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린다는 것

와시다 기요카즈 지음|김경원 올김|불광 펴냄|1만 3천원

기다림 행위 불교적 관점서 고찰
“기다림은 시간공백 메우는 일”
기다림, 상대 제압하는 효과적 수단
우연의 작용 기대하는 일도 포함

요즘은 기다리는 일이 지나치게 어려워졌다. 약속 시간에 만나기로 한 상대가 당장 눈앞에 안나타나면 잠시 기다려보기보다 곧장 휴대전화로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건다. 전철역서도 몇 분 뒤 도착할 다음 전철을 기다리지 못해 자신의 몸을 만원 전철 안으로 구겨 넣는 풍경의 목격이 쉽다. 조직 생활도 매한가지다. 회사는 최단 시간에 성과를 내기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을 수립하고 목표를 향해 달린다. 그 과정서 포기도 빨라져 도중에 아니다 싶으면 지체 없이 방향을 틀어버린다.

조금씩 기다리는 일이 우리 시야서 사라진다. 즉 기다림의 미학이 쇠퇴되는 것이다. 이 책 〈기다린다는 것〉은 이렇듯 점점 희미해지는 ‘기다림’의 행위를 철학적 관점서 고찰했다. 저자 와시다 기요카즈는 미야모토 무사시, 다자이 오사무의 일화를 비롯해 요양시설서 치매 노인을 보살피는 과정, 문학작품에 묘사된 기다림의 양상을 두루 살핌으로써 기다림의 진정한 의미에 다가서고자 했다. 언어적 정의를 넘어 실제 삶에서 기다림이 어떤 모습으로 현상하고,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 밝혔다.

이 책의 첫 장은 휴대전화 이야기로 시작한다. 저자는 대다수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소지하면서 기다리는 일이 힘들다고 말한다. 시공간상의 거리를 뛰어넘어 언제든 소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사람들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편지를 쓴다. 최단 시간을 계산해 마치 연인이 편지를 통째로 꿀꺽 삼키듯 읽어버리는 정경을 상상한다. 상상으로 인해 마음이 들뜨기도 가라앉기도 한다. 가슴 설레는 상상은 시간과 더불어 부풀어 오른다. 겨우 설렘을 가라앉히고 잠자리에 든다 해도 날이 밝자마자 쏜살같이 우체통으로 달려간다. 우편배달 시간은 아직도 멀었지만, 어쩌면 지난밤 사이 답장을 직접 우체통에 넣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리는 이런 시간의 감촉과 꽤 멀어졌다. 기다릴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전에 손가락이 먼저 움직인다. 더 이상 마음 졸이며 상처받을 일이 없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상대를 마음에 새기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때가 차기를 기다리는 일, 무언가를 향해 자신을 부단히 열어두는 자세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기다림은 시간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다. 때론 기대와 희망이 부풀고, 때론 불안과 초조함에 떨면서 버텨내는 시간이다. 그 끝에 어떤 결말이 기다릴지 기다리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고통스럽지만, 그 불확정성으로부터 기다리는 사람은 한 줄기 가능성을 움켜쥐게 된다. 훗날 시간이 해결했거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사건, 아무런 예고나 징조 없이 찾아올 미래를 맞이할 가능성 말이다.

기다리게 하는 것은 상대를 제압하는 효과적 수단이다. 기다리게 함으로써 타인을 불안정한 상태에 빠뜨리고, 타인의 마음이 바짝 타들어 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고지로의 간류지마 결투이다.

“승부는 한순간에 결정 났다. (…) 고지로는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림에 지친 그는 차마 끝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 이것이 무사시의 전략이었다.”

무사시는 기다리게 함으로써 이겼다. 일부러 약속 시간에 늦음으로써 기다림에 지친 고지로가 스스로 무너지게 했다. 하지만 기다리게 하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 상대가 스스로 무너지길 기다리는 것은 역시나 무언가를 기다리게 돼 스스로도 무너질 가능성을 떠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기다리게 하는 쪽의 괴로움을 기다리는 쪽의 괴로움이라고 바꾸어 말해도 좋다고 말한다. 오히려 기다리는 사람의 신뢰에 끊임없이 부응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기다리게 하는 사람의 괴로움이 더 크다고까지 주장한다.

“열흘이 지났는지 닷새 정도였는지, 더 이상 견딜 재간이 없어진 단 가즈오는 다자이 오사무를 찾아 나섰다. (…) 그는 이부세와 태평하게 장기를 두고 있었다. (…) 이런 소동 가운데서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던 다자이 오사무가 단 가즈오에게 던진 한마디는 이런 것이었다. ‘기다리는 쪽이 괴로울까? 기다리게 하는 쪽이 괴로울까?”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다리게 함과 기다림을 당함’이라는 관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것이 언제나 삐걱거림 속에 파탄과 회복을 반복한다는 점이다. 그 속에서 사람이 상처받거나, 포기하는 일 없이 기다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기다리고 있음을 잊는 길밖에 없다. 그 방식 중 하나가 바로 끊임없이 사소한 일에 얽매이기다. 사실 그 광경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아주 오랫동안 그런 삶을 지켜봤다. 다름 아닌 어머니로부터…. 저자는 어쩌면 일상의 반복에 몸을 파묻는 것은 기다리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지혜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기다림은 어딘가 애틋한 측면이 있다. 그것이 그리움이라는 정서와 이어질 땐 더욱 그렇다. 사실 모든 기다림에는 어느 정도의 기대나 바람이 내포돼 있다. 기다리는 사람은 그 기대와 바람만으로 무진장 둔중히 흘러가는 시간을 견뎌낸다. 상상만으로도 세상은 장밋빛으로 물든다. 하지만 또한 기다림은 초췌하고 격심한 소모다. 기다림은 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긋남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충분히 기다렸는데도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으면, 그때부터의 시간은 오로지 고통의 연속이다. 온갖 상상이 머리를 어지럽히고, 사소한 소리나 움직임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선다. 상대를 미워하거나 자신을 상처 입히는 일도 벌어진다. 이때 기다리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망각뿐이다. 저자가 책에서 예로든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영화 속 대사를 빌리면 “잊어도 되는 것, 잊으면 안 되는 것, 그리고 잊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겨우 정리해야만 기다림은 가능해진다. 기다림의 보람 없음, 그것을 잊어버릴 때 사람은 비로소 기다릴 수 있다.

보살핌의 현장에서는 기다리는 일이 더욱 복잡하다. 기다리는 사람과 기다리게 하는 사람의 관계가 친구나 가족처럼 통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치매 노인의 간호에서는 더욱 그러한데, 이런 간호사들이 사용하는 보살핌 수법 중 하나가 패칭 케어(patching care)다. 일상적인 행위들이 조각처럼 짜여서 알게 모르게 보살핌이 이뤄지도록 하는 방식이다.

“직원은 아무렇지 않게 신문을 펼쳐놓고 그 안에 끼워놓은 전단지 광고를 누군가에게 건네거나 한다. 슈퍼의 광고사진을 보고 좋아하는 음식 이야기가 나오거나 하면 자리의 공기가 평온하게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분위기를 바꾼 원인을 누구 한 사람의 행위로 환원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재촉하거나 쫓아가는 일 없이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잡힐 때까지 기다린다는 점에서 이 또한 기다리는 일의 일종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딘가 우연에 기대는 측면이 있다. 누구도 자신을 내세우거나, 억지로 통제하려는 시도 없이 그저 시간의 힘이라고 부를 만한 혹은 자리의 힘이라고 부를 만한 것에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서, 이처럼 기다림에는 우연의 작용을 기대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을 먼저 가두어놓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기다림이 미래에 찾아올지도 모를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이라면, 우연처럼 무언가 내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항시 내 안에 공간을 비워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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