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와 격의 없는 대화로 속진 덜어내

14세에 승보시 장원 급제 후
조정 대표해 외교 담당해
말년에 승려와 교유 늘면서
돈독한 우정 글로 남기기도

천하에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던 이정귀(李廷龜, 1564~1635)는 어린 나이에 당대의 문장가 한유((韓愈)남산시(南山詩)’를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을 만큼 글재주가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나이 14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증광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던 그는 중국어에 능해 어전통관(御前通官)으로 조정을 대표하여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등 외교 활동에 높은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가 공을 세운 탁월한 활약상은 바로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를 파직시킨 일이다. 바로 정응태가 조선을 무고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인데 이는 조선의 입장을 불리하게 하였다. 다시 말해 임응태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은 조선이 명나라를 침범하기 위해 왜병을 끌어들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명나라에 파견된 이정귀는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써서 조선의 무고를 주장함으로써 정응태의 무고가 밝혀져 파직된다. 조선으로선 통쾌한 결말을 얻은 것이니 그의 외교적 수완은 이처럼 출중했다.

특히 선조의 신임을 받았던 그는 조정의 중요한 직책인 병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는 등 그의 환로는 순탄하였다. 높은 관직을 두루 거쳤던 그는 늘 임금을 도와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일에 충심을 쏟았고, ‘글로써 나라를 빛낸다((以文華國)’는 관인문학을 실천했던 인물이었다. 일찍이 명나라 사람 양지원(梁之垣)은 이정귀의 글을 호탕하고 표일하지만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 문장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고, 장유(張維, 1587~1638) 또한 그의 문학적 재능을 칭찬하였다.

▲ <국조인물고> '이정귀비명'

한편 그의 출생과 관련된 기인한 일은 국조인물고그가 막 태어날 무렵에 호랑이가 문밖에 와서 엎드려 있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쫓아내지 못했는데 그가 태어나자 호랑이가 떠나니 마을 사람들은 모두 경이롭게 여겼다고 한다. 일국의 동량이 될 재목은 출생의 기인함도 이처럼 남다른 다른 듯하다.

늘 아속(雅俗)을 포용했던 이정귀는 40여 년간 벼슬을 살았지만 검소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국조인물고에 세자가 조문을 왔다가 돌아가 주변 사람들에 말하기를 이 사부(李師傅)는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으면서 사는 집이 매우 누추하였으니 그 검소가 숭상할 만하다고 한 것에서 드러난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의 학문은 육경(六經)을 근본으로 삼아 정진했으며 장자에도 깊이 공부하였다. 언제나 재능과 부귀로 사람을 압도하지 않았던 그는 사람들과 담소할 적마다 모인 사람들을 심취(心醉)하게 만들었다고 하니 소탈하면서도 넉넉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듯하고, 말년에는 한가하고 삶을 영위하면서 승려들과 교유했던 흔적이 엿보인다.

특히 그는 승려들과의 시를 통해 교유했는데 이는 그가 선조와 광해군 시대에 유불교유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는 연유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회적인 배경을 고려해 볼 때 유불의 교유는 상대적으로 동등한 입장에서 이뤄지기 어려웠다. 이런 분위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다소 개선되긴 하였지만 승려들의 사회적인 영향력이 확대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도 깊은 수행력을 갖춘 승려들은 출중한 문장력을 토대로 문사들과 함께 시를 짓고 시집을 남긴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이름 높은 사대부들에게 시집의 제문을 받는 등 유불의 교유는 끊어지지 않았다. 특히 문장력이 출중했던 이정귀는 그와 교유했던 승려들의 시권(詩卷)에 차운하는 시를 수편이나 남겼지만 실제로는 교유가 없었던 승려들의 시권에도 글을 써준 사례가 간간이 확인된다. 이런 사례는 그의 증금강산인쌍익서(贈金剛山人雙翼序)’에서도 확인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도판 이정귀 글씨

나는 늙을수록 번잡한 것이 싫어 건방진 동네 사람들의 소란이 매우 괴로웠다. 그래서 조정에서 퇴근하면 곧바로 문을 닫고 방문객을 받지 않았다. 시를 지어 달라고 찾아오는 산승(山僧)은 차마 사절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반겨 맞지는 않고 그저 가지고 온 시권(詩卷)에 흥이 일면 시를 적어 주고 흥이 일지 않으면 그냥 둘 뿐이었다. 이런 까닭에 시를 적어 준 승려의 시권은 많지만 승려의 얼굴을 본 경우는 드물었다. 올해 봄에 내가 한가로이 앉아 쉬는데 누군가 찾아와 문을 두드린 사람이 있었으니 글을 물으러 온 학자(學子)였고, 또 누군가 찾아와 문을 두드린 사람이 있었으니 승려 쌍익(雙翼)이었다. 사절하여 만나주지는 않고 절구(絶句) 20()를 써서 보내 주었다. 그리고 듣건대 그 승려가 무언가 불만스러운 점이 있는 듯 문밖에서 서성이다가 떠났다 하기에 노쇠한 몸이 나태하여 공문(空門)의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음을 탄식하였다.(余老益厭鬧 頗苦鄕里項領 公退輒杜門 却掃山僧之乞詩來者 雖不忍謝遣 而亦不喜接應 只取其詩卷 遇興則題之 不遇興則置之已耳 以故題僧卷多而見僧面少 今歲之春 余方燕坐 有叩門聲 問字學子也 又有叩門聲 山人雙翼也 謝不能見 書絶句二十字而送之 聞僧彷徨門外 若有不滿意而去 自嘆衰懶見嗔於空門也)

앞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를 찾아와 시를 지어달라는 승려들이 많았던 듯한데 이는 이미 이정귀의 글 솜씨가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는 승려 쌍익과 만난 인연도 처음에는 만나지도 않고 글만 써 주었는데 시권에 글을 받아 간 쌍익 스님이 다시 이정귀를 찾아와 담소를 나누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쌍익 스님은 얼마나 시를 좋아했던지 이정귀의 동사집()에 수록된 시를 줄줄 외울 정도였다. 그가 쌍익 스님을 만난 상세한 과정은 홀연히 승려 한 사람이 산기슭을 따라 지름길로 곧장 와서 두 손을 모으고 나에게 절하였다. 이에 그 이름을 물었더니 쌍익이었고, 그 거처를 물었더니 풍악(楓嶽)이었다. 바로 지난날 내가 그 시권에 시만 적어주고 얼굴은 보지 않았던 그 사람이었다. 그는 서른이 채 못 된 나이에 얼굴이 곱고 기운이 고요하였으며 얘기를 나누어 보니 정신이 맑고 밝았다.(忽見釋子從山麓 徑造叉手而拜 問其名 雙翼也 問其居 楓嶽也 卽前日題其卷而不見面者也 年未三十 貌姸氣靜 與之語 靈臺炯炯) 그는 또 천성으로 책을 좋아하여 나의 동사집()에 실린 시들을 줄줄 외는 등 학문하려는 뜻이 자못 있었다(性又嗜書 能誦余東集諸詩 頗有願學之志)”고 한다. 특히 그와 교유했던 많은 승려들 중에 정 스님의 시축에 차운하여(次政上人詩軸韻)’가 눈에 띤다. 그 내용은 이렇다.

말로 사람을 놀라게 하질 못해 두릉에 부끄러우니(語不驚人愧杜陵)시축 첫머리에 시 적는 일 내 어찌 할 수 있으랴(題贈我何能)서로 만나면 도리어 산중의 일을 이야기하느라(相逢却語山中事)쓸쓸한 방 한밤의 등잔 심지를 돋우어 다 태운다(挑盡寒齋半夜燈)

정 스님과의 만남이 엄마나 흡족했기에 산중에 일 이야기 나누랴 등잔 심지를 돋울까. 깊은 밤 등불을 돋우며 나눈 이들의 격의 없는 문답은 모든 속진을 덜어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말로 사람을 놀라게 하질 못해 두릉에 부끄러우니라고 한 것은 두보(杜甫)를 염두에 둔 말이다. 그러므로 이정귀는 글 솜씨도 미흡한 자신이 어찌 정 스님의 시축에 글을 쓰겠느냐는 말이니 그의 겸손함은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세상 사람들과의 교유란 그저 변화무쌍할 뿐 오랫동안 변함없이 자신을 찾아온 이는 승려 윤해뿐이었다. 그의 차윤해축상운(次允海軸上韻)’에는 무상과 돈독한 우정을 함께 드러냈다.

병이 많아 벗들과 떨어져 외로이 사는 걸 탄식했더니(索居多病歎離群)지팡이 짚고 찾아와 준 이는 오직 그대뿐(飛錫相尋獨有君)다시금 세상 밖 벗들과 친교 맺고 싶노니(更欲托交須世外)세상의 벗들 우정이란 너무도 변화무쌍해라(世間交道劇紛紛)

이군삭거(離群索居)는 벗들과 떨어져 외로이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내가 벗을 떠나 쓸쓸히 홀로 산지가 오래이다는 말에서 유래된 것. 늙어가는 인생사에서 가장 좋은 건 자신을 찾아주는 벗일 뿐임을 그도 절감한 듯하다. 천하의 문장가 이정귀의 글은 월사집(月沙集)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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