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교육아사리 원영 스님

중국서 알게 된 티베트 여학생
몸에 밴 소박한 습관에 감동
어떻게 의식하고 사는지가 중요
지계·보시 실천하는 불자 되길

계율은 불자로서 지켜야할 기본적인 규범이다. 계는 깨끗하고 착한 습관을 익혀 지키기를 맹세하는 결의를, 율은 교단의 규칙을 뜻한다. 하지만 불교가 탄생하고 2500여 년이 흐른 지금, 현대사회에의 적용을 두고 이견이 적잖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계율을 지켜야 할까? 조계종 교육아사리 원영 스님은 124일 서울 불광사 일요법회에서 계율은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선한 습관 길들이기’’라는 주제로 법문했다. 스님은 새해를 맞아 하는 다짐도 하나의 계가 된다며 생활 속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리=윤호섭 기자

▲ 원영 스님은… 운문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하나노조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계종 교육아사리로 중앙승가대와 동국대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현재 BBS불교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인 ‘좋은 아침 원영입니다’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부처님과 제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대승계의 세계〉 〈계율 꽃과 가시〉 〈인생아, 웃어라〉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인 것들〉 등이 있다.
제가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2008년 중국 베이징에서 지낼 때의 일입니다. 그때 만난 친구 얘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당시 저는 티베트어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공부를 도와준 친구가 대학 4학년 여학생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티베트 라싸에서 베이징으로 유학을 와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학습공간을 찾기가 어려워 그 친구와 함께 주로 빵집에서 공부를 했는데요. 이상하게 주변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더군요. 그리고 어딜 가든지 누군가가 자꾸 쳐다본다는 기분도 들었고요. 그래서 친구에게 얘기했더니 자신이 라싸에서 온 학생이기 때문에 공안 감시가 붙어있어서 그렇답니다.

어느 날은 빵집에서 빵을 주문했는데 친구가 먹지 않더군요. 평소 빵을 정말 좋아하는 친구였는데 손도 대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왜 안 먹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처음에는 체한 것 같다” “속이 안 좋다고 둘러대더니 사연을 털어놓았어요.

친구에 따르면 라싸에서 베이징으로 1년에 2명씩 학교 선발을 거쳐 유학을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외에 다른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가 베이징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어 대학을 다니고, 라싸에 있는 집에 돈을 부쳐주면 가족이 그 돈으로 생활한다고 말이죠. 근데 그 친구가 아프답니다. 병원에 있대요. 그래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니 암에 걸렸답니다. 거의 말기쯤 돼서 이제는 가망이 없대요. 심지어 부모님에게 말도 못했답니다. 그리고 아픈 친구가 자기 가족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다더군요. 라싸에 계시는 부모님이 정말 먹고 살기 힘든데 자기 때문에 걱정하고, 죽어가는 자식을 도와줄 수 없는 마음을 어떻게 하겠느냐면서요. 그러면서 나중에 죽으면 가족들에게 사고를 당했다고 전해달라고 부탁했답니다. 어차피 수술비나 병원비도 없고 회복될 가망조차 없다면서요.

그래서 제 공부를 도와주는 친구가 아픈 친구와 빵을 먹고 나눠먹고 싶어서 안 먹는다고 하더군요. 제가 더 사줄 테니 먹으라고 했는데도 그건 싫답니다. 자기 앞에 주어진 것을 나눠주고 싶다는 거예요. 결국 공부를 마치고 헤어질 때 그 빵을 싸서 돌아가는데 그 모습에 마음이 굉장히 뭉클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 기숙사에 가려고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친구와 학교 입구에 들어서는데 경비아저씨가 어디 가느냐며 막아서더군요. 그래서 기숙사 간다고 얘기를 하고 다른 건물을 지나가는데 다른 경비가 잡아 세웠습니다. 또 같은 설명을 하고 기숙사에 들어가는데 현관에서 또 막혔습니다. 그쯤 되니까 뿔이 나더군요. 근데 그 친구는 4년 동안 제가 겪었던 일을 매일같이 겪었던 겁니다. 그래서 학교의 모든 학생이 자기가 라싸에서 왔다는 걸 안다고 하더군요.

우여곡절 끝에 기숙사에 들어갔습니다. 어느 방문이 열려 있어서 안을 슬쩍 보니 21실이더군요. 그렇게 복도 끝까지 걷자 제 친구의 방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방 모양새는 여지없는 창고였습니다. 정말 청소도구를 넣어놓을 법한 느낌이었죠. 근데 그런 방에 4명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소수민족 출신끼리 말이죠. 2층 침대 사이로는 한 사람밖에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았습니다.

먹먹한 마음을 안고 들어갔는데 침대 옆 벽에 하얀 천이 하나 붙어있었습니다. 친구에게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당황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군요. 그래서 방문을 닫고 얘기하자고 했는데 이 방은 잠자는 시간 외에는 문을 닫을 수 없다는 겁니다. 감시 때문인 거죠. 눈치를 보다가 다른 한 명이 망을 보고 친구가 벽에 붙은 천을 걷었습니다. 천을 걷자 라싸에 있는 달라이라마 궁전인 포탈라궁 사진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친구는 이내 티베트 민요를 불렀습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굉장히 구슬펐고, 함께 있던 다른 친구들도 눈물을 흘렸죠. 그러면서 침대 밑 조그만 서랍에서 손가락 두세 마디 크기밖에 안 되는 달라이라마 사진을 꺼냈습니다. 그때 제 마음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싶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런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얘기를 마치고 제가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밥을 해주고 싶어 친구를 초대했습니다. 된장찌개를 끓여 함께 먹었는데요. 제가 뒷정리를 하고 있을 때 그 친구가 설거지를 시작하더군요. 그런데 놀라운 건 설거지를 물 두 바가지만으로 끝낸 것이었습니다. 청결하지 않다는 느낌도 들었고, 물도 잘 나오는 곳이었기에 굳이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물이 부족하다고. 라싸에는 물이 부족하고, 지구 어딘가도 물이 부족한 곳이 많다고 말이죠. 이곳은 물이 콸콸 잘 나와도 우리가 모르는 지구촌 어딘가는 물이 부족해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제가 티베트 여학생 이야기를 들려드린 이유는 제 전공이 계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일상생활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물을 쓰면서 다른 이들의 물 부족을 걱정하진 않죠. 저도 그 친구를 만난 이후로 많이 바뀌었는데 그게 바로 계율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좋은 습관을 갖는 것이 계율이거든요.

보통 계와 율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지만 둘은 조금 다릅니다. 계는 사람들이 스스로 지켜야 하는 좋은 생활습관, 예를 들면 새해를 맞아 술담배를 끊겠다든지 매일 108배를 하겠다든지와 같은 결심입니다. 어떻게 생활하겠다고 결심하고, 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죠. 반면 율은 스님들이 주로 지키는 것입니다. 강제성이 있고 승가가 모여 살면서 어겼을 때 벌칙이 부여되는 것이죠.

생활에서 물을 아끼는 것과 같이 우리가 일상생활을 어떻게 의식하고 살아가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라싸에서 온 친구도 험한 인생을 살았을 테고, 저도 살면서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쳤죠. 또 누구나 살다보면 여러 시련이 있게 마련이고요. 그런데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시련이 있기 때문에 진솔한지 아닌지, 최선을 다했는지 아닌지 마음가짐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계율뿐만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이 조금 어렵게 의미전달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 한 친구가 불교를 알고 싶은데 어떤 책을 보면 좋겠느냐고 물어서 교리에 관한 책을 권했습니다. 그랬더니 도저히 어려워서 못 읽겠다더군요. 그런데 미국에서 나온 영어로 된 불교개론서를 읽었을 때 굉장히 이해하기 쉬웠답니다. 그래서 저는 보편적인 언어를 써서 의미를 전달하는 게 불교를 알림에 있어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의 계율을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표현보다 조금 더 생활에 와 닿게 할 순 없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습관은 이런 겁니다. 하나, 계속 해보는 것이 부끄러움을 없애는 것입니다. , 귀로 들으면 의심스럽지만 마음으로 들으면 진실합니다. ,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듯이 좋은 이별도 노력해야 합니다. , 타인의 기억은 인생을 복습할 기회입니다. 다섯, 남의 말보다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섯, 나보다 잘나가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세요. 일곱, 상처받은 나는 과거에 두고 오세요. 여덟, 서둔다고 빨리 배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홉, 사랑을 알면 인생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자비심과 사랑, 지계라고 하는 것들은 전부 따뜻한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계율을 지킬 수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흥청망청 살면 되거든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 삶을 절제하고 성실하게 살기 위한 것이잖아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하셨을 얘기일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지계와 보시를 행하면 생천(生天), 즉 하늘에 난다고 하셨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여인이 살짝 굳은 죽을 어렵게 구해서 먹으려고 하는데 가섭존자를 보고 손가락으로 죽을 저어 공양 올리려 했습니다. 그때 그녀의 손가락이 잘려 죽에 빠졌죠. 그럼에도 가섭존자는 그녀의 손가락만 건져내고 죽을 다 먹었습니다. 여인은 가섭존자의 그 모습을 보고 감격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여인은 죽었고, 천상에 났습니다. 가섭존자에게 올린 죽 한 그릇의 공양 때문이었죠. 주는 이의 마음과 받는 이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제 저서에 썼던 내용 일부를 전해드리며 법문을 마치고자 합니다.

지금이라도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가다 이따금씩 말에서 내립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타고 갑니다. 누군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한 인디언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혹시 내가 너무 빨리 달려서 나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했을까봐 잠시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수행자로 살면서도 가끔은 나의 영혼을 깜빡 잊을 때가 있습니다. 좋은 것에 마음이 혹하기도 하고 때때로 되지 않는 일에 화내기도 하고, 별일 아닌 일에 상처받아 아파하기도 하고 오지 않은 내일을 걱정하기도 합니다. 마음의 중심을 잃고 흔들릴 때가 영혼을 잃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참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버스정류장의 긴 행렬과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 그리고 지하철 입구에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아침에 방송하러 가는 길의 풍경입니다. 볼 때마다 사람들은 참 부지런하구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한번은 깊은 산속 암자에 갔다가 소원지들이 곳곳에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이 외딴곳까지 달려온 사람들의 성실함과 정성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들인데도 자주 후회하고 지난 시간을 아쉬워하고 자책합니다. 왜 그럴까요. 혹 우리의 영혼을 잃어버리고 달려왔기 때문은 아닐까요. 삶에 대한 깨달음은 언제나 지나고 난 뒤의 일입니다. 마치 꽃이 지고 난 다음 씨앗이 맺히듯이 말입니다. 씨앗이 이듬해 싹을 틔우듯 오늘 우리의 후회와 깨달음 또한 내일을 위해 쓰여야 합니다. 아쉬움으로만 남겨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을 배운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슬픔 속에서 위로를 배우고 강인함 속에서 부드러움을 배우며 나약함 속에서 용기를 배웁니다. 자신감 속에서 겸손을 배우고 외로움 속에서 자유를 배웁니다.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삶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배우고 익히며 조금씩 나아갑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 지금이라도 알아서 참 다행이야.

옛말에 오동나무는 천년이 지나도 자신의 소리를 잃지 않고,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동천년로항장곡 매일생한불매향)]’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불자로서 살아가는데 그 마음 변치 마시고 오래오래 불교를 향한 믿음 가지고 신행생활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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