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소통법 ②

속으로 사랑·존경 다 해도
표현하지 않으면 소용없어
기다리지 말고 먼저 다가가
사랑한다말할 때 피어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맞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내가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가서 꽃이 될 수 없다. 부부 사이도, 부모자식 간에도, 모든 대인관계에서 마찬가지다. 아무리 사랑하고 존경하고 정성을 다하더라도 상대방에게 표현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P할머니의 눈물은 부부 간에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대학병원 외과 의사를 남편으로 둔 P할머니는 겉보기엔 아주 다복한 삶을 살았다. 처음 결혼했을 땐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시집 잘 갔다고 많은 축복과 부러움을 샀다.

자식들도 다 잘 되었다. 큰아들은 아버지 뒤를 이어 의사가 되었고, 둘째아들은 치과의사, 큰딸은 고등학교 교사, 막내딸은 화가가 되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70살이 넘을 때까지 P할머니 얼굴엔 좀처럼 웃음꽃이 피지 않았다. 무뚝뚝한 남편의 성격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결혼을 시킬 때도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췌장암 선고를 받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통증이 심해도 남편은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그런데 숨지기 전날 밤이었다. 뼈만 남은 앙상한 손으로 남편이 병상 모서리에 앉아 있는 P할머니를 불렀다. 그리곤 반쯤 뜬 물기어린 눈으로 P할머니의 귀를 자신의 입에 대라고 하더니 가느다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나 당신 사랑했어

결혼한 뒤 처음으로 그 말은 들은 P할머니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진작 말해주지 왜 이제야 말해…….”

P할머니는 화장실이 강물이 되도록 울었다.

P할머니 남편이 그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6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남편은 어릴 적 아버지를 잃었다. 그 바람에 홀어머니 아래서 동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자랐다. 그런 가운데도 홀어머니는 큰아들은 집안의 기둥이라며 악착같이 일해 기어코 의과대학까지 보냈다. 그 결과 남편은 대학병원 의사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홀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며 자란 남편은 점점 말수를 잃었고, 자신이 아니면 집안을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곤 대학병원 교수가 된 뒤 자기 공부 때문에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다섯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다해 결혼까지 시켰다.

뒤집어 말하면 P할머니 손으로 시동생 2명과 시누이 3명을 다 출가시킨 것이다. 거기다가 자신의 자식들 4명까지 포함하면 P할머니는 40여 년 간의 결혼생활 동안 무려 9명을 자신의 손으로 손수 시집장가를 보냈다. 그런데도 그 40년 동안 남편은 P할머니에게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그러다가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여보, 나 당신 사랑했어라고 말하니, 그런 남편이 얼마나 얄밉고도 야속하겠는가.

바로 다음날 이승에서는 다시 못 볼 이별을 했지만, P할머니의 마음은 평생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남편의 삶이 비로소 이해가 되면서 삶의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남편이 마지막으로 표현해주고 간 그 말 한마디가 P할머니의 죽은 마음을 살리고, 삶을 살리고, 또 여생을 살린 것이다.

표현의 중요성은 이토록 크다. 아무리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어도 표현해주지 않으면 그 사랑과 이해는 꽃이 되지 못한다.

나의 스승인 용타 큰스님은 표현의 중요성을 세 가지 촌철로 압축했다.

표현이 활로(活路)

표현의 부재는 실체의 부재이다

속마음 알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표현이 활로다는 말은 (내 마음을 상대방에게) 표현해야만 곤란을 헤치고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표현의 부재는 실체의 부재이다는 말은 표현하지 않으면 나(실체)는 물론 상대방(실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의미다. 마지막으로 속마음 알아주는 것이 사랑이다는 말 역시 (상대방의 마음을 잘 알아서) 표현해주는 것만이 진짜 사랑이고 소통이라는 말이다.

평생 동안 P할머니의 가슴을 옥죄고 짓누른 것은 시동생과 시누이들 5명을 손수 출가시킨 것이 아니다. 자녀들 4명을 잘 키우고 결혼시킨 것도 아니다. 남편의 말 한마디였다. ‘사랑한다’, ‘고생했다는 그 말 한마디 부재가 평생 동안 P할머니의 삶을 힘들고 그늘지게 했던 것이다.

수많은 부부들이 파탄을 맞이하고, 부모자식이 원수가 되고, 대인관계가 파괴되는 것도 결국은 이 표현의 부재와 소통의 잘못 때문이다.

물론 P할머니의 경우, P할머니에게도 책임은 있다. 남편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고, 남편이 먼저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주고 표현해주기를 기다린 것은 스스로 자기가 자신의 마음을 지옥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삼종지도(三從之道; 여자가 따라야 할 세 가지 도리. 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을 따르는 것)가 미덕이라 해도 자신의 마음을 먼저 표현하지 않음으로서 P할머니는 너무도 긴 세월 스스로 지옥을 살아야했던 것이다.

저축이 미덕인 시대는 지났다. 자기감정(느낌)을 자기 마음 안에 아무리 많이 저축해둔들 꽃이 되지 못한다. 감정은행에서 그 저금(느낌, 정서)들을 아낌없이 꺼내 사용할 때 나에게도 꽃이 피고 상대방에도 꽃이 핀다.

P할머니처럼 인간의 가장 큰 욕구는 사랑받고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내가 먼저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 상대방이 나에게 다가와 꽃이 되기 전에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다가가 꽃이 돼야 한다. 그리고 꽃의 말씀들을 서로 먼저 속삭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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