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이 자리에 앉아서 그냥 뛰어넘을 수도 있어

마음 내기 이전은 마음의 내 선장이고,
마음 내는 것은 바로 중생의 마음이죠.
그러니까 그 마음으로 다스려서 몰락 놓아야 합니다.

현재가 과거에 의해서 결정되는지?

질문 제게 현재에 어떤 사건이 생긴다면 그것이 현생의 어떤 인과에 의해서 생기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전생으로까지 넘어가서 전생의 업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요. 그러니까 현재가 과거에 의해서 완전히 결정되는지 그것도 알고 싶고요, 전생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지 거기에 대해서 좀 알고 싶어요.

답변 이렇게 밝고 밝은 세상에 그것을 이해를 못하시면 안 됩니다. 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나와 있는 사실은 아마 이해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유전공학이니 뭐니 하고 있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하루 동안 지내면서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정된 관념이 없고 고정된 행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렇게 짤막짤막하게 한 토막씩 찰나찰나 넘어가니깐 그렇지 시간과 공간이 없다면 바로 일생, 칠십 평생 팔십 평생 넘어가는 이 때에 우리는 그 물에서 떴다가 그 물에 가라앉을 뿐입니다. 가라앉았다 뜨고 떴다가 가라앉고 이렇게 하는 것밖에는, 인생은 그런 거밖에는 안 됩니다. 떴다 가라앉고 떴다 가라앉고 하는 동안 우리가 일평생 살면서 어저께 저질러 놓은 일 때문에 오늘까지 울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잘되겠다고 일을 했는데 그것이 안돼 버리고 망했을 때, 그렇게 자기가 저질러 놨기 때문에, 엊그저께 저질러 놓은 일이 오늘에 닥치니까 막 울게 되죠. 또 이렇게 망할 줄은 몰랐는데 망했다고 남을 원망하고 저 사람으로 인해서 이렇게 망했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가 업을 지어 놓고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업이라고 하죠. 진화를 해서 우리가 모습을 바꾼다고 하는 창조력은 우리가 금방…. 요거를 이해해 보십시오.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어머니를 만났을 때에 어떠한 생각이 듭디까? 어머니 만났을 때는 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딸의 행동과 딸로서 말이 나갑니다. 남편을 만났을 때는 남편에 의해서 말이 나가고 행동이 나가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 만날 때하고 남편 만날 때하고 찰나에, 내 마음은 전체적인 마음뿐만 아니라 그 행까지도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금 생활 불교로서 이끌어 가려니까 이렇게 내가 말을 하지 않고는 안 되겠어서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에 뛰어든 것입니다. 옛 선사들처럼 낚싯밥을 던져서 하기보다는 그냥 여러분하고 뛰어들어서 죽을 쑤든지 밥을 쑤든지 같이 앉아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칠십 평생 팔십 평생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어머니 만날 때의 그 모습하고 남편을 만났을 때 그 모습은 변화가 돼 가는 것입니다. 찰나여서 자기 자신들은 변한 거를 모르지만 시계 초침 하나 똑똑똑똑 가는 대로 변화돼 가는 것입니다. 금방 엄청나게 변화가 돼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변화된 걸 모르고 갈 뿐입니다. 찰나찰나 나투고 가는 것이죠. 화(化)해서 자꾸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만날 때에 말과 행과 마음이 동시에 융합이 돼서 무심으로, 그냥 무행을 했는데, 그럼 그렇게 한 자체와…. 칠십 평생이나 팔십 평생을 살다가 죽어서 또다시 이 세상에 나는 것이 순간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칠십 평생, 팔십 평생, 백 살을 살다가 죽든지 애 적에 죽었든지, 죽어서 다시 태어나서 인연 따라서 또 만났다 할지라도 그 순간, 어머니 만날 때에, 즉 말하자면은 그 삼합(三合)이 동시에 움죽거려서 자기가 행을 하는 거, 남편 만날 때에는 또다시 그것이 홀딱 바뀌어서 아내로서의 생각이 들고, 또 딸로서의 생각이 들고 며느리로서의 생각이 드는 거, 며느리로 살다가 금방 아내로 사는 거…. 이것을 바로 윤회라고도 하고 인연법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을 한번 축소해서 생각을 해 보시도록 하세요, 모르시면은.

그런 게 존재하느냐고 하는데 진리는 그렇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자기가 저질러 놓은 것은 자기가 받게 마련이니까요. 지혜가 있다면 다 놓을 수 있고 굴릴 수 있고, 지혜가 없다면 바늘구멍도 안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좁은 마음은 그걸 능가할 수가 없어서 모든 것을, 어머니 만날 때도 내가 만났다고 하고, 남편 만날 때도 내가 만났다고 합니다. 벌써 시계 초가 하나하나 갈 때마다 내가 변화된 거를 모르고 있을 뿐 벌써 딸이 됐다가, 남의 집 며느리가 됐다가, 금방 남의 집 남편이 된 그 사이가 찰나인데….

그것을 가만히 생각을 해 보세요. 축소를 하면은 그게 되고 대의적으로 따진다면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가 또 한 번 다른 모습을 가지고 나와서 사는, 죽고 또다시 모습을 가지고 나와서 사는 것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의 진화나 모습의 진화가 아니었더라면 오늘날에 이렇게 자유스럽게, 아까 얘기했듯이 어머니 만날 때의 마음과 아버지 만날 때의 마음, 동생 만날 때의 마음이 이렇게 아주 묘하게 자유스럽게 무심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소소영영한 마음자리에 들려면…

질문 『금강경(金剛經)』의 사구게 중에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란 말이 있듯이 머무르는 바 없는, 생각하기 이전의 마음이 소소영영한 마음자리인가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한생각 하기 이전의 마음이 한마음 주인공이 나투는 자리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한 자리에 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답변 항상 하는 말이나 똑같습니다. 마음 내기 이전은 마음의 내 선장이고, 마음 내는 것은 바로 중생의 마음이죠. 그러니까 그 마음으로 다스려서 몰락 놓을 수만 있다면…. 몰락 놓되 그냥 놓는 게 아니라 감사하게 놓고, 돌려서 놓고, 구정물을 새 물로 만들어서 놓고. 그러니까 ‘그 구정물을 깨끗하게 만드는 과정이 있다.’ 이런 말도 경에 많이 있죠. 그러나 나는 그렇게 가르치면 더디니까 아예 ‘그 구정물을 맑은 물로 그냥 대치해서 써라!’ 이겁니다. 그 과정을 다 새삼스럽게 거치고 거쳐서 이렇게 한다면 언제 우리가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대로 집어먹고, 그대로 맛을 알고, 그대로 행하라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아주 간단한 겁니다. 생각 내기 이전이 자기 뿌리니까요. 그대로 믿고, 양면을 다 거기다 믿고 놓으면 그 가운데서 아주 샘물이 나올 것입니다. 그 샘물이라는 것은 만법의 근본을 다 행할 수 있는 그런 법이며 또 생활인 것입니다.

삼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질문 삼독이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인데, 이 삼독심에는 저절로 모든 악한 것이 갖추어져 있기에 이 삼독만 벗어난다면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행자가 탐진치 삼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요. 그리고 삼독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려면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요.

답변 그런데 우리가 잘 알아야 할 문제는 지금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지 않습니까? 죽는다면 지금 이 시대가 과거가 됩니다. 그래서 어떤 무명을 쓰고, 어떤 모습을 쓰고 나오든지 간에 이 세상으로 다시 나올 땐 미래이자 현실입니다. 그래서 삼세에 지은 모든 일이 유전성으로 또는 영계성으로 업보성으로 세균성으로, 내가 나쁜 일 또는 악한 일 모두를 행한 것이 바로 업보가 돼서 삼독이 된다는 얘깁니다. 삼독. 그래서 삼독이란 말이 나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오늘, 내일, 오늘. 내일이자 오늘이다 이겁니다. 그렇게 교차로를 연방 들고 넘으면서 이렇게 여기까지 우리가 온 것이며 가는 사람도 역시 그 삼독을 면치 못한다 이런 소립니다.
이 삼독을 면치 못하는 원리는 내 마음이 툭 트이지 못해서입니다. 내 마음이 한계성을 느끼고 살아오면서 지닌 그 관습에 젖어 가지고 한 치도 나가지 못하는 마음이란 말입니다. 요건 요렇게 해야 되고 요건 요렇게 해야 되고, 어디를 가려면 꼭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고 문을 열고 나와야 하고, 물에 들어가면 빠져 죽고, 불에 들어가면 타 죽고 또 무서운 데 가면 전부 무서워서 죽고, 귀신에 말리면 그냥 무서워서 죽고, 이런 생각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이사를 잘못 가면 안 되고 삼재가 들면 안 되고, 안 되는 게 어떻게 그렇게 많은지 온통 안 되는 것뿐이죠.

그래서 오간지옥고를 받는다 하는 거는 땅 끝에서 국내 밥내도 맡지 못하는 게 오간지옥입니다. 전체가 한데 합쳐진 게 오간지옥이에요. 그런데 오간지옥이 무슨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찰나찰나에 나한테 용도에 따라서 차근차근히 살 만하면 또 무슨 일이 생기고, 살 만하면 또 일이 닥치고, 이게 해결되면 저게 터지고 이렇게 나오는 거죠. 그러니 지옥이 따로 있습니까? 이 세상이 지옥이지. 그러니 지옥도 자기네들이 만들어서 지옥을 살고, 자기네들이 만들어서 바로 승천해서 천당에서 산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 그 삼독을 면하려면 그런 그 마음의 관습에서 떠나야 될 텐데, 삼독을 면하지 못하는 원인이 거기에 있다는 얘깁니다. 한 치도 이거는 벗어날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자유스럽게 벗어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하니 이거를 어떡하면 좋습니까? 여러분! 내 마음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못한다면 이거는 노예지 자유인이 아닙니다.

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남처럼 다 타고나서…. 부처님은 눈이 셋입니까, 코가 둘입니까? 여러분도 눈 달리고 코 달리고, 부처님도 눈 달리고 코 달리고 다 똑같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인간이었어요. 그랬는데 왜 자유스럽게 살지 못하고 왜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못합니까? 과감하게 말입니다. 과감하게 뛰어넘어야죠. 죽으면 한 번 죽지 두 번 죽습니까? 입에 밥 들어가지 않을까 봐 걱정, 옷 헐벗을까 봐 걱정, 거리로 나앉아서 잘까 봐 걱정, 죽을까 봐 걱정. 이런 걱정을 하다 보니까 과감히 뛰어넘을 수 없는 옹졸한 마음이 돼서 항상 노예로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죠. 과감하셔야 됩니다.

마음은 이 자리에 앉아서 그냥 뛰어넘을 수도 있습니다. 몸뚱이를 이 자리에 두고 우주 탐사를 할 수도 있거니와 이 지구 바깥을 벗어날 수도 있고, 내 집도 갔다 올 수 있고, 내 회사도 갔다 올 수 있고, 모두 갔다 올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신발 한 짝도 어디 놓여 있는지, 맛있는 음식을 얻다 뒀는지도 알 수 있죠. 그런데도 못 믿습니까?

한생각의 능력에 대해서

질문 마음공부를 한다고 하면서도 삶이 순탄치를 않고 고통과 장애가 많습니다. 저에게 지워진 이러한 많은 장애를 한순간에 소멸시키고 자유스럽게 살아가고 싶은데, 한생각의 능력에는 한계가 지어져 있는 것인지요? 아니면 무한한 것인지요?

답변 우리는 90%가 부처라고 합니다. 왜 90%가 부처인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벌써 부처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자기 부처를 우습게 생각하고 남의 부처만 부처인 줄 알고, 위대한 것만 위대하게 보고 낮은 건 낮게 보고서 아상을 높이고 권세를 부리고 얕게 보고 이러는 까닭에 우리들에게 고가 많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마음이 그래서지요. 마음의 생동력 있는 능력, 그 능력이 공해서 공심(共心)으로서 공생(共生)을 하고 있으니, 우리가 때에 따라서 조그만 일이든지 큰 일이든지 다양하게 능력을 쓸 때에, 항상 우주 천하 삼천대천세계의 생명들의 능력은 바로 내가 한생각 낼 때 같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같이 들어와서 수많은 능력이 한데 한마음에 응시되니 한생각에 우주 천하가 들리고 말죠.

그런데 우리가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물건이 있는가 하면 두 손으로 들어야 할 물건이 있고 여러분과 같이 드는 물건이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독불장군으로서 그냥 ‘내가 했고, 내가 살고, 내가 모든 걸 줬고, 내 것이고….’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 물건, 이 색(色)이, 내 몸 육신이 나라고 산다면 그렇게 나라고 했으니 수많은 생명의 능력은 한꺼번에 한마음에 들어 주지 않습니다. 무량한 발전소 즉, 비유해서 자동적으로 돼 있는 자가발전소가 있다면 자유스럽게 남에게도 전기를 넣어 줄 수가 있죠. 항상 들어오는 불이기 때문에 꺼지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자유스럽게 스위치를 가지고 쓸 수가 있는 건데 그거를 못 쓰게 되는 원인도 바로 무량한 자가발전소를 모르고 전기가 들어온 것만 가지고 내 것이라고 하니까 그런 겁니다. 스위치를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데 그걸 모르니까 전기를 내가 자유스럽게 켤 수가 없어. 그런데 그 자가발전소가 바로 나라면 내가 자유스럽게 할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좀 널리 지혜 있게 써서, 내 육신이 생기고부터 이 세상이 모두 공한 거를 알고, 나로부터 전체가 공한 거를 알고, 내가 이 세상에 난 것이 태초요 내가 난 것이 바로 화두니까, 그 화두로 인해서 이 세상이 있고 세상에 진리가 있고,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고 깨치려고 애를 쓰는 것이 바로 제 놈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제 속에서 모든 것이 나오는 거, 그 자리에다가 믿고 일임해 놓지 않는다면 천차만별로 된 부처님의 그 광대무변한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삼천 년 전 그 모습이 바로 여러분의 모습일 겁니다. 사람이라는 두 글자는 똑같겠죠. 삼천 년 전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뭐 다른 게 있습니까? 모습이 조금 다르게 돌아갈 뿐이죠. 그러나 내 마음을 내가 헤아릴 줄 모른다면 부처님은 아마 알지도 못하고 맛도 못 보고 보지도 못할 겁니다.

천도재 지내는 도리에 대해서

질문 선원에 다닌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음공부를 해 나가면서 감사한 일들이 많이 생겨서 조상님들께 감사의 천도재를 올려드리고 싶은데요, 천도재 지내는 도리에 대해서 저와 같은 초심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옛날에도 얘기했듯이, 저 최 씨라는 분이 천도를 시킨다고 절마다 다 다니면서 해도 천도가 안 되더랍니다. 안 되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꿈에 조상들이 나타나서는 보따리를 들고 저길 나가다가 도로 들어오고 도로 들어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내게 온 겁니다, 이제. 그래 지내고 싶으면 거기 깔고 앉았던 방석 있죠? 거기다가 놓고 절하고 가라고 그랬어요. 아, 그러니 그 사람으로서는 기가 막힐 거 아닙니까? 그냥 차려 놓고 지내도 안 되는데 아니, 방석에 그냥 놓고 저 방석에 하고 가라고 하니 그거 믿겠습니까? 그러나 고개를 꺄우뚱하면서 거기다 놓고 갔습니다, 절을 하고.

그러더니 그 이튿날 오더니만 “아이고, 천도가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그냥 그 고마운 사례로 얼마를 갖다가 거기 방석에 또 놓더군요. 그날 저녁에 꿈을 꾸니까 아니, 구름을 타고 선녀들이 내려와서 모시고선 그냥 구름을 타고 다 올라가더랍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럭하고 난 뒤에 그 집이, 최 씨네 가문이 일어난 겁니다. 가발 공장을 했었죠. 그때 그게 그냥 아주 담뿍 일어나서 큰 부자가 됐죠.

그랬듯이 여러분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스님네들이 절에서 보통 이렇게 차려 놓으면 스님네들이 얼마만큼 차려 놨다는 걸 영령들이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럼 영령들이 들어와서 뭐부터 보느냐 하면 스님네들 마음부터 보거든. 마음부터 읽는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스님네들이 상 차려 놓은 거하고, 돈 얼마 가져온 거하고, 돈 얼마 놓은 거 그것만 알고 있기 때문에 거기 들어와서 그렇게 알지, 뭐. 영명(靈明)하죠.

그러나 이 마음도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목탁 소리는 우주 법계에까지 들립니다. 그래서 문이 탁 열렸으니깐 상을 안 차려 놨어도 그렇고 차려 놨어도 그렇죠. 모든 게 내 거 아님이 없고 하나도 버릴 게 없는데 아니, 그 영령들이 그 스님네들의 마음에 탁 가서 하나가 됐는데 뭐를 바라겠습니까? 바랄 게 하나도 없죠. 그러니까 그대로 거기 한데 합쳐져도 두드러지지 않고 자동적으로 풀려서 제도가 돼도 줄지 않는다 이거죠.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재사 지낼 때, 여기서 천도재를 지낼 때 물건을 많이 사다가 상에 온통 쌓아 놓고 지내야만 잘 지내 주는 걸로 아니 이 노릇을 어떡합니까? 그렇다고 해서 물건을 안 사면 ‘아이, 물건도 안 사는데 뭐 돈 이것만 해도 되고, 안 내도 되지 뭐.’ 이렇게 생각을 한다 이겁니다. 그거는 절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모습을, 아까 얘기했듯이 일차적으로 그렇게 독사의 무명을 타고났거나 또는 어떠한 짐승의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극매고 있는 그런 지옥고를 범했을 때, 이 공부 하면서 그것을 면해 주기를 바라고 모든 거를 합니다. 사람의 모습만 가지고 나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산 대로, 지은 대로 콩 나고 팥 나듯이, 그렇게 가지각색으로 모습을 쓰고 나오는 것이 지옥고입니다. 오간지옥고니 하는 그 오간지옥이란 것은 땅속에서 파먹고 땅속에서 바깥에 나오지도 못하는 것이 오간지옥입니다.

그러니 그 지옥고에서 벗어나려면 단 하나의 그 마음 즉, 영령을 탁 건져서 내 마음과 둘이 아니게 해 놓는다면 금세 제도가 되는 거죠. 인간이 된 거죠. 그렇게 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천도재를 지내고 또 지내고 또 지내게 되는데 어머니의 아버지의, 형제의 그 무명을 벗기기 위해서 지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건너가지 못하는 것을 건너가게 하기 위해서 지내는가 하면, 한 발자국도 떼어 놓지 못하고 업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건지려고 지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령들의 의식은 체가 없습니다. 체가 없기 때문에 열도 되고 백도 되고 스물도 되고 이럽니다. 돌아가셔서 천도재를 했으면은 아이, 제사(祭祀)도 안 지내야지 왜 지내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식 된 도리죠. 잘됐든 못됐든 자식이 된 도리예요. 묵은 빚 갚아야죠, 은혜를. 자기가 은혜를 못 갚으면 자기 대에서 또 자기 은혜를 갚지 않습니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 아주. 그러니 허명무실하게 떠넘기지 마십시오. 제사 지내는 것도 여기 상을 차리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단 한 가지라도 뜻있게 해서 이 세상의 중생들을 다 먹이고도 떡 한 그릇이 되남도록 하라는 겁니다. 물과 초, 향 그거면 족하지 뭐가 더 필요하냐. 모든 빗방울이 바다로 들어간들 빗방울이라고 하겠습니까? 바다의 물이라고 하지. 수만 개의 영령들을 한마음에다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그럭하면 오히려 집안이 더 깨끗하고 더 청정합니다.

그러니까 천도를 스님네들한테 청하되 무엇을 많이 차려 놓는 걸 바라지 마십시오. 찹쌀가루를 해서 재사 지낼 때 뚱그렇게 그냥 부쳐서 아홉 조각 아니면 일곱 조각, 일곱 조각 아니면 세 조각 이렇게 해서 놓고, 초 향 물 이렇게만 해 놓고 지내신다면 그것으로써 족합니다. 환란이 없어져요. 왜냐하면 나물 먹고 떡 먹고, 뭐 이거 먹고 저거 먹고 이렇게 하는 의식들은 벌써 그건 아주 하의 중생들의 얘깁니다. 여기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조상들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그냥 떡, 밥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듭니까. 어떻게 그 의식을 떠나지 못하게 만듭니까. 그래서 그렇게 해 놓고 마음속으로 예배를 올리면, 그리고 절 삼정례(三頂禮)를 할 때 맨 끄트머리엔 모든 것을 한데 모아서 내 한마음 주인공에 모든 걸 맡겨 놓고 일어난다면 그것은 아주 극히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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