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낙전당 신익성
14. 낙전당 신익성
  •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6.01.22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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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과 교유하며 불교사상 깊이 천착

 

   
▲ 도판 전서의 대가 신익성의 글씨.
산인 수능이 동회로 나를 찾아왔는데 수능 승려의 행동거지가 평범하지 않았다. (내가) 글을 하는지를 물으니 (수능은) 능하지 않다고 하면서 일부 책을 내놓으면서 나에게 억지로 제()를 지어달라고 청했다. 글이 다 지어지면 잠시 보관해 두기를 바란다 하며 홀연히 돌아갔다. 내가 그 책을 펴 보니 화엄의 중요한 말을 가려 뽑아 책을 만들어 <예참>이라 이름 하였는데 그 법도가 바르고 자상하고 치밀하다. 말이 모나지 않고 부드러워 저술하는데 노련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나머지 지은 것을 보니 삼교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고금을 살폈으며 (원리를)누르고 드러내며 빛내고 사라지게 하며 바람을 일으키고 벼락을 치게 하였으니 나는 이에서 수능을 알게 되었는데 과연 보통 사람이 아니다.[山人守能訪余於淮上, 一衲一錫, 動止不凡, 問能文字乎, 曰不能, 已進一部書, 請余勒題, 題罷願姑置之, 遂忽辭歸, 余發其書見之摭華嚴要語爲一書, 名之以禮懺, 其規矩繩墨, 縝密圓轉, 非老於結撰者, 不能爲也, 且觀其所爲緖餘者, 把弄三敎, 睥睨古今, 抑揚揮霍, 風發霆擊, 余於是知能也, 果非凡品] 내가 평소 산인납자와 교유하기를 좋아하여 산인납자들을 차츰차츰 알게 되었고 또한 문득 와서 섞여 놀았다. 세상에서 수행이 깊고 이름난 승려라고 칭하는 의형, 법견, 성정, 응양, 해안, 각성, 언기가 모두 나와 평소 교유했으나 물론 그들은 입적하여 세상엔 말만 남았다.[余平生喜與山人衲子游 山人衲子稍有知識 亦輒來參 世所稱老宿名師義瑩 法堅 性淨 應祥 海眼 覺性 彥機皆余所素雅也 無論其歸寂 以在世者言之] 응상은 덕이 있는 그릇이었고 해안은 재주와 식견이 있었고 각성은 경계하여 깨쳤으며 언기는 고상하고 지조가 있었으니 모두 그 명성을 저버리지 않았다. 성정 같은 스님은 선문의 고도로 다만 이름을 부르는 데만 그칠 명성은 아니다.[祥之德器 眼之才識 性之警發 機之雅操 皆不負其名 若淨師禪門之高蹈 不止名可名而已] 그러므로 혹 계율을 삼가며 혹 스승의 말을 전한 것이라면 삼교를 마음대로 가지고 논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리를)누르고 드러내며 빛내고 사라지게 한 것은 수능 같은 사람이다.[然或謹於戒律 或傳其師說 未有把弄三敎 抑揚揮霍如能也者]

이 글은 그가 동회(東淮)에 머물 때 쓴 글이다. 그와 교유했던 수능 스님이 화엄경의 중요한 부분을 뽑아 <예참>이란 책을 편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낙전당은 당대의 명승(名僧)이었던 의형, 법견, 성정, 응양, 해안, 각성, 언기 같은 고승들과 교유했으며 그가 <예참>의 서문을 쓸 당시에는 고승들이 모두 입적했다. 그는 자신이 교유했던 고승들의 품성을 일일이 거론하여 응상은 덕이 있는 그릇이었고 해안은 재주와 식견이 있었고 각성은 경계하여 깨쳤으며 언기는 고상하고 지조가 있었으니 모두 그 명성을 저버리지 않았다. 성정 같은 스님은 선문의 고도로 다만 이름을 부르는 데만 그칠 명성은 아니다[祥之德器, 眼之才識, 性之警發, 機之雅操, 皆不負其名, 若淨師禪門之高蹈, 不止名可名而已]”라고 한 대목이 눈에 띤다. 아울러 이 글의 말미에 나는 병이 들어 동회에서 모든 일을 폐하고 문을 닫고 정을 닦았다. 일찍이 불가의 정명(淨名)에 천착하여 산인납자와 서로 응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余病廢田間, 閉門習靜, 嘗噯釋氏一段淨名處, 與山人衲子不能無酬酢語]”는 대목을 주목하게 된다. 이는 동회(東淮)의 전장(田庄)에서 그와 담소했던 인물이 주로 승려들이었으며 불교의 정명 사상에도 깊이 천착했음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말년의 그의 삶은 유학자이지만 불교를 가까이한 일상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도서·서화 수집 좋아한 文臣
불교와 가까운 일상 즐겨
승려들에게 수 편 선물
청허당휴정대사비쓴 인연도

낙전당 신익성(樂全堂 申翊聖, 1588~1644)은 조선후기 문화를 주도했으며 전서(篆書)의 대가로 통한다. 정숙옹주와 혼인하여 선조의 부마가 된 후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진 권문거족이었던 그는 승려들과의 교유를 통해 불교를 이해했던 흔적이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그와 교유했던 승려들의 시축에 발문을 썼던 사실과 승려들에게 증여한 시 수 편을 남겼다는 사실 외에도 운요사(雲腰寺), 금신사(金神寺), 유사(楡寺), 망해사(望海寺) 등 여러 사찰을 유람한 것에서 그의 불교에 대한 시각을 짐작할 수 있다. 이뿐 아니라 그가 <청허당휴정대사비>를 쓴 것은 단순히 글씨에 능했기 때문만은 아닌 듯한데 이는 불교에 대한 그의 친밀감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일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가문은 권문세가였다. 이는 그의 조부(祖父) 신영(申瑛)이 우참찬을 지냈고, 부친은 영의정을 지냈던 신흠(申欽)이라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이는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병자호란을 겪는 등 정치사회적으로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시절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主和派)에 강력히 대항했던 그였기에 얼마 후 척화오신(斥和五臣)으로 지목되어 최명길, 김상헌, 이경여 등과 함께 심양으로 끌려가 억류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처럼 그가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연유는 1642년 명과의 밀무역을 하던 선천부사 이계가 청나라에 잡혀가 조선이 명나라를 지지하고 청을 배척한다는 고변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인조가 청과 굴욕적인 화의를 성립한 후, 그를 삼전도비사자관(三田渡碑寫字官)에 임명했으나 이를 거부, 사퇴한 일도 청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아무튼 그는 청에 끌려가서도 한 치의 굴함도 없이 자신과 조선의 입장을 적극 해명하였다고 하니 조선의 선비 기상은 이처럼 굳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세상의 일은 새옹지마이다. 그가 억류되었던 심양은 명청 교체기의 역동적인 지역으로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다. 얼마 후 소현세자의 주선으로 풀려난 그는 심양의 여정에서 보고 들은 일들을 기록하여 <북정록(北征錄)>을 남겼다. 실제 그가 이런 격동기를 겪으며 느꼈던 심회는 무엇일까. 그의 비분감개는 단순히 시, 서에 묻고 말았던 것일까. 심양에서 돌아온 후 시, 서를 즐기며 세월을 보냈던 그의 정황에서도 시대적인 한계를 짐작케 한다.

▲ 이태호 명지대 교수가 발굴, 공개한 신익성의 백운루도

부마로서 벼슬에 나아가는 신분적인 제한을 받았던 그는 부마로서의 혜택을 십분 활용하여 문예활동 기반을 단단히 하였다. 부인 정숙옹주와 부친 신흠의 묘소를 다시 조성하면서 이수(二水, 지금의 양수리) 일대를 정비하고 확장한 것은 선영을 정비한다는 명분이 외에도 전장(田庄)을 확보한 일이었다. 동회(東淮)라는 그의 호는 이수(二水) 유역을 확충하면서 이 지역을 동회(東淮)라 부른 것에서 연유되었다. 당시 권력을 가진 사대부들은 근기(近畿)의 선영을 확보하면서 전장을 가꾸는 것이 유행했다고 한다. 이들은 근기 지역의 별서(別墅)를 관리 운영하면서 이곳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아회를 열어 풍류를 즐겼는데 이는 자신의 문화적 명성을 얻으려는 의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낙전당은 수많은 도서와 서화를 수집하는 문화적 취향이 있었다. 이러한 그의 취향은 <낙전거사자서(樂全居士自敍)>에서 고적을 수습하여 정주학에 대한 책들을 얻었다[收拾古籍得洛閩諸書]”고 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가 수집한 도서들은 낙민(정주학)의 책들[得洛閩諸書]’이라 하였다. 낙수에는 정자(정명도, 정이천)형제가 있었고 민중(閩中)에는 주자가 있었기에 정주학에 관한 책들을 낙민제서(洛閩諸書)라고 한 것이다.

한편 그가 사찰을 유람한 일이나 승려들과의 교유한 사실은 주로 <낙전당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사승행(四僧行)>에도 잘 드러난다. 이 글에서 네 승려란 바로 그와 교유했던 의현, 진일, 성수, 희안이며, “모두 당세의 종사이며 각성장로의 상족들이었다[四僧 卽義賢 眞一 性修 希安 俱當世宗師 覺性長老上足弟子也]”고 한다. <사승행(四僧行)>은 전체가 20구로 이루어진 장시(長詩)이다. 그 중에 일부 중요한 부분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문 앞의 버들, 따뜻하여 조는 듯하고[門前楊柳暖欲眠]
연못에 싱그러운 연꽃 봉우리는 동전처럼 떠있네[池中菡萏靑浮錢]
게으른 거사, 단장도 하지 않고[居士泥慵罷巾櫛]
쪽문을 가리고 선후도 없이 손님을 물리치네[塞竇謝客無後先]
(나의 문을)두드리는 건 오직 네 승려뿐[剝啄者誰四衲子]
문안을 허락하나 도리어 구속되지 않네[許令膜拜還翩翩]
높은 관리나 달사라도 응하지 않았는데[宰官達士且不應]
어찌 벽안납자는 가까이 오게 하는가[碧眼胡爲來近前]
내 세속을 끊은 것은 아니나 선을 사랑하여[吾非絶俗而愛禪]
이들과 자못 작은 인연을 맺었네[此物頗少區中緣]
한결같고 또한 평안하며 어구도 좋고[一也安也句語好]
염불을 닦아도 글을 잘하네[修能念誦文卽賢]중략

그가 승려들과 교유했던 것은 두 가지 연유에서다. 바로 그가 선을 좋아했고, 승려들이 글을 잘할 뿐 아니라 한결같은 도량과 편안한 안정(安靜)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대도를 균일하게 다 얻지는 못했으니[均之大道俱未獲] 내 유가이지만 선에 도랑을 파리[我之於儒渠之禪]”라고 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혼미한 길, 인아의 관문을 벗어나지 못하여[迷途未脫人我關] 동쪽으로부터 중향천을 찾았네[秋來東訪衆香天]”라고 하였다. 결국 그가 불교를 좋아했던 것은 혼미한 미망을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인아(人我)란 무엇인가. 바로 사람의 몸에 늘 변()하지 않는 본체()가 있다는 미망()인 것이다. 샹캬 학파에서는 순수정신(純粹精神)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는 혼미한 인아의 관문을 벗어나려고 중향천을 찾았다는 것이니 그가 승려들과 교유했던 목적이 더욱 분명해진 듯하다. 또한 그와 서로 통했던 승려들은 <증수능상인서(贈守能上人序)>에서 드러난다. 그가 어떤 승려들과 교유했는지를 드러낸 이 글의 일부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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