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들 시권에 제문 짓기 좋아한 청백리

18세 초시에 장원, 명성 크게 떨쳐
집무실에 不易心편액 걸어놔
혼란의 변고로 유배생활 보냈지만
다시 벼슬길 올라 보국충정 실천
교유한 승려만 60, 근체시 능해 

▲ 이안눌의 초상화.
동악 이안눌(東岳 李安訥, 1571~1637)은 어린 나이에 분전(墳典), 즉 고전(古典)을 두루 섭렵하여 신동(神童)이라 칭송된 인물로 수많은 승려들과 교유하였다. 그의 자()는 자민(子敏)이며, 별호(別號)는 동악(東岳)이다. 저서로 동악집을 남겼다.

그의 인물 됨됨과 학문적 성취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일찍이 선조께서 주감(胄監)에게 제생(諸生) 중에 후일 대제학이 될 만한 사람에 대해 묻자 공의 이름을 들어 대답하였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세상만사는 그저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품(逸品)의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겪는 고난은 대부분 범인(凡人)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한 것이다.

이안눌 또한 이런 세인(世人)의 시기심을 벗어날 수는 없었으니 이는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이 쓴 동악공행장“18세에 초시에 장원하여 명성을 더욱 크게 떨치자 같이 나간 자들이 시기하여 예조(禮曹)의 시험에 나가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으므로 공이 세상살이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다시는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다라고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가 다시 과거(科擧)에 나간 것은 부친의 상을 마친 후 홀로 남은 어머니를 위한 것이니 그 해가 1599년이다. 하여튼 이 해의 과거에서 2등으로 급제한 그는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된 후 형조, 예조, 호조 좌랑(佐郞)을 거쳐 정랑에 부임되는 등 여러 관직을 거친다. 특히 서천군수(瑞川郡守)로 부임했을 때에 공무에 임했던 그의 자세는 관료로서의 충심을 드러냈다. 바로 은광(銀鑛)이 있었던 서천군은 대부분의 전임 군수들이 부정에 연루되어 떠났던 부임지였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공무를 보기 전에 손을 깨끗이 씻어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단속했으며 그의 집무실인 동헌에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不易心)’는 편액을 걸었다고 하니 정직하게 공무를 수행하려는 청백리(淸白吏)로서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 이안눌의 저서 〈동악집〉. 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는 혼란의 여진이 난무했던 선조와 광해군, 그리고 인조반정을 경험했다. 당시 반정을 주도했던 무리에게 빌붙은 것을 매우 혐의스럽게 여긴 그는 휴가를 요청하고 귀향하였지만 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엔 혼란의 변고를 피할 수 없어 북변(北邊)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홍천으로 이배되기도 하는 등 그의 환로(宦路)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후일 유배에서 풀려 다시 벼슬길에 올라 보국충정을 몸으로 실천했다. 그의 행실은 순수하고 우애가 깊었다고 한다. 평소 소박한 것을 좋아했던 그는 늘 의관이 허름하여 가난한 선비와도 같았다고 한다. 이식이 동악공행장말미에 쓴 명()에는 그를 곧고 곧은 동악이여(矯矯東岳)/ 기가 두터워 완전하도다(氣厚而完)/ 문장으로 크게 발휘하니(駿發文章)/ 그 연원이 있었도다(厥其淵源)/ 용재의 후손으로(容齋之後)/큰 발자취를 이어 받았도다(大武是嗣)”고 하였다. 이어 효자나 청백리로 호칭되었으니(孝子廉士)/세상에 이론이 없었도다(世無異論)/ 문원이나 어진 관리로(文苑循良) 사서(史書)에 함께 전하리라(史同一傳)”고 하였다. 따라서 그의 삶은 이식의 간요하고 기세 좋은 문장으로 압축되어 세상에 남겨졌다. 더구나 조선 중기의 문장가요, 그림과 글씨에 이름을 날렸던 이행(李荇, 1478~1534)의 후손으로, 그 또한 선대의 문원(文苑)을 이어 문장가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렸고 차를 좋아했다.

그의 소회(小會)에는 항상 승려들이 참여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수행자들도 많았으니 이는 수많은 승려들의 시권(詩卷)에 제문(題文)을 짓고 승려들과 창수한 시가 유독 많았던 연유였던 셈이다. 물론 그가 근체시(近體詩)에 능했던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편 그는 승려들을 찾아가 교유하기를 좋아하는 벽()이 있었다. 세상사가 모두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원리를 그는 일찍부터 알았던 것일까. 그의 발길이 미친 곳만도 금강산의 여러 암자뿐 아니라 한양 근경의 우이동과 운주사(雲住寺), 관악산사가 있고, 부서의 선암사(府西禪庵寺), 범어사(梵魚寺), 통도사(通度寺), 안심사(安心寺), 천마산 불교암(天磨山佛敎庵), 적석사(積石寺), 전등사(傳燈寺), 정수사(淨水寺), 문수사(文殊寺)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으며 그와 교유했던 승려들의 수만 해도 60여 명이 넘어 보인다. 특히 정 승려의 시권에 서경의 시를 차운하여 짓다(正上人詩卷 次西坰韻)는 그가 승려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했던 일단(一段)을 드러낸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 산중에서 왔다가(爾從山中來)
다시 산중으로 돌아가네(還向山中去)
내 본래 산중의 객이었기에(我本山中客)
산중의 벗에게 보답함이라(爲報山中侶)
산중에는 그윽한 일 많아서(山中幽事多)
속인과 더불어 말하기 어려우리(難與世人語)
깊은 산중에도 꽃은 피었다가 떨어지리니(巖花開又落)
사계절 운행은 절로 그런 것이라(四時自成序)
명리의 관계는 어지러워서(擾擾名利關)
오래 머물 만한 곳이 아니라(不可以久處)
산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온다하더라도(歸去來山中)
끝내 그대를 저버리지 않으리(終當不負汝)

이 시는 동악집동사록()’에 수록된 것인데 이는 신축(辛丑, 1601)1118일부터 이듬해 33일까지 지은 시를 수록했다. 따라서 그가 정 승려의 시권에 시를 지은 시점은 1602114일경이므로 이들의 교유는 오래된 사이인 듯하다. 특히 원래 산중의 객이었기에 산중의 정 승려에게 보답하기 위해정 스님의 시권에 시를 쓴다는 그의 속내는 이 시의 행간 속에 오롯이 배어난다.

▲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 ‘이안눌청룡암시목판’. 이안눌은 동래부사 재임 시 자주 범어사를 찾았는데, 당시 범어사 혜창 스님이 시를 한 수 지어 바위에 새길 것을 요청하자 시를 써 새긴 것이 ‘청룡암시’다. 사진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외에도 우이동 송계에서 수행하던 혜정 노스님과는 오래도록 교유했던 지기(知己)로 멀리 떠나는 이안눌의 위해 짚신을 선물한 정황이 드러난다. 사혜정장노기혜(謝惠晶長老寄鞋)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멀리 산중에서 두 켤레 짚신을 보냈으니(山中遠寄兩芒)
바로 이는 (내가)관직을 떠나 서쪽으로 갈 때라네(正是解官西去時)
아름다운 송계의 숲 속을 찾아갔더니(好向松溪訪林壑)
좁은 돌길 어느 곳이든 혜정 스님이 생각나네(石蹊隨處憶吾師)

송계는 우이동(牛耳洞)에 위치한 계곡이라(松溪在牛耳洞) 하였다. 당시 혜정 스님은 송계에서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안눌에게 짚신뿐 아니라 신감채(辛甘菜, 승검초)를 보내기도 하였다. 한때 우이동에서 수행하던 혜정 스님이 노후에는 범어사에서 수행했는데 이들의 우정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이안눌의 시 정화상이 공양을 준비해 주었기에 시로써 답례하며(晶和尙設飯 詩以謝之)에서 오래된 사찰, 범어사에(梵魚古精舍)/ 노승의 이름은 혜정이라(老僧名惠晶)/ 내가 그 방에서 묵으니(我來宿其房)/ 새벽에 일어나 밥과 국을 준비했지(晨起具飯羹)”라고 한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이밖에도 그는 혜정 노스님의 제자일 것이라 추정되는 범어사 승려 지안(智安), 묘전(妙全), 도원(道元) 등과도 깊이 교유했던 흔적이 보인다. 따라서 그는 승려를 찾아 사찰을 주유했던 유학자이며 관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그의 성향은 천집 승려의 시를 차운하여(次天緝上人韻)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평소 승려 찾기를 즐겨하는 벽이 있었지만(平生性癖喜尋僧)
그대 같이 소쇄한 승려를 본적이 없었네(如師見未曾)
어찌하면 봄바람이 옷깃에 불어와 (安得春風拂衣去)
함께 올라 모두 신흥으로 들어 갈까나(共登皆骨入神興)

이 시의 말미에는 신흥은 절의 이름으로 지리산에 있다(神興 寺名 在智異山)”는 부제가 있다. 따라서 천집 승려는 지리산의 신흥사에서 수행했던 승려였다는 사실을 밝혀둔 것이다. 이뿐 아니라 그는 천집 승려가 소쇄한 수행자였음을 드러냈고 그대 같이 소쇄한 승려를 본적이 없었네라고 하였다. 이는 천집 승려의 수행력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의 불교에 대한 안목은 그의 시문에 드러나는데 이는 (시를)써서 영수 승려에게 보이다(書示靈樹上人)라는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서로 만나서는 말이 없다가(相逢亦無語)
이별하면 곧 서로 생각하네(相別卽相思)
이 마음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此意果何意)
그대는 알지만 나는 모른다네(爾知吾未知)
들판의 구름, 검기가 먹빛과 같고(野雲濃似墨)
강가에 이슬비, 실처럼 가늘구나(江雨細如絲)
마음과 그 경계가 모두 고요하니(心與境俱寂)
봄바람이 버들가지에 나부끼는 듯(春風吹柳枝)

서로 만나도 말이 끊어진 상태, 그러므로 그는 말의 허무함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무언(無言)은 서로의 진심을 드러내기에 족하다. 그러므로 이들의 속 깊은 정은 깊고도 깊은 것이다. 더구나 그는 마음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경계선상이 모두 고요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니 이는 분명 삼매를 터득했던 선비였던가. 그러기에 봄바람에 버들가지 나부끼듯분별없는 경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의 벽()은 무루(無漏)를 이루게 한 원력이었을 것이며 도처의 사찰을 조견했던 인연이나 수많은 승려들과의 나눈 교유의 공덕은 분명 전생의 숙연(宿緣)이 아니고는 이룰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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