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밝혀지면 돌아가신 부모의 마음도 밝혀진다!

이 촛불 하나가 얼마만큼 귀중한지 여려분은 아셔야 됩니다.
근본의 내가 탄생한 자리요, 나를 형성시킨 자리요,
또 우리 부모들을 형성시키는 그 에너지가 배출되는 장소입니다.

왜 삼독마저 둘로 보지 말라는지?
질문 탐진치 삼독을 끊고 소멸시켜야 내가 청정해지고 부처가 된다고 알고 있는데, 왜 스님께서는 탐진치 삼독마저도 둘로 보지 말라고 하시는지 그것을 여쭙고 싶습니다.

답변 옛날에 어떤 어른이 “쓰레기통이 돼 봐야 쓰레기의 이치를 아느니라. 금은보화 담은 창고가 되지 말고 쓰레기통이 돼라.” 하셨는데, 예전 일입니다만 왜 그런 소릴 했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까 쓰레기통에는 별의별 게 다 담깁니다. 그리고 쓰레기통이라는 건 고귀한 데 있는 게 아니라 바깥에 아주 그냥 팽개쳐져 있죠. 그 쓰레기통 노릇 하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도 쓰레기통이 되지 않는다면 자식을 올바르게 키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거든지 쓰레기 같은 것은 자기가 갖고 좋은 것은 자식을 주려고 하는 부모의 심정은 부처님의 심정과 같은 것입니다. 죽는 것마저도 그렇죠. 자세히 말을 하자면 부모의 마음이 죽는 것도 대신할 수 있을 만큼 돼 있죠. 사는 것도 그저 고생 없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죠. 그 부모의 소망이 작고 클 뿐이지 그 마음은 똑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생자부(四生慈父)로서, 알로 낳고 태로 낳고 습한 데서 낳고 화(化)해서 낳고 하는 그 사생들이 전부, 자기 몸 아님이 없고 자기 아픔 아님이 없고, 한 도량에 있지 않음이 하나도 없고, 죽고 사는 것도 자기 아니 됨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한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들 생각하는 것과 부처님이 사생자부로서 생각하는 바가 크고 작을 뿐입니다. 우물물과 바닷물이 크기만 다를 뿐 물은 같듯이.

우리가 생활할 때 항상 주인공, 나의 불성 뿌리에다가 모든 거를 놓으라고 하죠. 좋은 것은 감사하게 놓고, 언짢은 거는 언짢지 않게 하는 것도 너라고 놓고, 그렇게 오신통을 잘 굴리라고 했습니다. 오신통은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는 겁니다. 보는 거, 듣는 거, 말하는 거, 가고 오는 거, 또 내가 어디서 나온 걸 아는 거 말입니다. 또 상대성을 알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섯 가지의 문제를 볼 때에 거기서 나오는 모두를 거기다 놓되, 두 가지 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하게 놓고, 하나는 구정물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거기서 맑은 물로 대치할 수가 있다는 믿음으로 놓으라는 얘기죠.

나는 이렇게 곧바로 여러분한테 얘기합니다만 수많은 조사들이나 수많은 스님네들은 “탐진치(貪瞋癡)에 구르면 삼독(三毒)에 빠진다. 삼독에 빠지면 헤어날 길이 없다.”라고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내 말은 그것을 넘어선 얘깁니다. 고(苦)·집(集)·멸(滅)·도(道), 이런다면은 탐진치가 있기 때문에 고가 있는 것입니다. 집착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기다가 감사하게 놓고, 굴려서 놓고, 다 놓는다면 ‘멸’이 됩니다, ‘멸!’ 일체, 일거수일투족이 다 ‘멸’이 됩니다. 그래서 삥삥 돌리지 않고 직선적으로 얘기해 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실천을 하시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다 놓게 되면 ‘멸’이 되는 이치에서, 자꾸 멸해 들어가면은 ‘도’다 이겁니다. ‘멸, 도’ 아닙니까? ‘멸’ 하면 ‘도’다 이거예요.

이 ‘멸’이라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실생활 속에서 감사하게 놓고,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거기서 해결해야 된다는 것을 믿고 거기다 놓을 때에 바로 멸함이 생기면 도가 있고, 도심이 생기면 바로 우리가 넓게 볼 줄 알게 되고, 넓게 들을 줄 알게 되고, 넓게 말하게 되고, 지혜롭게 말입니다. 그러니까 둥글게 나온다는 얘기죠. 둥글게 나오고, 그 둥글게 나오는 반면에 우리는 ‘아, 이거 둘이 아닌 까닭에 이렇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고요.

또 우리가 그것을 잘 굴릴 수 있게끔 될 때에 비로소 웃물이나 바닷물이나 똥물이나 핏물이나 흙물이나, 어디에든 젖는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 물 저 물 따지지 않고 젖는 거. 젖는 이치! 어디든지 다 젖는다. 어떠한 물에도, 똥물에도 젖는 것은 마찬가집니다. 이 방편의 말을 안 하면 그 이치를 모르겠기에 방편으로 말을 하는 겁니다. 젖는 이치만 안다면, 여러분이 주인공의 그 뿌리에 모든 것을 놓는다면 하나에 젖을 뿐이지 이것저것 가리는 게 없다. 가리는 게 없는 반면에 젖는 걸 알고, 젖는 걸 아는 반면에 그 젖는 거마저도 공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것은 최상승의 얘깁니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해 나가는 게 뭡니까. 우리가 이득이 없다면 할 것도 없지요. 할 것도 없다는 걸 아는 그 사람이 바로 이득이 충분하고 남과 나에게 다 이득이 충분한 사람입니다. ‘할 것이 없다’ 할 때까지…. 우리가 고정됨이 없이 찰나찰나 화해서 찰나찰나 나투면서 끝없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잘 아시죠? 그거를 아신다면 젖는 도리마저도 공했다는 얘깁니다.

이 세상의 이치가 그렇게 천차만별의 굴림이 있겠지만 단 한 군데서만이 굴릴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단 한 군데서만이 전체가 통할 수 있다는 사실! 그 한 군데서만이 상대하고 나하고 통할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 한 군데서만이 나투어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든 산 사람의 영혼이든 찰나찰나 만날 수 있다는 얘기죠. 살았어도 영혼이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거고 죽었어도 영혼이 있기 때문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얘기죠.

그래서 쓰레기통이 되는 것도, 어떠한 거든지 막론해 놓고 그게 아주 중요합니다. 불로 가고, 물로 가고, 또 흙으로 가고, 바람으로 가고, 그렇게 정리를 잘해서 다시금 이 세상에 조립을 해서 내놓을 때 쓸모 있는 기계로 내놓을 수 있게끔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재생이죠. 그런데 재생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게 뭐냐 하면 끝없이 돌아가면서 그렇게 진화돼서 형성되고, 형성되면서 또 진화돼서 흩어졌다 모였다 흩어졌다 모였다 하는 과정이 끝이 없으니까요. 다함없이 했다고 하더라도 한 게 없어요. 그러나 다함없는 그 속에서, 끝없는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되는지, 그건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집착과 마음 내는 것에 대해서
질문 저희가 생활하는 과정에서는 믿고 맡기면서 이렇게 지내야 한다고 합니다마는 생활하는 과정에서 늘 어떤 대상, 인물이든지 사물이든지, 어떤 현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하고 마음을 내야만 성사가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분들이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착이라는 것과 다소 혼동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맡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더더욱 잘 알고 있습니다마는 가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답변 글쎄, 자식들 때문에 안달을 하든 또는 사업 때문에 안달을 하든, 둑이 무너져서 안달을 하든 그걸 자기가 왜 걱정을 해요? 그렇게 안달하고 사는 것이 바로 주인공 놈이 하는 거라니까요. 어때요? 누가 그렇게 하지 말라는 사람이 있었나요, 그렇게 하라는 사람이 었었나요? 닥치면 닥치는 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거는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이 주인공을 믿고 하는 사람들은 열 번 뛸 거 한 서너 번밖에 안 뛰거든요. 그렇게 뛰면서, 하는 것을 그대로 주인공이 하는 거야. 왜 자기가 괜히 끼어들어서 ‘나는 이렇게 뛰고 이러는데….’ 주인공 따로 또 두고. 그럼 자기 따로 있고 주인공 따로 있는 게 되잖아. ‘자기가 하는 거 그대로 습이 돼서 이렇게 뛰는구나! 이거 주인공한테 다 놓지 않고 이렇게 뛰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냥 하고 있고 뛰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그냥 주인공이 하는 거야. 이해가 안 가요? 그냥 애들을 위해서 걱정하는 것도, 또 사업을 위해서 뛰는 것도 그대로, 그대로 하는 것이 주인공 놈이 하는 거라니까요.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주인공 놈이 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서 채찍으로 채찍질을 하기 위해서 ‘주인공, 이렇게 지금 하고 가는 일, 너만이 해결할 수 있고 잘 이끌어 갈 수 있잖아!’ 하고 거기다가 되놓는 것은 자기더러 자기가 하는 소리예요. 그런데 현재 자기를 주인공하고 둘로 보질 말아요. 둘로 본다면 ‘나는 이렇게 뛰는데…. 주인공한테 이렇게 맡기지 않고 나는 뛰는데….’ 이렇게 생각이 들거든요. 주인공이 그렇게 뛰고 지금 가고 있잖아! 몸뚱이는 주인공 시자니까. 마음의 시자거든요. 그러니까 마음과 몸뚱이와 생명이 셋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주인공이라고 했으니까 합쳐서 주인공이야. 주인공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다고 해서 나는 착이 있고 이렇게 놓지를 못하고 뛴다고 생각질 말고 그대로 주인공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거를 그냥 시인하고 넘어가라 이 소리예요. 그러면 아무 걱정이 없잖아요. 둘로 볼 것도 없고 말입니다.

백팔염주의 뜻이 무엇인지요?
질문 보통 불자들이나 스님들께서 목에다가 염주를 걸고 다니시지 않습니까? 그 염주알이 108개라고 하는데 그 뜻은 무엇입니까?

답변 백이라는 것은 이 큰 우주를 비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팔 개라는 거는 사무 사유의 즉,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이 모두를 말하고요. 이 세상 팔도라고 비유를 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무 사유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데의 반, 보이는 데 반입니다. 죽는 거 반 사는 거 반. 그럼 이렇게 따집시다. 죽은 사람이 반이라면 사는 사람이 반. 보이지 않는 데의 영령들이 반이라면 산 사람들이 반. 즉 말하자면 어느 사람이든지 정신계의 내 생명의 근본이 있다면 바로 육신 이 자체가 있습니다.그와 같습니다, 반반이.

그러니까 백팔염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돌리면서 염(念)하라고 한 겁니다, 그게. 백팔번뇌라고 하죠? 이 번뇌, 사람이 그렇게 죽고 살고 하면서, 돌아가면서 살려면 얼마나 많은 번뇌가 일어나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게 애고가 오고, 죽음이 오고, 아픔이 오고, 슬픔이 오고, 정말 여러 가지가 오니까 그게 찰나찰나 일어나지 않습니까, 속상하고 그러는 것도. 어떤 거든지 일어나는 그 자체를 두고 또 백팔번뇌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번뇌, 이 망상 자체를 없애기 위해서 탐진치, 즉 이 삼독을 다 놓고 버려라. 놓고 돌려라. 이 지구 자체, 이 우주 전체 삼천대천세계 전체가 염주알 돌아가듯 하느니라. 빈틈이 없죠, 염주알 자체는요. 그래서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그 표현, 표시입니다, 그게.

경을 읽고 절을 하는 의미
질문 『금강경』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이 경의 수승한 공덕이 칠보로 수미산을 장식한 것보다 크다.” 하고, “이 경의 사구게(四句偈) 하나만 일념으로 염송해도 윤회에서 벗어난다.” 했습니다. 말하자면 염불문을 세우는 것이겠죠. 또, 다른 절에서는 백팔배, 삼천배를 시키면서 말하기를 “예불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배를 빌려 타고 저 언덕에 이르는 길이라.” 했습니다. 제 손으로 배를 만들기가 힘들어 아미타불 등 부처님과 제불 보살님의 배를 빌려 타고 싶은 게 중생심인데, 이런 경우에 타력에 의지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요?

답변 그 말을 나무로 비유하겠습니다. 나무 한 그루에 잎새가 헤아릴 수 없죠? 나무뿌리는 하나인데 가지들은 많고 그 잎새는 더 말할 거 없이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경을 읽는다 하면 잎새를 세는 거와 같고, 또 백팔배를 한다면 바로 나무를 만져 주는 거와 같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나무와 가지와 잎새가 있는 것을 가르쳐 주면 거기에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수 있으니까 그것을 그렇게 일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잎새를 아무리 세어도 센 사이가 없을 테고, 가지를 아무리 더듬어 줘도 더듬어 준 사이가 없을 겁니다. 공덕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기 이전에 역대 부처님과 조사들이 다 가르치시길 “얘야! 나뭇가지도 아니고 잎새도 아니니라. 뿌리에다 돌리거라. 마음을 일심으로 뿌리에 두어라. 가을이 되면 떨어지고, 봄이 되면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그 과정은 뿌리로부터이니라. 그러니 들이고 내는 모든 것은 뿌리에서 들이고 내는 것이니라. 뿌리가 없다면 나무는 모두 죽어 버리고 만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나무에 비유한다면, 무엇이든 뿌리에 마음을 두는 것은 바로 뿌리에 물을 촉촉하게 주는 거와 같다 이겁니다. 그러면 가지를 쓰다듬지 않아도, 이파리를 세지 않아도 그 나무는 아주 싱싱하고 푸르르게 자랄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께서 나무 잎새나 나뭇가지나, 나무 둥치나 이런 걸 무시한 게 아닙니다. ‘뿌리부터 알고 뿌리에서 나온 거라는 거를 알아라. 그럼으로써 경을 읽되, 경이 나를 보지 않고 내가 경을 보지 않는 이치가 나오느니라. 절을 하되 절을 하는 사이가 없이 할 수 있느니라. 또 경을 보되 귀로 보고 모든 만물 만생의 소리를 듣되 바로 눈으로 듣는다. 그 도리를 알게 되면 눈으로 듣는다는 것도 없고 또 귀로 본다는 것도 없이, 바로 하나가 불끈, 하늘을 끼고 돌아가느니라.’ 이런 뜻에 속합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마음이, 그 속에 수십억의 의식을 두고, 생명을 두고, 모습을 두고 있는 이 몸이 그 나무와 같이 아주 크다면…. 나무라는 것은 나무로 볼 수도 있지만 나무는 아주 크다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수없이 거듭거듭 태어나고 멸하고 이러는데 사람만이 이런 고초를 겪고 이런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과 행복이 엇갈린 세상 속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겁니다. 행복도 아니요 고통도 아닌 그 작용 속에서 바로 한생각 일어나는 것이 법이 돼야 된다는 얘깁니다. 한데로 떨어지지 않는 말씀이 법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쥘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으면서, 대천세계 모두 돌아가게 하는 이 하나의 마음을 탁 포착하는 그런 계기가 돼라, 이런 얘깁니다. 안에도 없고 바깥에도 없고, 이것도 아니고 그것도 아닌, 그러면서도 역력하게 여러분을 끌고 가는 그, 마음 내기 이전 불성 말입니다.

그거를 일러 드리기 위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누가 들이고 내느냐. 마음이 들이고 내는 거다. 그 마음이 이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끌고 가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렇게 끌고 가니, 그 양면을 다 작용하면서 끌고 가는 것이다. 그러니 조심해서 선(善)의 공덕 길로 끌어들여라.” 하고요. 이 세상에는 악도 있고 선도 있습니다. 그건 왜냐. 천차만별로 돌아가는 모든 물질, 개성, 마음들이 전부 우리가 있기 이전에도, 지수화풍이 있기 이전에도 개별적으로 자기 개성을 톡톡히 두고 돌아갔던 시절이 있었겠죠. 개별적으로 그렇게 돌아가는 개성이 한데 합쳐서 지수화풍을 이루었고, 지수화풍을 이루었기 때문에 바로 광력이나 전력이나 자력 통신력이 이루어진 반면에 인간, 이 생물이 생겼다고 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근본에다 들여서 내는 이 공부를 진실하게 실천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촛불재의 깊은 뜻을 알고 싶어요
질문 저의 모친은 자주 “왜 그렇게 보이지 않는 세계에 정성을 쏟느냐?” 하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신년이 되어서 친구 분의 권유로 용하다는 분한테 신년 운세를 보러 갔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당신 자손이 얼마나 정성스럽게 했는지 조상님들이 다들 고마워하신다 하더라고 하시면서 “해년마다 촛불재를 하고 등을 달아 드리는 것이 그냥이 아닌가 보다.” 하시더군요. 제가 선원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습관처럼 해 왔던 일들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정말 전달이 된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더군요. 그래서 이번 촛불재는 더욱더 마음을 다해 올리고 싶어 촛불재의 깊은 뜻에 대해 다시 한 말씀 청합니다.

답변 우리가 왜 촛불재를 그렇게 하느냐. 왜 그렇게 귀중하게 해야 되느냐. 이 마음의 촛불재를 하는 것은 방편으로서 마음과 더불어 자신, 즉 ‘자(自)’는 이 몸이 되고 ‘신(神)’은 자기 불성(佛性)이 되는 겁니다. 이게 자·신이 다 둘 아니듯이 촛불재를 하는 것도 마음에 없으면 그 촛불을 들 수가 없습니다. 들질 않게 되죠. 마음에 있으니깐 촛불재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과 다 가설이 돼 있다고 항상 얘기하죠. 한 가정에 내 자식이다 내 부모다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다 가설이 된 겁니다, 그게. 모르는 사람은 전체가 가설이 돼 있다는 것도 모르니 한 가정이라도 그것을 알아야 전체가 다 가설이 돼 있다는 거를 알고 넓고 지혜롭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이 밝혀지면은 그 돌아가신 부모의 마음도 밝혀진다는 얘깁니다. 자식을 둔 사람들은 또 자식이라는 가설이 돼 있습니다, 부모라는 가설이 돼 있고. 그것이 자연의 마음의 가설입니다, 우리가 전기 가설을 하지 않으면 불이 안 들어오듯이 우리가 스스로 자식이다 부모다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설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형제간에도 가설이 돼 있는데 형제간에는 부모와 자식보다는 좀 덜하다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덜 가는 겁니다. 친척도 ‘손바닥 다르고 손등 다르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촛불 하나 켜는 데 돌아가신 부모의 마음만 밝아질 뿐 아니라 자기 마음도 밝아져서 양면을 다 밝아지게 할 수 있는 촛불입니다. 더군다나 조상님들도 지금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에 그 모습을 쓰고 나온단 말입니다. 그럼 그 모습 쓰고 나온 대로 대접을 받게 돼 있거든. 여러분이 생각들을 잘해 보십시오. 항상 내가 얘기하죠. 개로 태어난다면 개 대접밖에 못 받고 짐승으로 태어난다면 짐승 대접밖엔 못 받는다. 돼지로 태어난다면 돼지 대접을 받을 거고 닭으로 태어난다면 닭 대접밖에 못 받는다. 사람으로 태어나도 천하게 태어나면 천한 대접밖에 못 받는다. 이런 것이 바로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종자는 한 종자입니다. 참외씨를 심어서 씨를 받아서 또 참외씨를 심으니까 그 참외씨 그대로 나오더라는 얘기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격으로요. 그러니까 자기 씨를 심어서 싹이 난 거니까 그 종자를 또 열리게 할 수밖엔 없죠. 그러니까 이 촛불 하나가 얼마만큼 귀중한지 여러분은 아셔야 됩니다. 근본의 내가 탄생한 자리요, 나를 형성시킨 자리요, 또 우리 부모들을 형성시키는 그 에너지가 배출되는 장소입니다.

또 아래로는 자녀들이 말입니다, 나가서 외박을 하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외박을 해도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고 천차만별로 그렇게 부모들의 마음을 썩이고, 손가락질을 받고, 교도소에 가고, 부모를 죽이고, 형제를 고발하고 부모를 고발하고, 지금은 이러는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그 촛불 하나가 그렇게 귀중하다는 얘깁니다. 촛불 하나가 그것을 다 대치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빛보다 더 빠른 것이 마음의 능력입니다. 한생각에 찰나에 위성에도 가고, 우주에도 가고, 미국에도 가고, 문지방 너머도 가고, 문지방 너머나 우주나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빛보다 더 빠를 뿐만 아니라 빛은 가다가도 중단이 되지만 이것은 물속이든지 흙 속이든지 어디든지 높고 낮음이 없이, 가고 옴이 없이 오고 갈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 촛불 하나를 진짜로 생각한다면, 여러분이 진짜로 믿고, 아주 가긍하게 실천을 하기 위해서 진짜로 믿고 하나를 들고 그렇게 위아래를 껴잡아서, 둥글게 껴잡아서 자기와 더불어 같이 한방에서 밝게 된다면 벌써 차원이 달라져요. 그래서 나가서 그런 어지러운 일들을 저지르지 않게 돼요. 이런 얘기를 듣고 무시하면 무시한 대로 자기네들이 무시를 받게 되는 거니까 뭐 나는 하등 상관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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