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 속 불교 감수성 잃지 않은 문장가

어려서부터 文才 기질 드러내
사찰 순례·승려 교유 빈번
스님들에게 증표로 써주며
산사 풍광 아름답게 표현해

백주 이명한(白洲 李明漢, 1595~1645)은 조선의 문장가 이정구(李廷龜, 1564~1635)의 아들로, 그 또한 시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이미 어려서부터 문재(文才)를 드러냈던 그는 16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1616년에 전시(殿試)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그가 전적(田籍)이란 6품 벼슬에 오른 것은 주청사(奏請使)로 공을 세운 아버지 이정구의 공로 때문이었다. 이후 공조좌랑에 제수되었고 대사헌도승지대제학이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내외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이다. 특히 병자호란 때에 척화파로 지명된 그는 최명길, 김상헌, 이경여, 신익성 등과 함께 심양에 잡혀가 억류되었다가 이듬해에 돌아오는 수모를 당한 일이나, 1645년 명나라와 밀통하는 자문(咨文)을 썼다는 이유로 다시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풀려나는 수모를 겪게 된 것도 국력이 쇠락했던 시절에 겪어야 하는 약소국의 처지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런 혼란의 시절 속에서도 그의 문장은 빛났다. 김상헌이 쓴 백주집후발(後跋)에는 그의 문장에 특장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칠양(七襄)이 무늬를 이루기를 기약하고, 홍원(洪源)이 강과 바다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 신채(神采)가 혁혁하게 빛나고 음조가 맑고 밝게 울렸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공의 시는 천부적으로 얻은 것이 많다고 하였으니 비단 뜰을 지나가는 사이에 들은 데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동류끼리 접촉하여 확장시키고 이끌어서 폈다.(七襄之期於成章也 洪源之達乎江海也 奕奕乎其神采也 瀏瀏乎其音調也 或曰公之詩天得爲多 不但出於過庭之聞 觸類而長之 引而伸之)

▲ 백주 이명한이 순례했던 금강산 장안사 대웅보전. 금강산 4대 사찰 중 하나이며 한국전쟁 때 불 타 현재는 축대ㆍ비석 등만 남아있다.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아버지에게 보고 들은 것만으로 성숙된 것이 아니라 천부적인 재능에서 나왔다는 것이 김상헌이 평가한 백주의 문장세계였던 셈이다.

이처럼 웅혼하고 청절(淸切)했던 그의 문장은 당대(唐代)의 문장가 한유(韓愈, 768~824)에서 영향 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서포만필(西浦漫筆)아버지 이정구는 백주가 어렸을 적에 한유의 남산시(南山詩)’를 천 번이나 읽게 했다고 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그는 어떤 관료보다도 많은 승려들과 교유했으며 여러 사찰을 순례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문집 백주집을 통해 드러난다. 그는 월정사의 설청상인(雪淸上人), 탄균상인(坦均上人), 선기상인(善奇上人) 50여 명이 넘는 승려들과 교유했을 뿐 아니라 일본 승려들과도 교유했던 흔적이 보인다. 특히 그가 편양당 언기대사의 비문(鞭羊堂彦機大師碑)을 썼던 사실에서도 폭넓은 승려들과의 교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도 그의 나이 46세에 금강산과 영동(嶺東)의 명승지를 유람한 바가 있고, 양주 수락산 승려 대주상인(大珠上人)에게 지어준 시의 소서(小敍)에는 옥경 승려와 대주 스님과의 인연이 시를 통해 맺어졌던 내력을 언급한 바가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이것은 내가 1624년 겨울에 양주의 수락산사에 이르러 옥경 스님에게 지어 준 것이다. 당시에 승려들과 납주(臘酒)를 마시며 취중에 붓 가는 대로 쓴 것인데 글을 쓴 후로는 다시 기억하지 못했다. 지금 풍악산에서 수행하는 대주 스님이 원주의 진영으로 나를 찾아와 옷소매에서 이 시를 꺼내며 말하길 우연히 충주 폐사의 판벽 먼지 속에서 오래된 종이 하나를 얻었는데 종이 말미에 공의 호가 쓰여 있었기에 가져와 드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 지금부터 갑자년과의 거리는 이미 17년이 지났으니 옥경 스님과 수락산에서 교유했던 것이 어느 해이며 이 시가 다른 절에 유전되었고 몇 번이나 열람되었는지도 몰랐다. 처음 양주에서 지었는데 갑자기 원주에서 만난 것이며 처음 이 시를 얻은 자는 옥경 스님이고 후에 (이 시를) 소유한 것은 대주 스님이다. 이런 모든 사람의 일을 미리 예측할 수 있겠는가. 종이의 형태는 켜켜이 묵힌 오래된 것이고 먹빛이 오래되면 더럽혀지고 사라질 것이며 조금 더 오래되면 그 글자의 자획을 구별할 수 없으리라. 이 종이가 묵혀진 것이 이와 같으니 이 종이에 쓴 것이 어찌 삭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종이를 바꾸어 써서 주노라.(此吾於天啓甲子冬 到楊州之水洛山寺 贈玉瓊師作也 時當歲時 飮僧臘酒 醉中信筆以書 書後不復記也 今者楓岳山人大珠訪我於原州之營 自袖出此詩曰 偶於忠州廢寺 得一故紙於板壁塵埃之中 見紙末有公號 故持而來獻云 噫 今之去甲子十七年矣 不知瓊師之西遊在何年而此詩之流轉他寺 又閱幾番也 始作於楊州而忽遇於原州 初得者瓊師而後有者珠師 此皆人事之預料者乎 紙樣陳久 墨色漫滅 稍久則將不能辨其字此紙之陳久如此 書此紙者安得不老 遂易紙書以贈)

▲ 이명한이 남긴 친필 글씨. 일부만 남아 어떤 내용인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편지글 일부인 것으로 추정된다.

백주가 처음 양주의 수락산사를 찾아간 것은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였다. 그는 옥경 스님뿐 아니라 이곳에서 수행하는 승려들과 납주(臘酒, 섣달에 담가서 해를 묵혀 떠낸 술로 혹은 노주(老酒)라고도 한다)를 마시며 마음껏 담소하며 청담을 나눴을 것이다. 이들은 신분과 학문적 취향도 잊은 채 의기투합하여 술에도 취하고 시에 취해 마음가는대로 글을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아름다운 고회(高會)는 그의 기억에 오래도록 각인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므로 자신을 찾아온 대주 스님에 의해 17년 전에 쓴 자신의 시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니 그 감회는 깊고도 새로웠을 것이다. 실제 대주 스님이 원주 감영으로 백주를 찾아왔다고 하는데 이는 백주가 1639년 강원감사로 있었고 1640년경에 금강산과 영동을 유람했다는 사실에서 백주가 대주 스님을 만난 것은 1640년경이라 짐작된다. 당시 백주는 자신을 찾아 온 대주 스님에게 증대주상인(贈大珠上人)을 지어 증표(證表)로 주었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벽에 일어나 맑은 석경 소리 듣자니(曉起聞淸磬)
성근 별빛이 석등에 어렸지(疏星映佛燈)
이불로 몸을 싸고 술잔을 기울이자니(擁衾傾白酒)
술 마시길 탐낸 건 산승에게 부끄럽네(耽飮愧山僧)

수락산사는 고요함이 고여 있던 사찰이었던가 보다. 그렇기에 새벽의 성근 별빛이 석등에 어렸다고 하니 적요한 산사의 풍광을 시 속에 담아냈다. 아울러 납주를 마시기에 몰입된 속객, 즉 술에 탐닉했던 젊은 날의 백주였다. 이미 17년이 지난 후 당시를 회상하니 자신의 속된 탐욕이 못내 부끄럽게 느껴졌던 것은 아닐까. 이 시는 17년 전을 회상하여 쓴 시였다.

이어 그의 외원암에 머물며(宿外院庵)’ 라는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온갖 삿된 생각이 다 고요해진 곳엔(萬念俱寂處)
한 올의 티끌도 일어나지 않은 때이라(一塵不生時)
그윽한 향기 그리고 맑디맑은 석경소리(淸香與淸磬)
소리와 향기, 서로 어우러져 아름답구나(聲氣兩相宜)

▲ 이명한의 저서 〈백주집〉.
그가 찾았던 외원암이 어디에 있었던 암자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그가 유람했던 금강산이나 영동(嶺東)의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절일지도 모른다. 이곳은 분명 속인의 모든 삿된 망상이 잦아들게 하는 곳이었기에 절에서 듣는 석경소리는 속진에 찌든 속인의 마음을 씻어내기에 충분했으리라. 더구나 그윽한 향이 주변의 속기를 정화한 외원암은 백주가 묵었던 아름다운 절이었기에 선미(禪味)를 맛보기에 충분했을 터이다.

그가 어떤 스님의 시권에 쓴 시(修上人卷)’는 적요(寂寥)한 암자의 자연스런 공간의 소박함을 충분히 드러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인은 지금 백련산에 있겠거니(山人今在白蓮山)
깊은 산,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곳이라(好是山深花發處)
오히려 속인에게 시구를 청하고 돌아가니(猶向人間乞句還)
시인의 말을 기다리는 건, 바로 산꽃이라(山花定待詩人語) 

그와 교유했던 산인, 즉 승려는 백련산의 수행자인 듯하다. 그곳은 산이 깊고 꽃이 피는 승경지였다. 그런 곳에서 수행하는 승려가 백주 같은 속인에게 시구를 청하고 돌아가니 아마 그의 시를 기다리는 건 산꽃이라하였다. 하지만 그의 시구를 기다리는 것이 어찌 산꽃이랴. 티끌도 없는 깊은 산 속에 사는 꽃은 삿됨이나 속진에 때 묻지 않은 수행자이리니 그가 시문에 능하다는 말은 이런 대목에서 나타난다. 난세의 혼란 속에서도 시인의 감수성을 잃지 않았던 백주의 결기는 무엇에서 근원한 것일까. 사찰을 순례하고 수많은 승려와 교유했던 그의 품성은 분명 요순(堯舜)의 후예였던 것일까. 이런 그의 근기는 후인의 귀감이 될 만하다. 또 다른 불교와의 인연은 그가 언기대사비(彦機大師碑)’를 쓴 연유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가 당시 이름난 문장가였다는 사실에 외에도 편양언기의 제자인 의신(義信)과 석민, 열청과의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면관계상 장문의 비문을 다 소개하기는 어려워서 이 비문 말미의 명왈(銘曰)만을 소개하면 내원암이여(內院之庵兮) 스승과 스승에 스승이 함께 입적한 곳이라(師與師之師同入寂也) 백화의 비석이여(白華之石兮) 스승과 스승에 스승의 자취를 함께 기록했네(師與師之師同記蹟也) 금강산의 묘향은 만고에도 늘 그렇게 오래도록 남을 것이며(香山楓岳亘萬古而長存兮) 스승과 스승에 스승의 이름이 끝없이 함께 전해지리(師與師之師同流名於無極)”라고 노래했다. 백화(白華)는 장안사와 표훈사 사이에 위치한 절의 이름이다(長安 表訓間有一寺 名白華). 서산이 새로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爲西山新). 지금 우리는 금강산 장안사와 표훈사 사이에 위치한 백화사를 가 볼 수는 없지만 백주의 언기대사비(彦機大師碑)’에 수록된 이 글은 언기 스님의 제자들이 염원한 대로 길이길이 남아 후세에도 읊어질 명문이라 하겠다. 백주는 이명한의 호이며 천장(天章)은 그의 자이다. 그는 저서로 백주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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