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귄터 위커(Guenther Uecker)

독일 ‘제로 운동’의 핵심적 인물
禪 통해 치유… 작품세계도 영향

주로 못으로 이미지를 형상화해
존재방식 성찰·소통 과정 보여줘
“자신의 가치 스스로 인정한다면
어떤 충격에도 상처받지 않는다”

▲ 귄터 위커의 작품 〈ZERO Garten〉(1966). ‘제로 정원’으로 번역된 이 작품은 못을 이용한 작품을 공간속에 확장시키며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무수히 많은 못들이 두꺼운 판을 뚫고 지나가며 둔탁한 소리를 낸다. 시간이 흐르면 점차적으로 개체로서의 못은 사라지고 커다란 집단을 형성하며 스스로의 모습에서 변화를 꾀한다. 이처럼 밀집된 공간에 스스로의 역할을 하는 것 같은 못을 통한 행위는 하나의 예술작품이 된다. 못은 서로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전혀 낯설어 보이는 것들도 못의 역할을 통해 서로의 밀착되어가는 과정에서 서로의 모습이 합치된다. 그 의도가 무엇이든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들어낸다.

귄터 위커(Guenther Uecker, 1930~, 독일)는 ‘ZERO운동’의 핵심인물이다. 전쟁을 통한 고통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몸부림 속에서 그에게 선(禪)은 새로운 인간의 존재가치를 찾아가는 안내자가 되었다. 선은 그에게 신선한 바람처럼 자신의 정신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개념으로 수용이 되었다.

선의 바람이 강하지 않을 때 그는 심오한 선의 세계를 인지하였던 것 같다. 사람이 스스로의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행위들이 무수히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는 점차적으로 이러한 아픔들을 치유해야 하는 시대적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작품들은 많은 관객들에게 충격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희망과 포용을 수용하는 의식으로 전개시켜 나아갔다.

무심히 던진 말 한마디가 타인에게는 깊은 상처로, 고통으로, 두려움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간다. 자신은 타인을 위한다는 자기 합리화를 강조하지만 그 말을 수용하는 입장에서는 전혀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고 있다.

필자도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무수히 많은 말을 한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포장하기도하고, 과장하기도하면서 자신의 지적능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허공 속의 메아리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저 착각하고 살았던 것이다.

지적인 생각들이 허상이라는 것을 수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독일에 유학을 할 당시 처음 수업시간에 지도교수께서 나에게 한 첫 마디가 ‘네가 아는 것을 버려라’였다.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지적탐구에 천착하여 많은 지식들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던 나에게 교수님의 말씀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아는 것을 더욱 축척하기 위하여 여기까지 멀리 왔는데 아는 것을 버리라니 혼란스럽고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이 유학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하는 공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아 끝이 났다.

〈임제록〉에 나오는 ‘살불살조(殺佛殺祖)’의 가르침을 나의 지도교수께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는 생각은 이미 관념이며 현재의 존재를 망각하는 것이다. 과거의 관점과 시각으로 현재의 새로운 가치를 찾아간다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귄터 워커의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관점들이 드러난다. 자신이 안다고 하는 관념으로 작품을 대하는 관객들을 보면서 더욱 그는 자신의 관점을 버리는 작업을 하게 되며 많은 사람들에게 못이라고 하는 대상은 결코 그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거나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관점 즉, 창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름다움(美-물론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미는 전통적인 아름다움은 아니다)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못이라는 물질이 아니라 그 물질을 보는 관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못은 서로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때로는 자신의 존재성을 버리고 조형적인 요소의 일부분으로 작용하여 새로운 형상과 가치를 표현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작가의 의도와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가 선택한 못은 현 존재를 인지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현재 자신의 존재방식을 성찰하여 내가 타인에게 어떠한 존재이며 무엇을 전하고 소통하고자 하는지를 찾아가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 〈Lichtscheibe〉(1960). 세상을 보는 관점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귄터 워커의 대표적인 작품 중의 하나이다.
〈Lichtscheibe〉(1960)는 번역하면 〈렌즈〉이다. 세상을 보는 관점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의 하나이다. 무수히 많은 못을 통하여 세상을 보는 렌즈를 생각했다는 것은 다분히 선적이라고 할 수 있다.

허공에 아무리 많은 못을 박는다고 해도 결코 상처를 받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허공을 보는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고통을 주지 않는다. 모든 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그의 작품을 통하여 인지할 수 있다. 당시에 많은 관객들은 혼란스러워 하며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작가의 의도와 생각이 커다란 관심과 시대적 변화의 동기를 가져다주었다.

선에 대한 인지가 크지 않던 시기에 귄터 워커의 작품들은 선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였다. 시대적으로 스스로의 마음에 상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에 착안한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사람들을 치유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정신적인 것이며 인식의 전환을 통하여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세상을 보는 나의 관점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통하여 마음의 본래적 가치를 찾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본래가 청정하거늘 어떠한 것이 그 청정함을 물들일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에서 이 작품이 나온 것이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빛(Licht)은 바로 자신의 청정함이다. 자신의 마음에 무명(無明)을 걷어내고 나니 나타나는 그 본래의 청정한 마음이 드러난다는 것을 빛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 렌즈라고 명명된 작품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공간의 변화를 인지하는 관점이며 현재의 존재와 의미를 찾아가는 새로운 시각인 것이다.
청색의 렌즈로 보면 세상은 온통 청색이고, 빨강색의 렌즈로 세상을 보면 온통 빨강색이다.

하지만 자신이 무슨 색의 렌즈를 끼고 세상을 보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먼저 자신이 어떠한 색의 렌즈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수행이고 깨달음이다. 무수히 많은 색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보는 것이 어느 한 가지 색으로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현재의 깨어있음과 그것을 직시할 수 있는 마음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다양한 변화를 거치며 제작이 되었다.

〈ZERO Garten〉(1966)은 〈제로 정원〉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못을 이용한 작품들을 공간속에 확장시키며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로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그룹운동이며 제로를 통하여 세상에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변화하기를 바라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다수의 렌즈 시리즈를 공간 속에 설치함으로써 하나의 작품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들이 약화되고 전체의 조화와 소통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즉, 개인의 인식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아(無我)의 관점을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다. 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주장이나 관점을 강요하거나 드러내지 않으며 전체속의 하나로 수용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존재가치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상황적인 속성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가 보여주는 작품들은 시대적인 상황들과 철학적, 선적 관점들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보여 진다. 정원은 휴식과 충전의 의미가 있다. 삶의 과장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 중에 휴식을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휴식은 자유로운 사고의 원천이 되며 창의성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현재의 가치를 인식하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사고의 전환과 창의성이 요구된다.

창의성은 관념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출발하며 현재의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능력이 요구 된다. 창의성을 추구하는 예술에서는 새로운 것이 탄생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창의적인 것이 아니며 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야한다는 관점들이 요구된다.

반복되는 일상이 끊임없이 변화하듯이 예술의 관점들도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 시대적인 특성들과 정신적인 가치들을 드러내고자 하는 현대미술의 특성들 속에서 선이 많은 예술가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인식들이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필자가 처음 독일에 갔을 때 놀라운 것은 동양보다도 더 동양적이라는 현실이었다. 나의 정체성에 혼동이 올 정도로 이미 독일을 비롯한 유럽은 선과 예술, 문화, 철학, 과학 등 삶의 전반에 걸쳐 선적 삶을 구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귄터 워커의 작품들을 보면서 이런 상황을 점차 이해하게 됐다.

몇몇의 예술가들에서 시작된 조그마한 예술운동이 빠르게 문화 전반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면서 예술가의 사회적인 역할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현재 자신의 관점과 시각을 버린다면 진정 새로운 세계가 보일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권터 워커의 못은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지향점이 되었으며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한다면 그 어떠한 외부의 충격에도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도 전 세계를 다니면서 보여주고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