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진짜로, 진짜로 믿고 들어가셔야 됩니다!

생활하는 자체가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고
과거에도 그렇게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나가는구나.
머리카락 하나도 내 게 아니로구나.

(지난 호에 이어서)
그리고 또, 이사 가는 얘깁니다. 어느 집이나 이사를 가는 데는 반드시 우리들이 지금 공부하고 나가는 그 도리를 응용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냥 그 관습 때문에 ‘어이구, 이사를 가도 괜찮을까?’ 요 생각부터 드는 겁니다. 자기가 공부하는 그러한 생각은 둘째고 ‘어이구, 이사를 가야 할 텐데 뭐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을까?’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부터 앞서게 되죠. 완벽한 사람들은 또 괜찮고요. 여기 다니면서도 몰래 어디 가서 뭘 보기도 하고 그럽니다. 사실입니다. 그 뭐 토정비결을 안 보나, 어디 가서 점을 안 치나, 관상을 안 보나 허, 이래 가지고야 무엇을 어떻게 뛰어넘는다고 그러겠습니까? 그 뛰어넘는 건 ‘너는 여기 뛰어내리면 죽는다.’ 하는 교차로에서 바로 성립이 되는 거지, 무난하게 가는 데서 성립이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 깨침도 그래요. 아주 아슬아슬하게, 뛰어넘을 수가 없다 할 때 그때에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하하. 그냥 이 고충에서 아주 한 발짝도 떼 놓을 수 없으리만큼 격할 때 그때 요절이 나는 거지, 격하지도 않고 그냥 그런 데서 뭐가 요절이 납니까? 깨지든지, 그릇이 다른 걸로, 큰 걸로 바뀌든지 할 때 뭐가 되는 거지 아, 그런 게 없는데 어떻게 돼요? 그러니까 극치적으로 아주 그 딱따구리가 뚫듯이 (가슴을 가리키시며) 그저 안으로 뚫어라 이런 거죠.

살림하면서 모든 것을, 울력을 하고 싶지 않아도 ‘아이고, 울력을 하게끔 만들어 놨으니 어떻게 안 하나. 네가 해 놨으니까 해야지.’ 하고 그냥 할 말이 없어도 그냥 뚫기 위해서 자꾸자꾸 거기다 넣고 그냥 자꾸 뚫어라 이거야. 그 수억겁 광년을 거치면서 뚫어지지 않았던 그 찔깃찔깃하게 겹겹이 붙어 있는 그런 거를 뚫으려니까 한꺼번에 그게 뚫려? 그러니까 자꾸 뚫어라 이런 거죠. 뚫는 거는 그 마음의 선장밖에 뚫을 수가 없어. 내가 무슨 말을 하다가 이리로 돌아갔지? 허허허.

이사를 가는 데도 내 생각 같아선 아무 걱정이 없을 텐데 그러거든요. 예전에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어느 보살이 와서 “어유, 스님. 이사를 했는데요, 우리 어머니가 그냥 일어나지도 못하시고 그냥 그 자리에 누우셔서 아주 꼼짝도 못하십니다. 그래서 똥오줌을 받아 냅니다. 이러니 애들하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하고 막 엉엉 우는 거예요. 그래서 가만히 보니까 묏자리에다가 그냥, 묏자리를 뭉개고 거기다 지은 집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네들은 모르거든요. 그래서 그걸 그냥 영혼만 딱 건져 내면 되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참 미거했던지, 구들장을 끌어내고 관을 꺼내 내고 다시 구들을 놓으라고 그랬거든.

그러니깐 내가 아는 소리 한 게 됐잖아? 얼른 쉽게 말해서 아는 소리 한 게 돼 버리고 말았다고. 아, 그래 가지고 그 후에 모두 그런 사람들이 오기 시작을 하는데 야, 이거 야단났더라고. 이거 뭐 애들 보는 데 입도 쩝쩝거리지 못한다는 이치가 있듯이. 아, 그렇잖아? 그래서 다시 홀랑 바꿨죠. 그렇지만 바꾼 것도 아니고 바꾸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이 묘지가 잘못돼도 묘지를 파낼 수가 없다면 영혼만 반짝 들어서 하라 하는 것이 그겁니다. 영혼만 탑에 모셔라 그러면 그 묘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 파헤치지 않으나 파헤치나 아무것도 아닌 흙이에요, 그냥. 흙으로 돌아간 그 자체예요. 그 도리를 몰라서 그렇죠.

그러니까 어떠한 문제가 있어도, 만약에 집을 이사 갔는데 전부 묘지로다가 그냥 벽지 바르듯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위에 집이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 해도 모든 것을 내 마음 주인공에다가 합류화시킬 수만 있다면, 진짜로 믿고 ‘모두가 둘이 아닌데 너만이 이 터를, 이 터의 터를 다 편안하게 할 수 있잖아, 둘이 아닌데.’ 하고 거기다가 세 번 놓고 마지막 한 번을 주인공에 맡겨라. 이것이 방편이자 진실이고, 진실이자 해결사입니다. 해결! 그러니까 무슨 어느 날, 손이 없는 날 가야 하느니 손이 있는 날 못 가느니 하고, 사람이 살아나가는 데 다른 것도 괴로운데 그런 것마저도 괴로워서 되겠습니까? 정말 잘못 가면 곱추도 되고 정말 잘못 가면 그냥 일이 벌어지고, 그냥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이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많습니다.

그러니 그런 거를 방지하기 위해서 얘기 안 해 드릴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거기 여러분의 그릇에 점 하나씩, 내 점 하나가 딱딱 찍혀서 나올 것입니다. 하하하. 그러니 그것이 큰 방편인 줄 아시고 그렇게 허방지방하고 무꾸리하러 다니지 마시고, 또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그렇게 허방지방하다 보면은 내생에 오실 때도 또 허방지방하고 아주 세세생생에 허방지방할 겁니다. 그러니 좀 요참에, 쉬었다 가는 요참에 아주 배워서 뿌리를 빼 오세요. 그리고 또 뭐 있더라? 허허.

제사 지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제사 지내는 것도 내 주인공에다 모든 조상들을 모셔 놓고 그렇게 거기다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수십 명의 영령들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 소립니다. 두드러지지 않으니까 그 세계의 영령들이 그 속에 들어가 보니까 아, 세상이 활짝 뚫렸거든. 세상이 다 터졌어, 그 속에 들어가 보니까. 지금 현재의 사람이 모두 이 공부를 하고 나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전부 일체제불의 마음과, 일체 중생이 둘이 아니게 그냥 탁탁 곳곳마다 통하지 않는 데가 없고 곳곳마다 보이지 않는 데가 없고 아, 탁 뚫렸으니 뭘 바라겠어요, 그 영령들이. 아, 그러니까 모두 하나가 되죠. 그러니까 바랄 게 없는 거죠.

그러면 이, 사람의 생각으로서 이 세상 어느 곳에다 내놔도 손색이 없죠. 그렇게 되게끔 돼 있어요. 그랬는데 우리가 완벽하게 안다 하면은 우리 마음에서 벌써 다 모셨고 다 해결을 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놓고서 판결을 한 거죠. 어머니 아버지든 형제든 누구든 이 세상을 놓고 보여 주고, 들려주고, 앉혀 주고 하면서 판결을 한 겁니다. 그분한테 판결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더하고 덜함도 없이, 배고프다 배고프지 않다도 없이 이렇게, 즉 말하자면 도리천 좌(座)에 전부 한자리를 하게끔 하는 거죠.

그러는 반면에 위패라든가 천혼문이라든가 이런 거 다 필요 없지만, 그런 걸 모르는 분에 한해서는 위패는 써 놓되, 제사를 지내고 나서 이거를 새로이 또 물 한 그릇 떠 놓은 데다가 사르는 거는 해방을, 즉 말하자면 영혼을 붙들어 매 놓지 말라 이런 겁니다. 위패에 붙들어 매 놓으면 영혼이 거기에 부착이 돼 가지고 산 사람도 귀찮고 죽은 사람도 귀찮을 겁니다. 또 위패를 해 놓더라도 그렇게 태워야 하고 천혼문을 써 가지고 읽더라도 그 천혼문하고 위패하고 둘 다, 다 태워야 됩니다.

그리고 상에 차려 놓는 것은 어떤 거든지 귀신 먹게끔 해 놓지 말고, 생각을 ‘사람이 먹는 거지 귀신이 먹는 게 아니다.’ 이렇게 한번 바꿔 봐요. 그렇다면 아무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명절이라면 떡 한 그릇에 그저 과일 서너 가지 해 놓고, 많이 해 놓는다면 맑은 물 한 그릇, 초, 향 이러면은 이 세상이 다 엎어져도 궁색하지 않을 겁니다. 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듯이 모든 위의 그 조상 영령들이 다 한자리를 하게 되면, 그래도 손이 들이굽지 내굽겠습니까? 모두가 그러합니다. 그러한 이치를 모르고 그냥 이것도 해 놓고 저것도 해 놓고 빌고 온통 이런다면 그거는 우리가 돌아가신 영령들의 그 날을 기리는 게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이고, 이거 조상들 때문에 우리가 잘못되지나 않을까? 이게 또 조상들이 붙어서 뭐 자손들이 좋지 않지 않을까? 요런 의심은 좀 버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옛날에 이런 점이 있었어요. 도깨비집인데 영 들어가기만 하면은 그냥 피를 토하고 죽고 죽고 이러거든. 그런데 어느 사람이 이런 공부 하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옛날에도. 옛날에 일본 사람들이 지은 집이었는데, 이게 현실로 있었던 얘깁니다. 그 집만 들어가서 살았다 하면은 그냥 그렇게 죽습니다. 그런데 그냥 죽지도 않고 피를 토하고 죽고 피를 토하고 죽고 이러는데, 어디다 뭐를 물어보고 물어보고 아무리 해도 그게 결론이 나질 않습니다. 그러니깐 그 의지가지 할 데가 없는 사람은 들어가고 또 그냥 그렇다 싶으면 나가고, 또 들어가고 나가고 또 들어가고 이렇게 해서 수 해를 통해서 수십 명이 죽었다 합니다. 그것도 여기에서 멀지 않은 데서 말입니다.

그랬는데 그래도 이런 공부 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아주 판치고 들어갔죠. 들어가서 ‘칼로 맞아서 죽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기가 막힐까? 둘이 아닌데 그것이 바로 나였지.’ 하고 그냥 모두를 이렇게 쥐어서는 (오른손으로 왼손 주먹을 쥐어 보이시고) 밥 한 그릇을 큰 그릇에다가 해 놓고는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초, 향 켜 놓고 이러고선 과일 세 가지를 해 놓고, 너와 나와 한잔 하자 이런 셈이죠, 얼른 쉽게 말해서. ‘둘이 아닌데 이럴 수가 있어? 이렇게 고통을 받고 죽었다면 우리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야지 어떡하겠느냐?’ 하고선 아마 대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대들어 가지고 완성했어요. 아주 그냥 내버리다시피 한 그 집을 그냥 그저 얼마 이렇게 술값 집어 주고 거저 얻듯 그렇게 그냥 사 버렸어요. 사 가지고 아주 잘됐죠. 그 외에 논 있는 것도 삼분의 일은 다 사 들였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렇게도 해서 도와주는 주인과 부하가 둘이 아니게 살고, 그렇게 잘 살고 외려 자식들을 잘되게 도와줍니다. 자기라는데 어떻게 안 도와줍니까? 자기라는데! 자기를 자기가 죽일 수는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사 가는 데도 너 나를 두 편으로 가르지 마시라. 모든 거를 주인공에 넣고 ‘둘이 아닌데, 네가.’ 이 주인공에 ‘모든 게 하나니까 너만이 날 돌봐줄 수 있어. 한마음 주인공!’ 이렇게 하면은 다 그냥 한데 합쳐지는 거야.

이 마음 놀음으로 인해서 도깨비가 되고, 마음 놀음으로 인해서 바로 선자가 되는 겁니다. 이 마음으로 인해서 얼마나 타격을 받고 얼마나 창살 없는 감옥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러면 인제 오늘은 이걸로써 끝내고요, 질문하실 거 있으면 질문하세요. 질문하실 때 한 가지씩 한 가지씩 또박또박 질문하세요.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옥체 강건하시어 단비 같은 법문을 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많은 신도와 중생들에게 한량없는 법의 양식을 주시고 또한 저에게도 질문의 기회를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에 대행 큰스님을 만나지 못하고 이 마음공부를 하지 못했다면, 우리 집안은 진작 파산이 되고 저는 이제까지 살지도 못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한 병고 액난, 지옥 같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큰스님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갑술년 새해를 맞아 큰스님의 법어를 듣고자 이렇게 청하옵니다.

큰스님 나로서는 신도님들이 괴로운 것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기 위해서 오늘도 이렇게 계속 얘기를 하고 갑니다. 그 얘기가 한데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실천만 제대로 한다면. 그거는 이 세상을 간파할 때, 땅을 치고 울고 하늘을 쳐다보고 웃을 때에 나는 결심한 겁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주자. 모든 사람들이 고통받는 게, 바로 내가 이 세상을 두루두루 돌면서 고통받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해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잘 실행하세요. 그것만 잘 실행한다 하더라도 살아나가는 데에 큰 힘이 될 겁니다. 거기에 또 생활이 부착되죠. 생활이 거기에 부착되니까 그거와 더불어 같이 여러분이 실천을 하면서 또 체험하면서 자꾸자꾸 개선해 나갈 거는 개선하면서 이렇게 나가세요.

질문자2(남) 큰스님께서는 늘 일체 경계를 둘로 보지 말고 주인공 자리에 믿고 맡기면서 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어려운 상담을 할 때 또는 얘기하기 상당히 어려운 상대하고 얘기를 나누면서 관을 한 결과 아주 좋은 결과를 얻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사량심이 앞서다 보니까 평소 때 관하면서 맡겨 들어갈 때 과연 이게 공부가 어느 정도 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늘 회의가 앞서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것 자체에 대해서도 믿고 맡기고 들어가라고 스님께서는 말씀하실 거라고 짐작하지만은 과연 이게 공부를 하고 있는 거라고 느낄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의심을 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 꿈으로라도 어떻게 공부하는 과정이 나타나는 것인지 안 그러면, 저는 가슴을 향해서 눈을 내리깔고 사무실에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집에 있을 때나 가끔 어떤 사안이 없어도 관을 해 봅니다. 그럴 때 가슴이 아련히 아려 오는 그런 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공부를 하는 중의 어떤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인지 안 그러면 괜한 생각을 두고 있는 것인지 한번 여쭤 보고 싶습니다.

큰스님 우리가 가슴이 아련해짐을 느끼고 이런 것도 그것이 있다는 증거의 과정이죠. 그런데 확실치 못한 것은 사실이죠. 그러나 그것을 확실치 못하다고 없다고 미심쩍게 생각진 마세요.

그런 점도 있죠. 옛날에 나는 그렇게 서로 상응하면서도, 그 마음이 말입니다, 그때가 스무 살 정도? 6·25 나기 전이니까. 야! 참 신기한데 말이야, 내 깐에는 뭐 절에서 스님네들한테 많이 들은 것도 아니고 경을 본 것도 아니고 이러니까, ‘야, 당신이 있다면 내 손을 들어서 확실하게 있다는 걸 증명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닌 걸로 하자.’ 이렇게 하고선 딱 앉았단 말입니다. 그랬는데 웬걸, 꼼짝도 안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에이, 그러면 그렇지.’ 하고선, 그래도 나는요, 믿지 않거나 그런 게 아니고 ‘허! 명령이 되는 모양이지?’ 이렇게 하곤 고만뒀어요. 그랬는데 막 이렇게 일어나려고 하는데 그냥 별안간에 이 팔이 말입니다, 그냥 공중제비로 올라가는 겁니다. 그러니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부터 때에 따라서는, 내가 한문 글씨를 모르던 때인데, 지금은 뭐 아나요? 하하하, 국문도 잘 몰라요. 절 도량에서 그전에는 불을 많이 때서 숯을 썼거든요. 숯 하나를 집어 들면 이게 내 손이 아니에요. 모두가 이게 내 몸도 아니고, 내 손도 아니고, 내 눈도 아니고, 내 귀도 아니고 전부 아니에요, 이렇게 해 보니깐요. 그래서 그때서야 ‘아하! 들 것도 없고 안 들 것도 없고 몽땅이구나, 몽땅이야!’ 그러고 웃은 예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못 믿게 생각을 하지 마시고 몸뚱이 하나가, 즉 내가 있기 때문에 그가 있다는 거를 아셔야 돼요. 내가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의 근본이 있지 내가 없는데 어떻게 마음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부착이 돼서, 지금 속에 정맥 동맥이 같이 돌아가듯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뿌리와 나무가 둘이 아니게 그냥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무가 뿌리를 못 믿습니까? 그와 같은 거죠.

그러니까 자꾸 그렇게 하다 보면 웃음이 나서도 웃을 거고, 화가 나서도 화를 낼 것이고 이렇게 만드시란 얘깁니다. 허! 너무 기가 막혀서 이제 이쪽은 저쪽이 없는 줄 알고 막 그냥 생각을 하고 웃기다가 보면 거기서 껄껄껄껄대고 웃는단 말입니다. 거기서 웃는 게 바로 자기가 웃는 겁니다. 예.

그러니까 색경을 봐도 자기 모습이 보이는 게 아니고 자기 참이 보일 때 바로 둘이 아니게 볼 수 있는 거죠. 옛날에는 무쇠로다가 면경을 만들어서 그 면경을 자꾸 들여다보면서 했다고 하는데 그럴 필요도 없죠. 바로 진짜로 진짜로 믿고 들어가셔야 됩니다. 아리송하면 안 되죠. ‘잘하든 못하든 그냥 진짜로 믿고 생활하는 내 몸뚱이 전체가 다 그놈이 하는 짓이로구나. 생활하는 자체가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고 과거에도 그렇게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나가는구나. 머리카락 하나도 내 게 아니로구나.’ 하고 ‘응, 바로 네 울력에 내가 이렇게 울력을 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하는 일도 걸림이 없이 잘될 겁니다.

그런데 모두 여러분이 100% 내가 사는 거 따로 있고 믿는 거 따로 있게끔 하거든요. 참 이상해, 그거 보면. 그러니 자기가 자기 부처인 줄 모르죠.

그러니까 진짜로 자기를 의심하지 말고 이 몸속에 있는 생명의 의식들과 더불어 한마음으로써, 한마음의 그 선장이 바로 자기의 마음이라는 거를 아십시오. 이 몸속에 있는 생명들이 바로 배를 타고 허허바다에 지금 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의 마음이 선장이 돼서 바로 배 안으로, “야, 배 뒤집힐까 봐 무섭다. 가만히 좀 있어! 여기를 벗어날 때까지 좀 가만히 있어. 좀 조용하게 있어. 배 뒤집히면 너도 나도 다 죽어.” 하고 안으로 다스려야지, 바깥으로 “살려 주시오! 살려 주시오!” 해 봤던들 소용이 없거든요. 아니, 생각들을 해 봐요, 안 그런가? 아니, 내 몸속에 지금 중생들이 잔뜩 배에 탔고 내가 지금 배가 돼서 가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선장이 돼 가지고 지금 자꾸 끌고 가는데 그냥 허허바다예요.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게 허허바다를 지금 헤매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아니, 너도 나도 다 죽자고 안에서 악업 선업들이 그냥 요동을 칩니다. 악업이 나올 때는, 마음이 금방 좋았다가도 요렇게 삐뚤어져서 그냥 이런 게 치밀고 어떤 건이라도, 별거 아닌데도 화가 나요. 화가 나게 되는 거니까. 또 어떤 건은 웬만큼 화날 거라도 아, 슬기롭게 넘어간단 말입니다. 그리고 잘돼서 이렇게 하는 때도 있고. 바로 잘돼 나갈 때는 ‘아, 너희들 참 감사하구나. 이렇게 이 배를, 노를 젓고 가는데도 절대 손색이 없게 하니 참 감사하구나!’ 하고 거기다 놓고, 또 여기서 막 우왕좌왕할 때는 ‘야, 가만히 있어. 우왕좌왕하는 것도 너니까 가만히 있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서 다스리는 것이 바로 관(觀)입니다.

질문자2(남) 스님, 그런데 그 꿈이라든지 이런 거에 대해서는….

큰스님 그거 이제 얘기해 드릴게요. 꿈도 생시고 생시도 꿈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까 탤런트 얘기했죠. 이 탤런트들도 꿈과 같이 탤런트들 그 소임을 맡아 가지고 하죠? 우리 지금 사는 것도 탤런트들이 연극하는 거와 같죠. 지금 연극하는 배우들이에요, 우리가. 허허허, 그러니까 꿈에는 이 몸을 벗어나서 마음이 가르침이요, 또 몸과 마음이 한데 합쳐서 가르침이요. 그러니까 생시나 꿈이나 같이 공부입니다, 이게. 꿈 따로 보고 생시 따로 보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생시에 이렇게 저렇게 했던 것도 꿈에 나타나서 채찍질을 해서 가르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모두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이 모두가 살아나가면서 별의별 일이 다 생기고 하는 것을 우리가 마음공부를 함으로써 커버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타파할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니깐 어떠한 것도,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주 진짜로 믿고 진짜로 거기 놓는다면은, 바깥으로 끄달리지 않는다면 미칠 필요도 없어요. 바깥으로 끄달렸다 하면 미치는 공부입니다, 이게. 바깥으로 기복으로 자꾸 믿고 이렇게 끄달리면은 이게 뭐가 들리고, 뭐가 그 영계에서 들리고 자꾸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이들 하세요. 아주 똑바로 모두 천 가지 만 가지로 화(化)해서 나온다 하더라도, 뭘로 변해서 보인다 하더라도, 부처로 보인다 하더라도, 또 아주 거지로 보인다 마구니로 보인다 이러더라도 허허 웃고 ‘그 한 구멍에서 나오는 것을 왜 내가 속아서 이러고저러고 해?’ 하고 거기다가, ‘나 공부시키려고 그러는구나!’ 하고 거기다 되맡겨 놓고 믿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 교차로를 뛰어넘을 수가 있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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