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명예교수 법산 스님

모양도, 이름도 없는 것이 무심
부딪히려 안 하면 시비 벗어나
내 시각만으로 보려하지 말고
참선·염불 닦아 번뇌 지워라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본 두 스님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며 서로 격론을 벌였다. 둘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스승 인종 스님에게 물었다. 하지만 인종 스님도 제자들에게 해답을 주지 못했다. 그러자 혜능대사는 깃발도 바람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두 스님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심(無心)하다. 사람들은 이를 감정이 없거나 남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불교에서 무심은 버리려 해도 없앨 것이 없고 가지려 해도 생겨남이 없는 것이다. 이에 달마대사는 반야 가운데 무심반야가 제일이라고 말했다. 동국대 명예교수 법산 스님은 117일 방영된 불교TV무상사 일요초청법회서 옳고 그름에 얽매이면 있는 그대로를 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정리=윤호섭 기자

 

▲ 법산 스님은…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동대학원 불교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6~2011년 동국대 선학과 교수로 재직, 이후 조계종 고시위원장ㆍ한국선학회장ㆍ동국대 불교대학장 및 불교대학원장ㆍ한국정토학회장ㆍ동국대 5대 및 8대 정각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보조사상연구원장, 인도철학회장, 아태불교문화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대즉곽주법계(大卽廓周法界)
소즉모갈부정(小卽毛竭不停)
번뇌혼지불탁(煩惱混之不濁)
열반징지불청(涅槃澄之不淸)
-달마대사 무심론(無心論) -

이것은 무심(無心)의 노래입니다. 우리가 무심으로 돌아가면 세상을 다 볼 수 있고, 세상과 더불어 살 수 있고,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달마대사께서는 부처님의 무아사상을 잘 공부해서 무심, 즉 걱정 근심 없는 마음이 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걱정이나 근심이 있으면 그것은 무심이 아닙니다.

그 무심의 세계는 크기로는 우주법계를 다 감싸 안을 만큼 크고, 작기로는 터럭 끝에도 머물지 못할 만큼 작습니다. 또한 크고 작음을 떠나 아무리 번뇌망상이 혼탁하게 하려 한다 해도 흐려지지 않고, 열반을 증득해서 맑게 하려 해도 맑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래 그러한 자리가 진실의 자리요, 본래 자성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세상 사람들은 왜 번뇌망상에 놀아나고 열반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느냐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 모두 항상 본래 그 자리를 갖추고 있건만 진실에 급급하다 보니, 대상에 쫓겨 살다 보니 자꾸 끌려 다녀서 자기를 잊어버린 탓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잊어버린 채 끌려가다보니 어디로 빠지겠습니까. 헛된 구렁텅이에 빠지고, 속아 넘어가고. 그래서 사람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 느끼는 오관육식의 장난에 자꾸 놀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진여본무분별(眞如本無分別)
능변유정무정(能辯有情無情)
수지일절불립(收之一切不立)
산지보편함령(散之普遍含靈)
신묘비지소측(神妙非知所測)
정각절어수행(正覺絶於修行)
멸칙불견기회(滅則不見其壞)
생칙불견기성(生則不見其成)
대도적호무상(大道寂號無相)
만상요호무명(萬像窈號無名)
여사운용자재(如斯運用自在)
총시무심지정(總是無心之精) 

진여는 본래 분별이 없으나 유정과 무정을 능히 가려내니 거두어들이려 해도 무엇도 설 자리가 없고 흩으려 해도 모든 중생에게 두루 있습니다. 그 신묘함은 헤아려 알 수 없고 정각에는 수행의 자리도 끊어져 버립니다. 없어져도 그 품은 곳을 볼 수가 없고, 생겨나도 그 이뤄짐을 볼 수가 없습니다. 큰 도는 고요하여 모양이 없고, 삼라만상에 펼쳐진 현상세계는 깊고 그윽해서 이름이 없어, 이와 같이 씀씀이가 마음대로 하니 이것이 바로 무심의 본래 모습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심이 되면 성질낼 게 없습니다. 스트레스 받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앞에 계신 처사님이 저를 살살 약 올린다고 해도 다 알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오히려 그게 귀엽게 보일 수도 있는 거예요. 또 누군가 제게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병 날 이유도 없겠죠.

친한 도반 중에 4~50년간 나이 70이 넘도록 수행했는데 요새 스트레스 받아서 못 살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느냐고 그랬더니 이러쿵저러쿵 한참동안 얘기를 하는 겁니다. 나중에는 그냥 못 들은 척 했습니다. 동풍은 불어 서쪽으로 가고 서풍은 불어 동쪽으로 가는구나 하고 넘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근데 그게 안 된답니다. 그러더니 바람 쐬러 가서 스트레스 날리고 오겠다고 하더군요. 그리 하라고 했지요. 중요한 건 동풍이 불건 서풍이 불건 그 바람에 휩싸이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시사철 통도사에서 밖을 내다보면 꽃은 피는 대로 예쁘고, 녹음(綠陰)은 우거지는 대로 예쁘고, 단풍이 들면 드는 대로 예쁩니다. 겨울이 되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영축산 찬바람이 ~’하고 불어도 좋고, 바람이 그치면 달님이 오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옳고 그름에 자꾸만 얽매이면 있는 그대로를 보기 어렵습니다.

남 탓 말고 나를 보라
물을 먹기 전에 물은 나와 다른 것이지만 먹고 나면 그 물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진리는 본래 자기 것이 없고 자지 것 아닌 것이 없습니다. 흐르는 물을 마시면 내 물이 되는 것이요, 흐르는 물을 보기만 한다면 타물(다른 물건)이 되는 것이라. 마찬가지로 사람도 더불어 살면 한 가족이고, 더불어 살지 못하면 항상 남인 겁니다. 그러니 본래 남이 있는 것이 아니요, 본래 내 것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내 것이 남의 것이고 남의 것이 내 것이다. 제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해서 스님, 남의 것도 내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하면서 남의 것을 아무거나 집어다 쓰면 안 됩니다. 가져갈 것을 가져가고 주는 것을 가져가야지 그렇지 않고 맘대로 가져가면 병이 되는 겁니다. 꽃이 시기에 맞춰 피듯이 모든 일에 때가 있고 이치가 있는 법입니다.

또한 부르는 사람이 있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어야 소리가 나기 마련입니다. 왼손과 오른손이 딱 맞아 하나가 되었을 때 소리가 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에는 왼손의 소리, 오른손의 소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싸움이라는 것도 옳고 그른 것을 시비하려고 할 때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같이 부딪히지 않는다면 싸움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누구하고 싸울 수 있겠습니까. 싸움 잘하는 사람에게 너 혼자 싸워봐라하면 하겠습니까. 무언가 마음에 걸릴 때 그래 알았습니다하고 있으면 되는 겁니다.

근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겠죠. 그러면 또 그런 것은 스님들이나 하지, 일반인들이 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되물을 분들이 많을 겁니다. 정말 천만의 말씀입니다. 안 될 게 없어요. 물론 쉽지는 않겠죠. 되는데 다만 못할 뿐이지 안 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일은요, 다 안 해서 그런 것이지 하려고만 하면 다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돈 없다고 궁상떨지 말고, 기도가 안 된다고 하지 말고, 안 될 때는 될 때까지 계속 해보세요. 관세음보살을 찾아도 좋고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해도 좋습니다. 아니면 지장보살을 찾아도 괜찮습니다. 뭐든지 잡히는 대로 끝까지 한번 해보세요.

어떤 보살님이 제게 그럽디다. 집에 반찬이 없어서 뭐가 걱정이고 어떻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밥만 꼭꼭 씹어 먹어도 밥맛이 참 좋습니다. 입맛이 없어서 밥맛이 없다고 하는 것이지, 입맛이 있는데 밥맛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자기 입맛이 없다는 생각은 안 하고 이거 밥이 맛없네라고 투정 부린다면 그게 바로 남 탓입니다.

무심이 되어서 물을 마실 때는 물과 한마음이 되고, 반찬이나 밥을 먹을 때는 먹는 데 신경을 쓰면 맛이 나기 마련입니다. 걱정하지 말고 무심으로 돌아가십시오. 세상 살기가 좋아지는 겁니다. 그래서 달마대사는 이런 무심송을 남겼습니다.

보려 해도 볼 수가 없고 들으려 해도 소리가 없네. 고요한 마음이여 색깔도 없고 모양도 없구나. 어두운 것 같으나 어둠이 아니요, 밝은 것 같으나 밝은 것이 아니네. 버리려 해도 없앨 것이 없고 가지려 해도 생겨남이 없네.

편견 없애려 수행정진하라
이게 바로 무심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달마대사께서는 세상의 모든 반야 가운데 무심반야가 제일이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쌀을 가지고 다양한 떡을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백설기절편가래떡인절미 등등 여러 가지가 있죠. 똑같은 쌀을 가지고 만들었지만 서로 내는 맛은 다릅니다. 모양솜씨에 따라 다 다른 것이죠. 사람도 본래 한마음인데 그 마음 씀씀이에 따라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무심이라는 것은 오는 것도 아니요, 가는 것도 아니요. 비롯함이 없어서 우주법계 참된 진리가 무심이다고 합니다. 이러한 무심의 세계는 대승보살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등 바라밀을 실천하는 것 말이죠.

얼마 전 겪은 얘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한 신문사에서 요즘 사회적으로 갈등이 심해져 네 편과 내 편을 나눈다. 중도에 대해 대담을 해달라고 요청이 왔습니다. 그래서 조계사에 가서 사진을 찍고 대담을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통도사에 돌아왔더니 다른 분들이 저보고 왜 그런 곳에 가서 데모를 하느냐고 묻더군요. 무슨 얘기인가 생각해보니 당시 민주노총위원장이 조계사에 머물 때였습니다. 아마도 제 모습이 TV카메라에 잡혔나 봅니다. 전 무심으로 갔을 뿐이지만 그걸 보는 사람 입장에 따라서 해석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절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 위원장을 두둔하러 갔다거나 끌어내리려 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삼각산을 오르는데 우이동쪽에서 오르는 사람이 있고, 의정부쪽에서 오르는 삶도 있고, 평창동 쪽에서 오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산꼭대기에 올라서면 똑같이 하나지만 오르는 길과 과정에 따라 자기 기회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눈은 다 다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오직 부처님의 수행밖엔 없습니다. 열심히 하면 그 생각을 지울 수 있고, 그래야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 지혜롭지 못하다 하는 것은 전부 익혀진 하나의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처님의 근본 진실은 실상입니다. 실상은 곧 참된 모습이고요. 참된 모습에는 때가 껴있지 않습니다.

산에 있는 꽃을 한번 보세요. 있는 그대로 말입니다. 참 맑습니다. 그런데 보는 사람에 따라 꽃의 느낌이 다릅니다. 사람은 근심걱정이 있을 때 꽃이 얼마나 예쁘고 좋은 향기를 내든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근심걱정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사실 잘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심은 망상심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옆 사람이 아프고, 사고가 나서 죽든지 말든지 상관 안 한다는 자세는 무심이 아닙니다.

물은 흐를수록 맑아지고 바람은 불수록 깨끗해집니다. 우리는 염불이라는, 참선이라는 수행을 통해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심과 걱정은 자꾸 수행하면 지워집니다.

여러분, 차가 막히면 막히는 대로 가야합니다. 아무리 빵빵거려봐야 자기 성질만 더러워지는 것이지 내 삶에 보탬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느긋하게 사십시오. 부처님이 설하신 진리를 잘 따르고, 무심으로 돌아가 참으로 도움이 되는 공부해서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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