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초 공부 모임에 가는 길이었다. 가로수에 아슬아슬하게 얹힌 까치둥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 추운 날 새들은 어디에서 먹이를 구하고 언 몸을 녹일까. 차가운 하늘을 헤매고 다닐 작은 새를 생각하니 불현듯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들었다. 측은지심이란 무엇인가. 바로 불교의 자비. 남의 고통을 내 것처럼 슬퍼하는 마음이다. 사찰음식은 자비를 깨우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몇 년 전 지방에서 강연을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한 중년 여성이 다가와 자신을 알아보겠느냐고 했다. 어릴 적 고향 친구였다. 그녀는 방송에서 내가 스님이 되었음을 알았지만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고 했다. 단발머리 소녀를 초로의 여인과 스님으로 만든 세월이 서운하게 느껴진 것도 잠시, 나는 그녀가 녹록지 않게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그녀는 사고로 남편을 잃고 딸 둘과 살았다고 했다. 아이들을 위해 살아야 했기에 온갖 일을 마다 않고 했다. 엄마이기 때문에 참아야 했다. 그러나 큰아이가 사춘기가 되면서 모녀 사이는 조금씩 어긋났다. 편모슬하라는 말이 듣기 싫어 뭐든 최고로 잘하라고 다그친 것이 딸에게는 억압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달래고 어르고 때로는 회초리까지 들었지만 딸은 성년이 된 뒤에는 아예 말문을 닫아버렸다.

어느덧 그녀의 나이도 오십이 훌쩍 넘었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에서 주름과 흰머리가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순간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이를 악물고 살았던 세월이 허무했다.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는 것인지, 답답하고 눈물만 나던 차에 나를 우연히 만난 것이다. 연신 눈물을 찍어내는 그녀에게 말했다.

▲ 그림 박구원.

그 힘든 세월을 살아냈으니 정말 대단하네요.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괜찮다면 따님에게 사찰음식을 배워 보라고 권해 보세요.”

얼마 뒤 친구로부터 딸이 사찰음식 강의를 신청해 듣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일부러 친구의 딸을 알은체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개월 뒤 다시 전화가 왔다.

스님, 고마워요. 스님 강의 듣더니 나보고 밖에서 나쁜 음식을 사 먹지 말라고 했어요. 우리 딸이 나를 걱정해주는 말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났답니다.”

나는 무엇이 딸아이를 변하게 했을까 생각했다. 무엇이 엄마를 안쓰럽게 생각하고 엄마의 말에 귀 기울이도록 했을까. 사찰음식은 재료를 다루고 만들고 먹기까지 오롯이 다른 생명의 존재를 느끼게 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한다. ‘라는 생명은 유일무이하지만, 또 다른 생명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특별하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에 닿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난다.

친구의 딸은 아마도 자신이 직접 요리하는 과정에서 엄마의 손길, 엄마의 슬픔과 상처를 헤아리지 않았을까. 직접 밥을 지으면서, 지난날 크게 다투고 난 뒤에도 어김없이 따듯한 밥을 해서 먹이려던 엄마의 마음을 떠올렸을 테고, 그 밥에 손도 대지 않고 차갑게 엄마를 쏘아보던 자신의 모습도 보았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어린 아이들을 위해 살아야 했던 엄마의 시간들을 그제야 정면으로 마주보았을지도 모른다. 그 엄마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딸은 몸에 해로운 음식은 그만 드세요라고 에둘러 말한 것이리라.

딸이 수료를 한 다음에는 엄마가 이어서 강의를 들었다. 언젠가 그녀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스님, 예전에는 옛날이야기를 하려면 눈물부터 솟았는데 이제는 눈물이 안 납니다.” 비로소 그녀는 과거의 아픔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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