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활동가 부부 윤남진·한주영 씨

道伴의 향기

어려서부터 불교 심취·동국대 진학
민주화운동 중 교도소 수감된 윤 씨
지인 도움으로 한 씨와 면회 후 인연

윤 씨, 2008년 조계종 부대변인 겸 홍보
여성불자 권익보호에 앞장서온 한 씨
신대승불교운동본부창립에 함께 참여

▲ 1980년대 불교가 좋아 동국대학교에 입학한 윤남진·한주영 씨 부부. 각각 85학번·87학번 선후배인 이들 부부는 20년 넘도록 불교시민사회계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서로를 참 도반으로 여기는 두 사람은 “불교공부 덕에 삶을 대하는 자세가 변했다. 특히 서로 부족한 부분을 잘 메워줄 수 있어 큰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사진=노덕현 기자
누구에게나 한 명쯤 소중한 도반(道伴)이 있기 마련이다. 도반은 함께 도를 닦는 벗을 뜻하기에 단순한 친구와는 무게감부터 다르다. 부처님도 전생에 불법(佛法)에 관심 없는 바라문 조띠빨라였을 때 친한 도반 가띠까라의 거듭된 권유로 깟사빠 부처님에게 진리의 법을 들을 수 있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데 7천겁의 인연을 쌓아야 이뤄지는 부부가 서로 도반인 경우, 그 인연은 얼마나 소중할까?

재가활동가 부부인 윤남진(49·신대승불교운동본부 준비위원회 상임위원), 한주영(47·불교여성개발원 사무처장) 씨는 20년 넘도록 서로 격려하고 의지해온 참 도반이다.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과정이 마치 드라마에나 나올 만큼 독특하지만 두 사람의 성향은 정반대다. 21일 오후,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부족한 방석을 서로 양보하는 모습에서부터 도반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진정한 도반이 되기까지
남편 윤 씨는 충북 음성 출신이다. 집안은 불교를 믿었지만 그 시절 굿도 하고, 불상과 산신령을 함께 모신 시골 누구나의 절을 다녔다. 그 절에서 간절히 기도를 올려 윤 씨가 세상에 태어났단다. 그는 청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질풍노도의 시기 때문이었는지 문득 삶에서 무의미함을 느꼈다. 매일 학교에서 공부하고 끝나면 집에 돌아오는 반복되는 쳇바퀴 같은 일상이 싫었다. 그래서 주말이면 우암산 자락의 고즈넉한 사찰을 찾아 혼자만의 사색을 즐겼다. 선생님은 그런 그에게 고등불교학생회 가입을 권유했다. 그렇게 윤 씨는 불교에 심취했다.

당시 도심포교에 일찍 깨인 스님이 계셨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불교동아리 활성화에 많이 매진하셨어요. 그때는 초파일 제등행렬 때 등을 만들어 시상도 했죠. 지금보다 훨씬 활발했어요. 불교를 알아가면서부터는 교회·성당 다니는 친한 친구들과 종교에 관해 격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삶의 허무를 얘기하면 친구는 구약에 나오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는 말을 했었죠.”

윤 씨는 철없던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삶의 허무를 논한 것이 민망했는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윤 씨와 달리 부인 한 씨는 철저한 불교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전남대 철학과를 졸업했고 불교학생회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한 씨는 자다가 일어나면 부모님이 화엄이나 법화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일상처럼 봐왔단다. 그녀에게 불교 가르침은 당연히 가장 수승한 것이었다.

저는 모태신앙이 불교였어요. 항상 불교 가르침이 최고라는 얘기를 들으며 컸을 정도였으니까요. 반면에 남편은 자발적 발심자라고 할 수 있죠.”

이런 두 사람은 동국대학교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인연을 맺게 된다. 물론 그 과정은 많이 다르지만.

불교에 심취해 불교학과에 진학하고 싶었던 윤 씨는 부모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나이 50에 낳은 늦둥이 아들이 스님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단식투쟁으로도 꺾을 수 없었던 부모의 반대에 윤 씨는 조계종립학교인 동국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합격 가능성이 낮은 경찰행정학과를 1지망에 적고, 2·3지망을 각각 국문학과와 불교학과로 정했다. 하지만 그의 희망과는 달리 애석하게도 경찰행정학과에 턱걸이로 합격했다.

한 씨는 불교학과에 진학하는 데 장애물이 없었다. 부모는 두 손 들어 환영했다. 다만 친척들의 반대가 심할 것을 예상해 한동안은 수학과를 다닌다고 거짓말했을 뿐이다. “부모님이 이슬만 먹고 살 것 같은 분들이셔서 현실감각이 없다며 농을 던지는 한 씨 얼굴에는 그런 부모에 대한 감사함이 묻어났다.

동국대 85학번인 윤 씨는 대학시절 총학생회 사회부장으로 활동하며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수십 번의 집회를 주도하다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목포교도소에 수감됐다. 목포교도소는 무안군 일로읍에 위치하는데 우연도 인연이었는지 한 씨의 고향이 일로읍이었다. 한 씨는 대학원 수업을 같이 듣던 지인이 네 학교선배가 교도소에서 고생하는데 고향 가는 길에 면회 좀 가달라고 부탁하자 일면식도 없는 윤 씨를 만나기 위해 난생 처음 교도소를 방문했다. 첫 방문에 가족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이유로 교도관에게 단박에 거절당한 한 씨, 이후 윤 씨 누나와의 연락을 통해 두 번째 방문에 겨우 면회를 했다.

사실 처음 봤을 때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네요. 아마도 제가 필요한 걸 부탁만 했던 것 같아요.”

윤 씨는 한 씨와의 첫 대면이 기억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옆에 있던 한 씨도 나도 생각이 안 난다며 웃었다.

두 사람은 이후 편지와 불교서적을 주고받으며 교류했다. 청춘남녀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흘렀을 법도 하건만 이들은 정말 불교 관련 내용만 얘기했단다. 불교에 심취해 출가에 관심을 가진 청년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삶에 관심이 없었던 아가씨의 만남은 퍽 무미건조했다.

28개월 후, 윤 씨는 김영삼 대통령 취임특사로 감옥을 벗어났다. 옥살이를 마친 뒤 만난 아버지는 병으로 인해 많이 야위어있었다. 윤 씨는 큰 불효를 저질렀다는 죄책감에 며느리를 보고 싶어 하는 아버지를 위해 한 씨에게 프러포즈했다. 한 씨는 효도할 수 있는 방법이 결혼밖에 없다며 결혼하자는 윤 씨의 고백이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받아들였다.

출가에 대한 염원도 있었고, 세속적인 삶에는 관심이 없어서 결혼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근데 갑자기 프러포즈를 받으니까 기분은 좋더군요. 사실 당시 남편의 인품이 훌륭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고백을 받아들였죠.”

1994417일을 결혼날짜로 정한 두 사람. 하지만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승려대회가 열렸다. 당시 윤 씨는 실천불교전국승가회 간사로 일하고 있었다. 승려대회 후 범불교도대회가 열리고, 개혁회의가 만들어지면서 극적으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게 됐다. 물론 결혼식 준비는 한 씨가 도맡아 해야 했고, 윤 씨는 결혼식 전날 링거 두 대를 맞고서야 겨우 식장에 설 수 있었지만.

▲ 지난해 서의현 前조계종 총무원장 재심결정에 대한 94년 종단개혁 동참 재가자들의 기자회견에 동참한 윤남진 씨(사진 맨 왼쪽).

함께 불교공부하며 성장
어려서부터 불교에 관심이 컸던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은 뒤에도 늘 부처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살았다. MBTI 성격유형검사 결과서도 겹치는 부분이 하나도 없을 만큼 많이 다른 두 사람이지만 불교사상 공부에 있어서는 막힘이 없었다. 독서와 분석·기획을 좋아하는 윤 씨와 생명·평화·수행에 가치를 두는 한 씨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며 불도(佛道)를 닦았다.

사실은 제가 아내의 도움을 많이 받는 편입니다. 저는 전공이 불교가 아니었고, 아내는 불교공부를 하며 석사를 받았으니 가방끈 길이의 차이가 꽤 컸으니까요. 주로 불교서적을 읽다가 궁금한 부분을 물어보는 편인데 덕분에 속 시원하게 답변을 듣고 있습니다.”

윤 씨는 불교계 활동에 있어 부인의 도움이 크다며 한 씨를 지긋이 바라봤다. 그러자 한 씨는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교계 흐름도 듣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질책도 한다알게 모르게 약간의 경쟁심리가 있는데 사실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한 씨의 영향이었는지 윤 씨는 3~4년 전부터 간화선 수행을 시작했다. 아직 습관이 되지 않아 평소 자주 하진 않지만 윤 씨는 화두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란다. 이들 부부는 불교공부 외에 농사에도 열심이다. 농촌출신인 두 사람은 결혼 후 시골에서 농사하는 부모님을 주말마다 찾아 일손을 도왔다. 귀농을 꿈꾸며 서울 불광동에서 텃밭을 가꾸던 것을 파주 광탄면에 땅을 빌려 주말농장으로 키우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98년 종단사태를 지켜보며 승가에 대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종단개혁이 있은 지 고작 4년 남짓, 청정승가에 대한 염원은 곧 염세로 변했다. 귀농에 대한 꿈은 더욱 깊어졌고,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의 귀농학교를 수료하기도 했다. 이 꿈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만족이라는 달라이라마의 가르침처럼 세속적인 삶에 얽매이지 않는 이들 부부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종교편향 등을 규탄하는 범불교도대회로 불교계가 들끓을 당시, 윤 씨는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부대변인 겸 기획홍보 등을 맡고 있었다. 그는 11월 대구경북대회를 앞두고 잠시 쉬고 있을 때 만40세 생애전환주기를 맞아 건강검진을 받으라는 통보를 받았다. 평소 병원에 잘 다니지 않는 그였지만 검진을 받지 않으면 소속 단체에 벌금이 부과되기에 억지로 병원을 방문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초기 위암을 진단받았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수술 전날 나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고 말하는 윤 씨에게 부인 한 씨는 부처님도 노구를 이끌고 중생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다며 용기를 북돋았다.

암은 죽음까지도 생각할 수 있는 병이어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오랫동안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해서인지 현실을 부정하거나 분노하는 과정이 거의 없었죠. 이것은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이면서 또 다른 무언가의 원인이 될 테니까요. 그래서 단순히 살려주세요하고 기도하지 않고, ‘누군가를 아프게 한 잘못이 있다면 참회합니다라고 기도했어요.”

불법(佛法)을 공부한 덕에 예기치 못한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고 말하는 한 씨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묵직했다. ()과 사()가 둘이 아니기에 여여(如如)하고자 노력한다고.

다양한 삶의 고난을 헤쳐 온 이들 부부는 최근 신대승불교운동본부창립을 위해 힘을 쏟고 있다. 신대승불교운동본부는 부처님께서 60명의 비구에게 당부했던 전법선언의 정신이 현대사회에 흐려져 이를 되살리고자 하는 사부대중 연대의 장이다. 이 단체는 신대승불교운동과 아시아 평화공동체 미래전략 개발 94년 종단개혁 정신의 계승과 발전 불교 가치를 소통하는 문화 형성 불교시민사회 및 지역 활성화 지원사업 등을 목표로 한다. 20여 년간 불교시민사회단체에 몸 담아왔던 두 사람은 귀농 전 이를 통해 불교계에 마지막으로 회향하고자 한다.

새로운 불교인데 불교라는 이름조차 없어도 괜찮을 정도의 불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부처님 가르침을 누구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풀어내자는 거죠. 불교·비불교·출가자·재가자 구분 없이 지금 시대의 언어로 그 가르침을 전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어요. 불교라는 좋은 보배를 제대로 활용해서 참된 가르침이나 삶 등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소통의 장이 되어주는 것이죠. 불교뿐만 아니라 일반사회를 맑히는 데 마지막으로 힘을 쓰려 합니다.” 이들 부부의 다짐이다.

외로운 삶의 길에서 함께 걸을 도반을 만난다는 것은 큰 복이다. 도반은 단순히 고독을 달래는 유희가 아니라 스스로를 반조할 수 있는 거울이요, 삿된 마음을 바로잡아주는 스승이다. 세상 무엇보다 짙은 부부의 연으로 도반의 길을 걷는 윤남진·한주영 씨. 세속을 멀리한 이들의 맑디맑은 서원이 사바세계 중생을 제도하는 따끔한 가르침이 되길 기대해본다.

▲ 불교여성개발원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한주영 씨(사진 맨 왼쪽)는 지난해 본지가 실시한 2015감사편지 공모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