. 꿈을 잘못 꾸고도 잘 꿨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게 성립이 되지만 잘못 꿔서 벌벌 떨면 그건 영락없이 닥칩니다. 올해는 삼재가 들었으니깐 내가 이건 조심해야지 하고선 그런다면 영락없이 그렇게 닥칩니다. 여러분의 마음먹기에 달린 겁니다.

어떤 신부님께서, 벌써 한 20년 전입니다만 “스님, 그렇게 잘 아신다니 한번 스님한테 물어보겠습니다.” “뭘 물어보시려고요?” “귀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러고 묻더군요. “신부님께서 귀신 짓을 한다면 귀신이 있을 거고 신부님께서 귀신 짓을 안 한다면 귀신이 없을 테죠.” 그랬죠. 그랬더니 뭐라고 또 그러시는 줄 아십니까? 누가 그러는데 올해는 물에 빠져 죽는 그런 나쁜 일이 있으니 물가에 가지 말라고 그랬대요. 그래서 “신부님, 그런 생각 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생각에 따라서 물귀신에 말릴 수도 있고 그런 것이지, 그 물귀신은 누굽니까? 그 마음을 그렇게 썼으니까 그 물귀신도 자기요, 말리는 놈도 자기입니다.” 그랬더니 콧방귀 휙 하곤 그냥 가시는 거죠. 얼마 있다 또 오셨어요. 친밀하게 알았던 분이거든요.

또 오셔서 하는 소리가 “아이고, 나는 혼났어.” “왜 혼나셨어요?” 아 글쎄, 아침에 누가 모두 초청을 해서 갔는데 그 집에 층층대가 이렇게 있는데 그걸 아, 신부님 오시니깐 물로 잘 닦아 놨을 거 아닙니까. 닦아 놨는데 닦아 놓은 데서 물에 미끄러져 가지곤 그냥 거기에 디굴디굴 굴렀단 말입니다. 그래 가지고 허리를 다쳐 가지고요, 하이, 6개월을 애를 쓰다가 인제 좀 괜찮아서 왔대요. 그러기에 그랬죠. 그것 때문에 물에 안 가시는 마음이니 그 마음에 말린 거지 딴 사람이 준 게 아니다 이겁니다. 귀신이 있어서 준 게 아니고, 신부님의 그 마음 귀신에, 마음을 그렇게 했으니까 귀신이 된 거라. 물귀신이 된 거지. 그래서 말린 거지, 신부님이 그런 마음을 안 가지셨다면 그렇게 물에 넘어져서 그렇게 고생은 안 하셨을 텐데 그랬다고 그랬죠. 그러고 껄껄대고 둘이 웃었습니다. 그런 예가 있었죠. 그 신부님은 경도 참 많이 보시고 그런 분입니다. 불교라는 것을 좀 아시죠. 그래서 중생들이 많이 따른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불교 이 자체는, 기독교든 가톨릭교든 통일교든 티베트 불교든 알라신교든 일본 불교든 다 이것은 상점의 간판과 같은 거예요. 모두가 항아리 속에서 같이 살고 있고, 그 항아리 속에서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불교입니다. 불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주의 모든 것이, 생산성 있는 모든 게 돌아가는 것이 바로 불바퀴가 돌아가는 것이거든요.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지금 과학적으로 여기서 말하는 건, 뭐? 블랙홀? 뭐, 난 이름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걸로 부른다고 그럽디다. 그러니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시면 이 세상 돌아가는 게 팔만대장경입니다. 그래, 아까 저 보살님이 “나 성불하게 해 줘야 합니다.” 이렇게 했는데 너무 참, 친근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그렇지만 우리가 한마음이 될 수 있고 둘 아닌 도리를 알 수 있고, 그런다면 떡 하나 가지고도 이 세상을 다 먹이고도 남죠.

또 옛날 얘기 하나 할까요, 질문하기 전에. 어느 스님이 객승으로 어느 절에 갔답니다. 아, 가니깐 말이에요, 아주 춥고 그래요. 추워서 뭐 잘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중들은 하나도 없더래요. 근데 그 절에 보니까 커다란 목불이 턱 있거든요, 뒤에는 탱화가 있고. 그러니까 탱화 하나면 족하겠다 하고 그냥 들어다가는 목불을 도끼로 풍풍 패서 자기 자는 방에 뜨끈뜨끈하게 때고선 터억 잤죠. 스님네들은 천도식을 하고서 새벽녘에 온 거죠. 와 보니까는 아, 불상이 없어졌거든요. 그런데 보니까 객중이 그냥 네 활개를 쩍 벌리고 그냥 뜨끈뜨끈한 방에서 자고 있거든요, 자기네는 추워서 죽겠는데. 그러니까 멱살을 들어서 “이놈의 객, 이놈의 중놈, 응? 아니, 불상을 갖다가 방에다 때고선 자는 놈이 어디 있느냐.” 그러면서 “아니, 부처님을 이렇게 없애 놨으니 어떡하면 좋으냐.” 하고 방방 뛰거든요. 그래서 “그게 부처님이걸랑 저 아궁이에 가서 뭐 사리가 있나 좀 찾아봐라.” 그랬답니다. 하하하.

그래 불을 아무리 뒤져 보니 사리가 나옵니까, 목불인데. “그거 봐라. 그거는 나무지 부처가 아니다.” 이거야. 그래서 또 부처가 없으니 어떡하면 좋으냐고 방방 뛰는데 아, 난데없이 어느 여인이 어린애를 못 낳는다고 삼신 불공을 하러 왔어요. 그러니까 부처님도 안 계시니 이거를 어떻게 하느냐고 방방 뛰다가 할 수 없으니까 탱화 앞에다가 밥을 지어다 놨죠, 인제. 공양을 지어다 놓고 하니까 “야, 오늘 내가 뜨뜻하게 잔 대신 내가 불공을 드려 주지.” 이러고는 나가더니 이 장삼 자락을 척 쳐들더니 말입니다 왜, 다기 물 모셔 놨지 않습니까? 거기에 손을 턱 담그더니만, 허허, 그 공양 해다 놓은 거를, 공양을 척척척척 둥글려서 쥐어 가지고는 그 탱화 부처님 입에다가 말입니다, 타악 붙이면서 하는 소리가 “이거 생남 불공을 하러 왔으니 사내애 하나 줘.” 그러고선 턱 붙여 놓고 “야, 인연 있으면 내년에 또 보세.” 그러곤 가거든요.

아, 그럭하고 그냥 가니까 뭐 어쩔 수 없죠. 그 절의 스님네들이 졌죠. 사리 있나 보라고 그랬고, 하하. 그러니까 그렇게 그냥 턱 붙여 놓고 갔는데 그 달부터 애기가 있어서 생남을 했거든요. 그래 그 이듬해에 생일이 되니까 또 그 절에 와서 불공을 드리는데 그 스님이 나타난 겁니다, 그 객승이. 나타나 가지고 “허허! 입에다 밥을 한 뭉칠 넣어 줬더니 밥값을 했구먼.” 아, 이러거든요. 하하하…. 그러니 얼마나, 이게 우스운 게 아니라 그 속에는 참 무진 법문과 광대무변한 그런 법력이 있었다는 사실이죠.

그러니 모든 게 둘이 아닌 도리와 둘이 아니게 나투는 도리를 그 스님께서는 너무나 잘 알아서 일체 부처님이 한 찰나에 드시고 한 찰나에 나시는 도리를 다 알고 계신 거죠. 그러니 우리가 부처님 법을 배울 때 나 떠나서 부처님 법을 배우려고 하지 마시고 부처님 그 형상은 모두 내 형상이요, 부처님 마음은 내 마음이요, 부처님의 생명은 내 생명이니 둘로 보지 마시고 진실하게 일배를 올리더라도, 백팔배를 올리기 이전에 일배도 일배요 백팔배도 일배입니다. 아침에 마음먹었던 것과 저녁에 마음먹은 것이 어찌 시간과 공간이 비어 있겠습니까? 둘이 아니거든. 그 도리는 무심 축지법을 안다면 둘이 아닌 도리를 알게 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도리를 알게 되고 나툼을 알게 되는 그 법입니다, 바로. 그러니 여러분이 그저 빚이라도 내다가 상을 잘 차려 놓아야만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마시고 가난하면 그냥 자기 먹는, 즉 말하자면 아주 급박하걸랑은 냉이죽을 끓여 놓더라도, 그걸로라도 하시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질문자3(여) 스님을 뵈니까 아, 인제 내가 불법을 만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만 책이나 뭐, 다른 스님이 하신 얘기도 그러시더라고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화두를 바꾸지 말아라.’ 하시는데 이 참마음이라고 바꿔도 되는지요, 아니면….

큰스님 이거 보세요. 전에 부처님 당시에는 화두가 없었어요. 그대로 자기 자생 화두죠. 그런데 내가 생각할 때는, 당신 몸뚱이가 수박이라면 수박씨를 어디서 찾죠?

대중 가운데서 마음속에서 찾지요.

큰스님 수박씨를 올봄에 심어서 이게 싹이 나고 수박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수박씨 심은 게 간 곳 없고 바로 화했죠. 싹으로 화하고 그래서 그 싹의 수박으로 화했죠. 화했는데 그 수박이 또 ‘이것이 뭣고?’ 하고선 화두를 쥐고 있다면 그 수박 자체도 자생 화둔데…. 태어난 게 화두죠, 이 세상에 태어난 게. 그런데 남이 준 거를 또 가지고 있는 거예요, 부처가 줬다 하더라도. 그런데 그 껍데기에다가 또 그것을 들고 이게 끊어질까 봐 애를 쓰는 격이 된다면 10년 20년이 가도 그것은 은산철벽 같은 거를 뚫을 수가 없습니다. 단 하나 있다면 그 화두도 거기 놓으라는 겁니다. 몸도 공했는데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니라.’ 한 뜻도 대략 짐작하시죠, 만날 이야기해서. 그럼 그 뜻이 무엇인가요? 공했다는 이치가 무엇으로 생각되십니까?

질문자3(여) 없는 데서 생겨나고 생긴 게 바로 없는 거고….

큰스님 가깝게 생각하세요. 아까 내가 얘기했죠? 고정되게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고 말하는 것도 가고 오는 것도 없고, 고정되게 젊어서 있는 것도 아니고, 고정되게 늙어서 있는 것만도 아니고. 세상만사가 다 무상하다고 한 그 자체가 바로 이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만히 있질 않고 찰나찰나, 이쪽으로 가게 되면 이쪽으로 가고, 저쪽으로 가게 되면 저쪽으로 가고, 그냥 보는 거 듣는 거 모든 게 딱, 고정되게 딱 이렇게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공했다는 겁니다. 어떤 거 됐을 때 어디로 갔을 때 나라고 할 수 없는 게 부처예요.

그런데 그것을 진짜, ‘진짜 나에게 있구나.’ 하고선 내면에 깊숙하게 내 주인공을 믿고 거기에 맡겨 놓고 이럭한다면 바로 입력된 데다가 다시 입력을 하는 거와 같아요. 용광로에 다 넣으면 제대로 재생돼서 쇠가 나가듯이. 그런데 이것이 재생이 될까 안 될까 그런 걱정도 염려도 할 건 없거든요, 용광로에다 넣으니까. 그거를 다 지나면 자가발전소도 될 수 있죠. 그러니까 그 화두도 놔라 이겁니다. 붙들고 있을 건덕지가 뭐 있습니까. 아니, 그거 붙을 자리가 있을까요, 화두 붙을 자리가? 또 병 붙을 자리가 있을까요? 가난 붙을 자리가 있을까요? 여러분이 말을 하고 돌아섰다 하면 벌써 방귀 뀌고선 소리는 났는데 하나도 한 사이가 없어. 뀐 사이가 없어. 그와 같은 거예요. 우리 지금 사는 것이 전부 탤런트가 그냥 연극하는 거와 같고 환상이 지금 지나가는 것 같은 그런 살림살이를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뜬구름처럼 한 찰나에 한 철 사는 거죠, 뭐. 그런데 무슨 화두가 붙을 자리가 있어요? 지금 나도 없는데, 각자. 그렇게 모두 화해서 돌아가니까요.

질문자4(남) 죽 끓는 마음에 어떻게 주인공이 될 수 있겠습니까?

큰스님 어, 죽 끓는 마음에. 허허허. 그래서 그 한 방울 한 방울 나오는 게 전부 문수라고 그랬죠. 요놈! 이게 주자거든. 주걱이 아니라 주자거든. 그건 비유해서 말한 겁니다. 액면 그대로 듣지 마세요. 주걱이 주자고 바로 이 방울방울 나오는 것이 요놈도 그놈이고 요놈도 그놈이고 요놈도 그놈 속에서 나오는 거고 전부 그놈이구나. 아니, 팥죽 속에서 다 나온 거지, 팥죽 방울이. 그러니까 내 살림살이가 팥죽 끓듯 하는 거거든요, 지금. 이 생명들이요, 아주 간략하게 쳐서 15억이라고 해도 되고 16억이라고 해도 돼요. 그런데 이건 숫자로 셀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식 하나가 수천도 될 수 있으니까요. 우리 마음 하나가 우주를 덮고도 남음이 있는 거니까요. 내가 선생님이 된다면 되지 못할 것 같습니까?

어떤 사람이 하도 구름을 타고 연애를 걸러 다니거든요. 사형이 보니까 아, 요놈이 또 연애 걸러 가거든. 하하하. 그런데 몸뚱인 놓고 진짜가 가는 거죠. 가짜가 가는 게 아니에요. 아, 구름을 타곤 그냥 연애 걸러 가니까, ‘요놈 또 봐라.’ 그러고선 구름을 타고 가는 거를 그냥 탁 막아 버렸어요. 그러니까 인젠 안 그럴 테니 살려 달라고 그래서 놔 줬다는 얘기가 있듯이 말입니다.

아니, 지금 이게 말입니다, 이게 죽 솥에 죽 끓듯 하는 것입니다. 그 모두가 인과로 인해서 업이 생기고 그 업이 뭉쳤기 때문에 고덩어리니까요. 거기서 그 방울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 그 방울마다 나오는 대로 속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 방울을 바로 그 마음으로 다스리고 나가야 할 텐데 그걸 다스리지 못하고는 말도 그냥 나오는 대로 해 버리고 “이 죽일 놈 살릴 놈, 급살을 맞아라.” 뭐 어쩌고…. 하하하. 그리고 미우면 “어유, 그거 차에도 치여 죽지 않아?” 성가시게 하면 그런다고요. 아이, 사실이에요. 그런다고요. 그러나 그것이 외려 죄업이 벗어져서 잘되는 게 아니라, 고쳐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욕을 하니까 ‘이 둥우리는 냉랭한 둥우리구나. 추워서 못 들어가겠다.’ 이러고는 거리로 나돌다가 점점 더하는 거예요.

그러니 아무리 도둑질을 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나쁜 일을 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공부를 안 한다 하더라도, 자고 들어왔다 하더라도, 외박을 한다 하더라도 들어오면 “얘, 너 어디 가서 뭐 춥지나 않았니?” 또 더울 때는 “덥지나 않았니? 뭐나 좀 먹었니? 얘, 너에게 주기 위해서 냉장고에 이렇게 음식을 해 놓고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하고 부드럽게 해 주고, 여기다 맡기고 부드럽게 해 주고, 또 자기가 나갈 때는 종이에다가 뽀뽀 한번 해 놓고 “당신을 사랑해!” 또 “너를 사랑해!” 요렇게 해 놓고 나가면, 그거 조금만 노력하고 조금만 이해력을 가지고 넓게 쓴다면 그 보금자리가 너무나 따뜻하기에 화목해지고 딴 데로 이탈이 되질 않아.

맷돌에 심봉을 딱 끼고선 맷돌을 돌리고 거기다가 음식을 넣을 때, 물건을 넣을 때는 잘 갈려 나오지만 심봉을 잘 꽂질 않고 하면 그냥 그게 맷돌이 이탈이 되죠. 그리고 그 물건도 갈리질 않아요. 인간도 그렇게 살면 이탈이 되고 잘 갈리지 않고 그러니까 죽네 사네 하는 겁니다. 우리가 심봉만 딱 이탈되지 않게 꽂아 놓고 그대로 잘 돌린다면 뭐라도 넣어서 갈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갈아지는 게 어디 있습니까. 안 되는 게 어디 있습니까? 내가 생각하고 하는 게 그대로 법이요, 중용입니다. 인간이라면 좀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삶의 보람도 가져야만이 인간이 산다고 볼 수 있지, 만날…. 그래서 부처님께선 안에도 노예가 되지 말고 바깥에도 노예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질문자3(여) 그러면 그 펄펄 뛰는 것도 주인공의 나툼인데요, 그것을 내 안의 주인공에 놓는다 하는 그 자체도 주인공이 다 하는 거 아니겠어요?

큰스님 그렇죠.

질문자3(여) 그러면 어떨 때가….

큰스님 배울 때나 ‘놓는다, 놔라’ 이러는 거지 지금도 놓고 가십니다. 아이, 지금 오실 때 짊어지고 오셨습니까, 발자취를? 말한 것도 짊어지고 다닙니까? 그 뭐, 말했으면 그냥 그뿐이고 또 말하고 그러지. 밥 먹었으면 짊어지고 있습니까? 싸지. 그저 먹곤 싸고 먹곤 싸고 자고 깨고 자고 깨고 그냥 노냥 이러셨지, 쳇바퀴 돌듯 했지 언제 짊어지고 다니셨습니까? 짊어졌다 하면 벌써 송장 되는 거죠, 뭐.

질문자3(여) 그럼 펄펄 뛰는 마음을 딱 잡아내는 것도 주인공인가요?

큰스님 이거 보세요. 펄펄 뛴다 하더라도 펄펄 뛸 게 없어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쪼개져서 산산조각이 난다 하더라도 한 번 죽지 두 번 죽습니까? 그러니 ‘에이그, 죽는 것도 너로 인해서고 사는 것도 너다!’ 아, 이러는데 펄펄 뛸 게 뭐 있습니까. 거기다가 모두 여러분을 공부 가르치려면 주인공이 외려 딴 사람을 시켜서 쿡쿡 찌르게 만들고 일을 벌여 놓고 그럽니다. 그러면 거기에 속아 가지곤 바깥으로 온통 야단이 나죠. 그럭하지 마시고 ‘아하, 이게 거기서 나 공부 시키느라고 이렇게 온 거로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벌써 ‘아이고, 알았구나!’ 그러고선 그냥 없어져요. 팥죽 솥에 팥죽 끓는 것 탁 치면 없어지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방울이 올라오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생활 속에서 오는 대로 그냥 주자로 쳐서 거기다 놓으십시오. 그런다면 여러분이 진짜 그 무명을 벗고 또 남도 동시에 무명을 벗겨 줄 수도 있는 그런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사십시오.

그러니까 여러분! 공부 열심히 하세요. 제가 밥 벌어먹기 위해서, 돈 벌기 위해서, 여러분을 현혹시키기 위해서 이러고 다니는 게 아닙니다. 나도 어떡합니까. 내가 요구했기에 그래도 이런 소임을 맡았겠죠.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먼지가 되든 가루가 되든 또 끝 간 데 없든, 그건 아랑곳없이 나는 그렇게 결정을 한 거니까요.

그러니까 내일 또 만납시다. 내일 만나서 질문할 거 아주 계획을 세워 가지고 오시죠. 허허허. 내일 또 질문 법담 서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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