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 청동불상 주조장인 송창일 명장

주조장인 송창일 명장은… 16세에 주물을 배우기 시작한 송 명장은 최기원 홍익대 교수에게 조각을 수학했다. 이후 천종사를 개업해 활동하고 있다. 송 명장은 불교미술대전 조각부 특선을 비롯, 대한민국 불교미술대제전 조각부 특선, 서울올림픽기원 불교미술대제전 입선, 대한민국 청소년 민족문화예술대전 불교조형미술 대상, 신지식인 협회장상과 한민족 대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홀홀단신 상경, 조각·주물·개금 배워
부산 홍법사 대불 등 사찰 청동불 제작

한국문화 알리는 회향의 삶 꿈꿔
‘주철장’에 불상주조 분야 지정 추진
제주 청동불상 박물관 건립 서원 세워

“뜨거운 쇳물이 하나의 예술품으로 바뀌는 것에 매력을 느껴 이 길에 뛰어든지 4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작품 하나 하나에는 수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계속해서 주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처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구리와 주석을 합금해 단단한 주물을 만드는 청동 주조. 청동은 천년을 가기에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수많은 청동불사가 이뤄졌다. 이러한 청동불사의 명맥이 끊긴 것은 조선시대. 그로부터 수백년이 지나 그 맥을 다시 잇고자 하는 이가 있다. 바로 송창일 명장(62)이다. 청동주조 명장인 송창일 명장은 특히 청동 불상을 제작·복원하는데 국내 제일로 평가받고 있다. 16세 때 청동 주조의 세계에 입문해 40여 년간 청동불상 만을 바라본 송 명장은 청동불 주조를 위해 하루 9시간 이상 1300도의 불과 씨름한다. 경기도 광주 곤지암에 위치한 ‘천종사’에서 송창일 명장을 만나 청동불사에 대한 그의 원력을 들어보았다.

하늘이 허락한 작업…“부처님 가피일 뿐”
2월 5일 곤지암의 ‘천종사’에는 크레인으로 불상을 옮기는 소리와 주물작업 전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천종사’는 송창일 명장의 작업장이다.
송창일 명장은 “대형 청동불은 말 그대로 하늘이 허락해야 완성된다”고 말했다. 수십키로가 넘는 뜨거운 쇳물이 주물 작업장까지 옮겨질 때면 송 명장의 온몸은 땀으로 범벅된다. 40년 넘은 장인인 송창일 명장이 만들어도 조그만 실수에도 불량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송창일 명장은 작업실 내 사무실에 법당을 차려놓고 아침저녁 기도를 드리면서 작업을 한다. 송 명장과 30여 년을 함께 일해 온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액운이 끼는 것을 막기 위해 범종과 불상 불사 중 주물을 붓기 전에는 바깥출입도 하지 않는다.

“부처님을 조성하기 때문에 제 자식을 보살피는 것보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특히 청동불사는 1000년이 넘게 보존되기에 한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되죠. 또 사찰에서 불자님들의 경배 대상이 되기에 더욱 마음가짐이 남다릅니다.”

생존을 위한 노력이 불교로 꽃펴
송창일 명장은 이 분야에서 조각기술과 함께 주물기술, 또 이를 다듬는 개금기술도 함께 갖고 있는 몇 안되는 장인이다. 이런 기술을 갖기 까지 역경의 세월과 이를 이겨낸 치열한 노력이 있었다.
전남 고흥 출신인 송창일 명장은 어려서부터 신심깊은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절을 다녔다. 대목장인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며 그는 16세에 혈혈단신으로 서울로 상경했다. 먹고살길이 막막하던 시절 그에게 남은 것이란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넌지시 배운 손기술 밖에 없었다.
송 명장은 최기원 홍익대 교수를 찾아가 그 밑에서 잡다한 일을 도맡아 하며 2년간 조각기술을 배웠다. 이어 이종옥 선생에게서 주물과 도금모형제작 등의 기술을 익혔다.
“안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누드모델을 조각하는 조각가들을 돕는 등 여러일을 했습니다. 당시에 곁눈으로 배운 기술이 제 밑바탕이 됐죠. 그러다 주조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순신 동상, 연세대 독수리상 등 불교 관련 주조가 아니더라도 국내 큰 작품들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우연한 기회에 전통방식으로 불상을 다루는 선생님을 만나 10여년 있으며 국보 모조를 다루게 됐고, 이를 인연으로 불교 주조에도 나서게 됐죠.”

국내 다수의 청동불상 제작해
다양한 기술을 익힌 뒤 송 명장은 직접 주물업체 천종사를 1984년 창업했다. 이에 앞서 1979년 송 명장은 미국 카터 대통령 방한 당시 국보83호인 미륵 반가사유상의 청동모조품을 만들었다. 미국 인사들에게 선물된 이 미륵 반가사유상은 500여 점이 더 만들어져 대한항공 해외지사 입구에 비치됐다. 이후 부산 홍법사의 국내 최대 청동 아미타대불, 천안 광덕사 아미타불, 고흥 정각사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상, 상주 연수암 11면 관세음보살입불, 고성 문수암 약사여래불, 제주 보문사 약사여래불 등 수많은 청동불상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됐다.

여기에 서울 전쟁기념관 작품 주조 등 일반인이 접하기 쉬운 주조물 상당수가 그의 손으로 만들어 국내 최대 동상조각인 여수 자산공원 충무공 동상도 그의 작품이다. 송 명장은 불교미술대전 조각부 특선을 비롯해 대한민국 불교미술대제전 조각부 특선, 서울올림픽기원 불교미술대제전 입선, 대한민국 민족문화예술대전 불교조형미술 대상(통일부 장관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2010년에는 고용노동부로부터 ‘대한민국 명장’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송 명장은 특히 청동탱화라는 불교미술의 새로운 장르를 열기도 했다. 1984년 불교미술대전에 출품한 청동탱화는 심사기준이 없어 제외되는 등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팔상성도를 비롯해 다양한 형태를 갖춘 청동탱화와 불상을 조각해 넣은 범종 등이 다양한 사찰불사에 활용되고 있다.
“주조물에서는 선조들이 남긴 미적 감각이 되살아 납니다. 선조들의 신심과 기술을 다시 재연하고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이 이 시대 남은 후손으로서의 과제입니다.”

녹인 쇳물을 거푸집에 붓고 있는 송창일 명장

“주조분야 장인지정 세분화가 필요”
수많은 작품 중 그의 대표작은 경기도 하남역사박물관에 비치된 보물 제332호 철불상 복원품이 꼽힌다. 이 고려철불 복원은 국내에서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전통방식으로 이뤄낸 성과이기 때문이다.
“하남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철불상 재현은 현대방식과 전통방식을 가미해서 작업을 했습니다. 제가 이 작업을 의뢰 받기 전 재현을 시도했던 분들이 규모가 워낙 크고, 톤수도 엄청나서 주물을 한 번에 붓지 않고, 따로따로 부어서 붙이려 했습니다. 그 것을 제가 전통방법과 현대방법을 가미해서 하나로 부어 성공한 것입니다.”

당시 모든 이들이 한번에 쇳물을 부어 복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문화재청 전문위원들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송 명장의 기술이 아니면 불가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내 철불 중에서 저렇게 큰 사이즈는 최초일 겁니다. 앞으로 저런 작품을 얼마나 만들는지 모르겠지만, 전통방식을 이어갈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송 명장은 현재 단 하나 뿐인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인 ‘주철장’ 분야를 세분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재 주철장은 범종 제작 분야의 단 1명만이 지정돼 있다. 대목장과 소목장 등에서 세분화돼있는 목가공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다.

“중요무형문화재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청동불상을 만드는 중요무형문화재가 없습니다. 저 많은 신라와 고려철불들은 누가 만들었겠습니까. 철불 제조도 전통기술이 전해져 오고 있고, 그 문화를 지켜가야 합니다. 불상에 관련된 주철장이 없는 것은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송 명장이 기대어 서있는 것이 그가 최초로 고안한 청동탱화다. 1984년 불교미술대전 출품 당시 파격적인 작품으로 관심을 모았다.

남은 인생, 제주에 박물관 건립으로 회향

그는 현재 제주도에 국내 최대 규모의 ‘불교 청동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중요무형문화재로서 다양한 국내 국보와 보물을 모사한 청동작품을 전시하고 싶어한다.

“국보와 보물 모사를 해 국내외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이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한국의 문화재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게 말이죠.”

특히 그가 구상하고 있는 박물관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갖추고 중생을 구제하는 ‘천수천안관음보살’의 형상으로 지어질 예정이다.

법신 아래에는 신행활동을 위한 법당과 세미나실과 숙박시설 등도 들어선다.
“40여년 부처님 일을 하며 받은 가피를 회향해야지요. 청동부처님을 활용한 박물관이 제주도의 랜드마크가 되고, 이를 찾은 내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전통과 불교문화를 널리 알리는 것이 제 남은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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