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수 천도교 교령

조계종 종무원 특강 ‘31운동 정신과 불교의 가르침

191931, 경술국치로 인해 침탈된 민족 자주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이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났다. 당시 불교와 천도교, 개신교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다. 하지만 불교는 민족대표에 2명만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로 독립운동 역할에 있어 소극적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박남수 천도교 교령은 217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특강 ‘31운동 정신과 불교의 가르침에서 독립선언서에 용성만해 스님만 이름을 올린 것은 타종교에 대한 배려였다이 때문에 독립선언이 가능했다. 특히 후손들이 공약삼장에 담긴 불교정신을 잘 계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리=윤호섭 기자

민족대표 33인 구성서 불거진 갈등
불교계 양보로 원만하게 해결돼
민족대표 인원 적어도 제 몫 다했다

▲ 박남수 교령은… 천도교 종무원장, 천도교 종의원 의장, 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을 역임하고, 현재 천도교 교령과 한국종교연합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천도교와 불교의 인연
31운동 100주년이 3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천도교 교령이기 이전에 천도교를 신앙하는 교인입니다. 오늘은 천도교와 불교는 어떤 인연이 있고 그 인연 속 가르침은 무엇인지, 31운동 준비과정과 불교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31운동 정신을 이어갈 것인지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31운동과 불교적 가르침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아보기에 앞서 천도교와 불교의 인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천도교와 불교의 만남이라면 보통 31운동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인연은 훨씬 오래됐습니다. 우리 사회를 두고 흔히 다종교사회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다종교사회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한 게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불교의 포용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것을 넓게 안고 가는 것이 불교가 갖고 있는 큰 힘 중 하나죠.

근대에 천도교민이 300만 명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불교가 아니었다면 천도교는 이 세상에 탄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왜일까요? 이것은 천도교를 창도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 조선팔도를 유람하고, 깨달음의 답을 구하지 못하고 있을 때 겪은 일화에서 시작됩니다.

수운 대신사께서 한창 구도행각으로 주유를 하고 계시던 1855, 이름을 알 수 없는 스님 한 분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금강산에는 큰 절이 많이 자리 잡고 있을 때였는데요. 금강산 유점사에 있다고 소개한 그 스님은 100일 기도 끝에 우연히 얻게 된 책을 해석할 수 없어 수소문 끝에 수운 선생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기도하다가 책을 한 권 얻었는데 답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봤으나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선생께서 한번 봐주십시오.”

수운 선생은 스님이 주신 책을 받아 읽고 보통 책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책은 하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지 세상 소리만 듣고 다녀서 되겠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대신사는 그 책을 다 읽고 스님에게 돌려드리려 했으나 스님은 홀연히 사라졌다고 동학 역사책에는 기록돼 있습니다.

이것이 최초 동학이 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 계기입니다. 동학에서는 이 일이 을묘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부릅니다. 이후 대신사는 통도사 내원암 인근에 있는 적멸굴에 들어가 한울님의 말을 듣기 위한 노력을 시작합니다. 이처럼 동학과 불교의 인연은 이미 창도 이전에 펼쳐졌습니다. 또한 불교는 조선의 억불숭유책 속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새로 일어나는 동학에 은거할 공간을 내주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천도교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 새롭게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다.

독립선언 과정서 빛난 배려
이제 이야기를 바꿔 31운동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31운동을 왜 세계 역사에 빛날 위대한 독립운동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대한민국 헌법전문에 적혀 있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세계 어느 사건을 보더라도 전 민족이 하나 된 운동은 31운동을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독립운동의 대중화와 일원화, 비폭력은 31운동의 3대 원칙입니다.

1910년 경술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우리 민족의 문화경제윤리도덕 등이 일제에 의하여 완전히 중단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민족은 10여 년간 고통을 겪다가 1919년 기미년 31일 민족대표 33인을 대표로 일치단결하여 조국광복운동을 일으켰습니다.

31운동은 민족대표 33인이 중심이 된 항일독립운동으로 운동 주체가 특정단체나 종단이 아닌 여러 종교가 함께 참여한 민족운동입니다. 또한 민족대표 전원이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이 민족운동으로 일원화 되는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개신교에서 단독으로 수행하겠다는 의견을 비롯해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경성의대 학생대표 등이 독자적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했으며, 대중적으로 알려진 인사를 대표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이 또한 여의치 않았습니다.

만일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천도교와 개신교만 참여해 31운동이 일어났다면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민족대표는 당시 개신교 16, 천도교 15, 불교 2명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불교의 영향력이 적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것은 역사를 왜곡한 겁니다. 31운동은 준비기간이 매우 짧았고 비밀리에 추진돼야 했습니다. 불교계 큰스님들은 대부분 심산유곡에 계셨기 때문에 그 시절을 감안하면 참여가 어려웠을 겁니다. 독립선언서 인쇄 시간은 다가오고, 그런 가운데 개신교는 장로교와 감리교로 갈려 서로 민족대표로 많이 참여해야 한다고 갈등을 겪었습니다.

원래 불교, 개신교, 천도교 각기 11명씩 참여해 33인을 민족대표로 하자는 합의가 있었습니다. 이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각각 11명씩 참여하겠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만해 스님의 주선으로 다툼을 멈추고 8명씩 나눠 서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불교계는 2명만 서명한 것입니다. 불교계의 양보와 희생으로 독립선언서는 무사히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독립선언서를 보면 민족대표 천도교 손병희장로교 길선주감리교 이필주불교 백용성이 앞에 등장합니다. 그렇기에 불교는 민족대표로서 3분의1 역할을 맡은 겁니다. 아시다시피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보성사는 바로 오늘날의 조계사 대웅전 앞 회나무가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잘 알려진 만해 스님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용성 스님의 업적을 찬양하고자 합니다. 용성 스님은 일제에 나라를 잃고 일본 조동종이 강요되는 순간에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는 임제종 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31운동을 앞두고 41살이던 만해 스님이 가장 먼저 찾아가 논의를 드린 분이 56세의 용성 스님이셨습니다.

만해 스님의 얘기를 들은 용성 스님은 동참의 뜻을 표하고 주변 제자들에게도 참여하도록 하셨습니다. 31운동 당시 선학원의 많은 젊은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일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모두 용성 스님의 결정에 따른 결과입니다. 용성 스님은 체포된 뒤 법정심문에도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또 독립운동을 할 생각이라고 말해 독립운동에 대한 변함없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민족대표들의 구금 소식은 곧바로 전국에 퍼졌고 31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민족의 독립은 염원하는 소리가 전국 방방곳곳에 울려 퍼졌습니다.

시대과제 풀어내는 정신으로
오늘날 우리가 민족대표 33인이 앞장서 전개한 31운동 정신을 계승하려는 이유는 그것이 과거의 위대한 사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정신에 인류의 미래를 위한 비전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정신은 독립선언서에 집대성 돼 있다고 할 것입니다. 특히 만해 스님은 독립선언서를 좀 더 강하게 써야 한다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공약삼장으로 선언서의 끝맺음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공약삼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금일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인도생존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즉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야금 어대까지던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한국사를 전공한 박노자 박사는 기미독립선언서 공약삼장집필자에 대한 고찰(불교평론 8, 2001)에서 자유비폭력을 골자로 하는 공약삼장은 불교의 해탈, 불살생, 보편 도덕주의 정신에서 출발한 것이라며 따라서 이 같은 공약삼장의 필자는 만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습니다.

독립선언은 선언의 의미만 있지만 공약삼장은 행동강령입니다. 결국 독립선언의 내용을 실천적 강령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게 없었다면 독립선언의 효과도 없었을 겁니다. 저도 공약삼장을 만해 스님이 썼다는 얘기를 반신반의 했는데 이제는 인정합니다. 공약삼장 안에 불교적 정신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를 어떤 모습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할까요? 자유평등평화사상과 개척정신, 세계화 사상, 상생정신, 양심의 등장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될 겁니다.

이처럼 31운동 정신이 우리 민족의 현재를 넘어 미래를 위한 정신이라는 점을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내용에서 알 수 있습니다. UN헌장보다 더 앞서서 괄목할 만한 시대정신이 배어나올 수 있는 것은 민족지도자들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3대 종교지도자였기에 큰 가르침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세계 역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독립운동이 될 수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불교계는 31운동이 끝난 뒤에도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고 여겼습니다. 만해 스님은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맞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습니다. 불교계가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펼친 까닭은 민족과 종교가 다르지 않다고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독립정신은 지금도 유유히 우리를 통하여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스승이 못다 이룬 사업은 제자의 몫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독립을 얻었다고 게으름을 피운다면 스승의 뜻을 잇지 못하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민족을 떠나 종교가 없다고 여긴 만해 스님의 생각은 천도교를 믿는 저에게도 큰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광복도 얻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정치경제의 성장도 이뤘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세계 유일의 분단된 조국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만해 스님과 용성 스님께서 지금 계셨다면 당장에 호통치면서 남북평화통일을 위해 전 종교인들이 하나 되는 평화통일 운동단체를 결성하라는 명령을 하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지나간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미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과제가 지금의 과제는 아닙니다. 각각의 시대가 안고 있는 과제를 풀어내는 것이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바른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요즘과 같은 어려운 시절에 다시 평화통일에 대해 고민하고 행동해야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길 역시 동학 천도교와 불교가 함께 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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