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자비보살 - 김옥숙 (부산 지체장애인복지협의회장)

중1 당시 고아친구 만나며 발심
평화의집·성광원 등 고아원 봉사
장애아동 위한 어린이집도 운영
“꿈과 희망 잃지 않게 도와줘야”

김옥숙 회장은… 1968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부터 평화의집, 성광원, 무궁애학원 등에서 봉사하며 나눔 활동을 펼쳤다. 부산여대 사회복지과, 인제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김해 보현행원 요양원 및 다양한 복지단체에서 근무했다. 현재 지체장애인복지협의회 회장을 맡아 장애인을 위해 후원활동을 펼치며 방송통신대 불교동아리 하심회회장으로 포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9년 시원재단에서 수여하는 우수사회복지사를 수상했다.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의 마음에 생긴 상처는 오래도록 남는다. 이런 생채기는 더 이상 사회를 믿지 못하게끔 한다. 추운 겨울의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는 아이들의 마음을 믿음으로 따뜻하게 녹이는 이가 있다. 부산지역 소외아동들의 ‘대모’로 불리는 이, 바로 김옥순(48ㆍ법운행) 부산지체장애인복지협의회장이다.

희망과 꿈의 수호자 되다
김 회장은 현재 그룹홈(옛 고아원) 아이들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에게 김 회장이 항상 강조하는 부분이 ‘꿈’과 ‘희망’이다. 국가지원사항을 알려주며 노력하고 고생하면 학업을 멈추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국가 지원으로 대학등록금이 나오는데도 아이들이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또 이를 알면서도 진학을 포기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사회생활에서 학력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죠. 아이들이 꿈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기에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사례가 바로 김 회장의 막내딸 사연이었다. 2013년 새벽 무렵이었다. 김 회장은 부산 화명동의 PC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 아이를 찾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미희(가명ㆍ21) 양이 불교기관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에서 가톨릭계 고아원으로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아 기관에서 이탈한 것이었다. 반복되는 가출과 방황 속에서 김 양이 유일하게 연락을 취했던 이가 김옥숙 회장이다.

“미희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부산 기장의 한 사찰 앞에 버려졌습니다. 그 후 아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찰에서 지내야만 했어요. 고등학교 때는 자신의 바람과는 반대로 기독교 시설로 들어가게 되며 방황하게 됩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버스에 그냥 치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 소리를 듣는데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김 회장은 가족들과 의논했다. 김 양이 가장 원하는 것이 일반 가정집에서 사는 것이었기에 직접 키우기로 결심했다. 남편은 그 자리에서 동의했다. 남은 과제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친딸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결국 남편이 딸을 설득했다.

“막내 딸이 들어오며 우리 가족은 4명이 됐습니다. 딸들이 너무나 사이 좋게 지내고 있어요.”

김 회장은 입양한 딸을 키우는데 성심껏 노력했다. 김 양의 꿈이 디자인 전문가였기에 예술고등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학원도 보내야 했다. 실습재료비 외에 학원비만 월 70만원에 달했다. 입시철 비용만 500만원이 넘는 등 예술계 특성상 실습 등에 많은 비용이 소모됐지만 문제는 아니었다.

“남편이 조선소에서 큰 배의 녹을 벗겨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고된 수고에도 감당하기 벅차긴 했지만 한 아이의 인생이 달려있다고 생각하니 멈출 수가 없었어요. 빚을 내 교육을 시켰습니다. 결국 원하는 대학에 입학한 막내딸을 보면 참 잘했다 싶습니다.”

방송통신대 하심회 신입생 모집에 나섰던 김옥순 회장.
고아친구 인연이 보살핌으로
이러한 김 회장의 활동은 학창시절 맺어진 작은 인연으로부터 시작됐다. 구포여중 1학년 때였다. 같은 반의 한 친구가 김 회장에게 ‘우표를 사달라’는 부탁을 자주 했다고 한다. 김 회장은 그 친구가 당시 고아원 ‘평화의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고 한다.

“우표를 사달라는 것이 같은 고아원에 살던 언니가 서울로 가 연락을 하기 위해서였어요. 편지를 보내야 하는데 우표를 살 돈이 없어 친구들에게 부탁했던 것이죠.”

그 친구와 친해진 김 회장은 매주 주말마다 용돈을 모아 군것질거리를 사 평화의집을 찾았다. 그곳에서 김 회장은 그들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당시 김 회장의 가정도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 김 회장은 중학교 때부터 방학철이면 부산의 신발공장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스스로도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한 마음은 식지 않았다.

김 회장은 중학교를 마치고 어렵게 구포여상 야간학교를 진학했다. 여기서 학교 친구들과 지인들을 모아 1985년 봉사 동아리 ‘동그라미’를 창단했다. 20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이 모임을 통해 김 회장은 더욱 활발하게 봉사 활동을 펼쳤다. 김 회장은 동그라미 회원들을 이끌고 ‘평화의 집’을 방문하고 체육대회 등을 개최했다.

“당시 평화의 집 근처에 의경들 숙소가 있었어요. 무턱대고 찾아가 체육대회를 하니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당돌했던 것 같아요.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니 그만큼 당당했던 것 같습니다.”

김 회장은 또 다른 고아원인 ‘성광원’도 매주 방문하는가 하면 장애인 시설인 ‘무궁애학원’도 빠짐없이 찾아 봉사활동을 펼쳤다. 김 회장은 청소뿐 아니라 식사 보조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중증장애인을 위한 나들이, 합동결혼식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당시 그곳에서 만난 농아 아동과 소통하기 위해 수화를 배웠습니다. 이것이 토대가 돼 부산수화통역자회에서도 활동했어요. 소외계층의 이들과는 소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큰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에요. 결혼식 때 친인척이 없으니 주변인이 함께 뭉쳐 도와주는 등의 마음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김옥순 회장의 가족사진. 30년 넘은 봉사에는 가족의 성원이 큰 힘이 됐다.
방송통신대학 하심회로 포교활동
넉넉하지 않았던 가정환경에 김 회장도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진학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방송통신대학 중문과에 입학하고 불교동아리 하심회에 들어갔다.

“학업을 쉬지 않았어요. 부산여대 사회복지과, 인제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과까지 저의 부족한 점을 메우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봉사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문성도 갖춰야 합니다. 봉사를 제대로 하고 싶었어요. 처음 공부를 다시 하기 위해 입학했던 곳이 방통대였어요. 방통대는 불교 활동을 통해 많은 도반을 만나는 계기가 되어줬습니다.”

침체됐던 하심회의 회장을 맡으면서 그녀는 프로그램을 개편했다.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접근성을 늘렸으며 경전 공부를 강화했다. 산행과 정기 법회, 경전공부, 신입을 위한 기초교리, 참선 수행, 수계법회 까지 진행했다. 다양한 활동으로 회원은 늘어갔다.

“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그들의 목적이 다 다양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처음에는 재미와 흥미에 맞게 그들을 이끌고 나중에는 최종 목표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도반으로 함께 성장하는 것이죠.”

장애인 위한 손발 되다
이어 1989년 김 회장은 지체장애인복지협의회(이하 지복회)에 들어갔다. 그 때 당시 지복회는 수많은 민간 봉사 단체와 협력해 장애인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여기서 김 회장은 자녀들에게도 나눔의 기쁨을 알게하는데 노력했다.
“지복회 투(Two)라고도 합니다. 저희가 나이가 많아졌지만 자녀들은 저희의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모임을 만들고 자신들의 역할을 찾고 있어요 돈이 많아야지만 부자는 아니잖아요. 자녀들에게 마음이 부자여야 부자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어요. 훌륭한 가르침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실천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지요.”

김 회장은 1993년 어린이집을 직접 차렸다. 보통의 어린이집이 아니었다. 20여 아동 중 장애아동이 5명이었다.

물론 일반가정의 학부모들은 반대가 심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장애아동을 꾸준히 선발했다.

“어떤 부모님은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왜 우리아이를 장애아동과 똑같이 취급하냐’구요. 저는 이런 분들에게 어린이집을 나가셔도 좋다고 합니다. 일반아동은 나가도 다른 어린이집이 있지만 장애아동은 없잖아요. 장애아동을 받아주는 곳이 없다면 그 부모가 일을 하지 못해 더욱 열악한 환경에 처할 게 뻔하죠. 이런 절박한 심정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일반가정의 학부모들도 받아들였다.

“나중에는 먼저 고맙다고도 합니다. 자녀들이 장애인을 보고 거부감 없이 평등하게 대하고, 또 배려하는 모습에 놀란 것이죠. 저절로 심성교육이 되니 평이 좋았습니다.”

평화의 집 원우들과 체육대회를 하는 모습.
신심어린 기도가 나눔활동 근원
김 회장은 이런 다양한 나눔활동의 원동력을 신심에서 찾고 있다. 18세 때부터 불자가 된 김 회장은 고등학교 졸업 후 삼광사 청년회 활동을 시작하며 매일 기도를 하고 있다. 직장생활 중에도 새벽기도를 빼먹지 않았다.

“1993년에는 아버지가 편찮으셨어요. 병원에서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간신히 숨을 쉬고 계신 상황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간에 암도 있으셨고 폐도 제 기능을 잃은 상황이었습니다. 범어사 청련암 양익 스님을 찾아가 스님이 일러주는대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그 때 알았죠. 남을 위한 기도가 오히려 나를 가볍고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요.”

김 회장은 이런 편안한 마음이 바로 부처님의 가피라고 설명했다. 사망선고를 기다리던 김 회장의 아버님도 김 회장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점차 기운을 차렸다. 그렇게 10년을 더 건강하게 사셨다.

“결국 작은 마음의 변화가 큰 변화를 이끕니다. 직장을 다녀와 기도하면서 직장생활도 순탄해졌어요.”

3번의 수술, 아픔도 꺾지 못한 나눔
김 회장은 2010년 큰 수술을 했다. 부인병이 생긴 것이다. 자궁에 3번의 수술을 했지만 2015년 재발했다. 골반까지 복수가 차고 근종도 발견됐다. 심장에도 구멍이 나는 ‘선천성심방중격결손’도 발견됐다. 게다가 2013년에는 음주운전자가 모는 차량에 치여 왼쪽 팔과 다리의 거동이 힘들어졌다.

“건강이 악화돼 지난해에는 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도반과 고아원 활동 당시 만났던 친구, 그리고 아이들 소식을 계속 받고 있어요. 이들을 위한 후원활동은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초등학교 4학년, 6학년 아동을 데리고 어렵게 사는 할머니 집이 화재로 탔을 때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모금했다. 지금도 쌀을 전달하며 그들을 후원 중이라 했다.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그룹홈을 만들 것입니다. 현재 경남에 30여개의 그룹홈이 있지만 불교에서 운영하는 그룹홈은 고작 2개입니다. 사회복지사로 일을 하러 갈 때 당시 교수님이 저를 향해 기독교를 믿느냐고 하면 그렇다라고 대답하라더군요. 그래야 취업이 된다고요. 복지를 위해 불교는 더욱 뛰어야 합니다.”

그녀는 현재 고아들이 다시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이혼으로 인한 결손 가정은 고아가 아닌 고아로 버려진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들을 위해 문을 열어 진실함과 따뜻함이 넘치는 가정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추운 겨울을 집을 향해 뛰어가는 아이들이 보인다. 부족함 그대로 그들을 안아주는 진실한 사랑이 기다리는 집은 보금자리가 되어 그들을 품는다. 버림 받은 상처까지 기꺼이 품어줄 김옥숙 회장의 넓은 품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녹이는 훈훈함으로 널리 퍼지길 발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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