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었다 가는 길에, 요 교차로에서 네가 깨달아라

내면 그 한 구멍에서 일체가 들고 일체가 난다.
그 한 구멍에서만이 바다를 삼키고 바다를 토한다.
그 구멍이 아니라면 딴 구멍은 없다.

사람마다 다 마음이 간사해서, 간사하다기보다는 사람 사는 게 그런 게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새해를 맞이하면 ‘새해를 맞이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마음이 출렁거리고 새로운 무엇을 찾아보려 하는 그런 마음이 아마 정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의 도리를 잘 알 수 있다면 경거망동을 하지 않고 그 모든 문제에 대해서 침착하게, 질서와 도리를 지키면서 기꺼이 삶의 보람을 크게 느낄 수 있는 그런 길을 아마 택할 겁니다.

우리가 어떠한 회사든, 또 어떤 사찰이든, 어떤 가정이든 사회든 모든 문제들을 가지고 살아나가는 데 대해서 예전에 부처님께서도 그랬습니다. “한 식구라면, 한마음으로 단결해서 모든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데에 울력의 마음을 조금도 잃지 말아라. 그것이 그대로 여여함이니라.” 이렇게 말씀도 하셨는데, 이거는 우리 사찰이나 이런 도량을 가진 모든 단체나 어디를 막론해 놓고 얘기죠. 뭐, 사찰뿐만 아니죠. 그런데 우리가, 예를 들어서 ‘몸을 버리자니 마음이 울고, 마음을 버리자니 몸이 운다.’ 이런 말이 있죠. 물질을, 즉 몸을 배척한다면 마음은 보이지 않고 마음을 배척한다면 몸이 또 송장이 되니 보이지 않느니라. 그래서 마음과 몸은 동시에 작용과 울력을 통해서 질서를 지키고 화목을 지키고 또는 도의, 의리를 지키면서 모든 일에 대해서 서로가 서로를 돕고 아끼면서 살아나간다. 그것이 바로 선(禪)과 교(敎)가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절에서도 이런 게 있죠. ‘우리가 마음이 넓고 지혜로우면 어리석은 짓을 안 한다.’ 이런 말이 있어요.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여러분도 똑같습니다. 권속이 만약에 백 명이라 하더라도, 단 세 명이라 할지라도 내 마음과 둘이 아니요, 내 생명과 둘이 아니요, 내 모습과 둘이 아니라면 잘못하는 걸 봐도 ‘전자에 내가 잘못할 때의 내 모습 같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역시 둘이 아니게 돌아갈 수가 있고 자비를 베풀 수가 있고, 모든 면에서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낼 수가 있는 겁니다. 사실이 또 그러니까요. 그대로 있는 게 하나도 없거든요.

그래서 권속들이 일을 할 때나 좌선을 할 때나, 좌선을 할 때면 같이 좌선을 하게 되고 또 울력으로서 일을 할 때는 같이 일을 하게 된다. 그건 왜냐하면 울력이라는 이 자체가 바로 몸이 닥치는 대로 움죽거림을 말하는 거죠, 너 나가 없이. 그런데, 움죽거리는데 움죽거리는 거를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리고 앉아서 좌선하는 것만이 공부라면, 좌선하는 사람은 방에 앉아 있을 가치도 없고 먹을 가치도 없고 입을 가치도 없어요. 얼마나 어리석어요. 남이 해 놓은 옷 입고 남이 모든 것을 대치해 놓은 것, 그거를 먹고 그러면서 물질세계의 모든 움죽거림을 거부한다면 바로 죽은 도를 믿는 거나 같습니다.

그래서 ‘상하(上下) 사방(四方)이 탁 터졌으니 거칠 게 없느니라.’ 이런 말이 있죠. 거칠 게 없느니라. 그대로 작으나 크나, 짧으나 기나, 일하는 거나 앉아 있는 거나 서 있는 거나 모든 게 걸림이 없느니라. 이 통 속을 벗어나야 우리가 어리석음을 다 태워 버리고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할 텐데도 우정 그저 앉아서 ‘내가 마음공부를 꼭 해야지.’ 하는 것은 물리가 터지질 않은 지혜롭지 못한 이런 이치다 이런 겁니다.

또 ‘우리가 그냥 생활하는 것으로는 도를 배울 수 없다.’ 이렇게 해도 어리석은 겁니다. 우리는 생활 떠나서는 불교가 없고 불교 떠나서는 생활이 없는 겁니다. 여러분이 여래(如來)요 여러분이 바로 부처인데 아, 그렇게 생각을 하고 다 그렇게 행동한다면 부처가 어딨고 도가 어딨고 불교가 어딨습니까?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떨쳐 버리고, ‘우리가 앉으나 서나 일하나 모두가 도 아닌 게 없고 참선 아닌 게 없다.’라고,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게 침착하게 다스리면서 관(觀)하고 나가는 것이 바로 회향입니다. 마음의 회향!

옛날에 백장 선사(百丈禪師)도 그랬듯이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마라.’ 그건 왜 그랬을까? 미워서 그랬을까? 그렇지도 않아요. 정맥과 동맥은 동시에 움죽거려야 되는 것이다라는 얘기를 가르치느라고 그랬지요. 마음이 없어도 육신은 태어나지 않았을 거고 육신이 없어도 마음이 없을 거고, 그러니 ‘마음과 육신은 항상 같이 동일하게 움죽거리는데 어찌 자기 몸을 버리겠다고 하느냐?’ 이런 뜻이죠. 몸이 없으면 보는 거 듣는 거 말하는 거, 맛과 모든 것에 부닥침이 없기 때문에 공부를 못 하는 거죠. 양면이 다 가지런히 동시에 움죽거리는 바로 그 가운데서 내 마음이 선장이 돼서 다스리는 것, 안과 밖을 평등하게 다스리는 것을 ‘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하는 것도 바로 그놈이 몸을 다스리는 거요, 또 가만히 앉아 있게 하는 것도 그놈이 다스리는 거요, 자기가 있다고 깨닫게 하는 것도 그놈이 하는 거요, 물리가 터지게 하는 것도 그놈이 하는 거요. 그래서 그 내면 한 구멍에, 한 구멍에 일체가 들고 일체가 난다, 한 구멍에서만이 바다를 삼키고 바다를 토한다 이 소립니다. 그 구멍이 아니라면 딴 구멍은 없어요.

그래서 옛날에도 “불교가 도대체 무엇이며, 참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너, 너희 어머니 자궁 속에 한 번 더 들어갔다 나와야 되겠구나! 몸은 탄생했으나 마음이 탄생을 못했으니 다시 한 번 들어갔다 나오너라.” 하는 선사의 말들도 있었습니다.

그랬듯이 우리가 그렇게 단순하고 어리석게, 현실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면서 현실을 취하고 어설프게 나가는 그런 행동과 마음들이라면 개선해야 할 점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이 바쁜 세상에,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시공을 초월한 이 세상에, 고정됨이 없이 공(空)해서 돌아가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일하는 게 다르고 공부하는 게 다르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어떻게 생활 속에서 공부를 하겠습니까? 한시도 쉴 사이가 없이, 애들 기르랴, 애들 먹여 살리려고 사회에 나가서 벌이하랴, 이러고 저러고 하다 보면은 하루 24시간이 그저, 눈 몇 시간 딱 붙이다 보면 24시간이 그냥 다 흘러가는데 말입니다. 무슨 공부가 따로 있겠습니까? 그것을 떠나서는 진리도 없는 것이고, 그걸 떠나서는 참선도 없는 것이고, 그걸 떠나서는 부처도 없는 것이고, 그걸 떠나서는 중생도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그랬죠. 육조(六祖) 당시에 이 토굴에 들어가서 모두들 공부한다고, 좌선한다고 떡 틀고 벽을 쳐다보고 앉아 있는데, 들여다보고 하는 소리가 “참선을 하려면은 밥도 먹지 말고, 오줌도 누지 말고, 일어나지도 말고, 옷도 택하지 말고, 남이 해 오는 물도 먹지 말아라. 일어나면 선(禪)이 끊어지고, 오줌을 누다 보면 선이 끊어지고, 옷을 입다 보면 선이 끊어지고, 밥을 먹다 보면 선이 끊어지는데 어찌 일어나겠느냐?” 했더랍니다.

가만히 생각들 해 보세요. 모두가 혼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한 회사를 들어가 본대도 혼자 살 수 없는 것, 우리가 아무리 농사를 짓고 산다 하더라도 혼자 살 수 없는 것, 회사를 경영하고 산다 하더라도 혼자 살 수 없는 것이죠. 또 어느 사찰이라도 혼자 살 수 없는 것은 시주자들이 없다면 스님이 살 수 없으며, 스님이 없으면 시주자들이 믿고 배워 나가고 행할 수 없는 문제가 따르고 이 첨단의 도리를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로서로가 둘이 아니게 시공을 초월해서 고정됨이 없이 화(化)해서 나툼을 우리가 말하지 않을 수 없죠. 우리가 찰나찰나 마음이 바꿔지면서 나투면서 응(應)하면서 이렇게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몸속에 있는 자생 중생들을 먼저 제도하라 하는 것입니다. 제도하기 이전에 먼저 모든 걸 한 구멍에다, 모든 일체 사는 거, 모든 움죽거리는 거 안 움죽거리는 거를 다 거기 놓고 돌아간다면 앞서의 입력이 없어지면서 새 입력이 들어가면서 새 입력으로 현실에 나오니, 얼마나 그것이 심성과학적이고도 천체물리학적이기도 하고 의학적이기도 합니까. 나중엔 철학적이기도 하고 천문학적이기도 합니다. 이 모두가 하나도 빠짐없이, 새끼손가락 하나만 없어도 병신이라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도 빠짐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한마디만 더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사회인들보다도 스님들은 더한층 심사숙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생각지 않고 개선할 줄 모른다면 마음의 계발이 있을 수가 없고, 마음의 광력이라는 빛이 바로 발현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 없이 어떻게 창조를 일으키며 노력과 생각 없이 어떻게 계발을 해서 앞장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처음에 내디딘 발자국이나 나중에 내디딘 발자국이나 항시 똑같았습니다. 잘 배우고 잘못 배우고 이걸 떠나서 진실한 내 마음이 지혜롭게 포용력 있게 팔을 벌리고 다 집어먹어야 다 집어먹을 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죠. 다 집어먹어 보지 않는다면 다 집어먹을 게 없다는 걸 몰라요. 또 다 버려 보지 못한다면 다 버릴 게 없다는 사실을 몰라요. 다 버려서 얻는다고 한다면 바로 다 삼키고 다 토해 낼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이런 한 사찰에서도 울력을 제대로 못하고 질서를 제대로 완화시키지 못하고 또 화목을 갖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통치해서 집어삼키고 토하고 할 수 있겠느냐 이 소립니다. 안 그래요?

이 몸뚱이의 집은 못생겼든 잘생겼든, 커다랗든 좁쌀알만하든 상관이 없어. 이 우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다 집어넣어도 좁쌀알도 작지 않으니까. 못생기고 잘생긴 모습을 보거나 이렇게 평가를 한다면 그건 언어도단이야. 그건 무슨 까닭인가. 집이 작든 크든, 만 명이든 천만 명이든 수십만 명이든, 헤아릴 수가 없이 나가서 활약을 하는데, 다 화(化)해서 응(應)해 달라는 대로 모습을 화해서 나투시는데 그 활약하는 모습이 말이야, 그 나툼이 전부 다르니 어떤 거를 꼭 집어서 ‘이거는 나다.’ 이럴 수가 있겠어? 그러니 그렇게 나고 들고 나고 들고 함이 여여해서 어떠한 모습을 집어서 ‘나’라고 할 수 없는 한 개체의 집이다 이거야.
이 집은 일체제불의 마음이 들락날락해도 손색이 없는 집이요, 일체 중생이 다 들랑거려도 손색이 없는 법이요, 다 둘이 아니게 들랑거려도, 하나로 몽땅 다 들어온다 해도 작지 않은 그릇이다 이 소리야.

이 도리를 알려면 무조건 겸손하고, 무조건 고개가 숙여지고, 무조건 닥치는 대로 집어삼켜야 되지 않을까? 이거는 글렀으니깐 안 하고 이건 하기 싫으니까 안 하고, 이거는 미우니까 밉고 이건 고우니깐 당기고, 이렇게 해서는 다 삼킬 수가 없어. 부처님까지도 삼켜야 하는데 어떻게 시간이 남아서 그렇게 허방지방할 때가 있어?

그래서 여기는 물건을 사 와도 모든 스님네들이 다 나가서 울력으로서 해 들이고 모든 걸 같이 해. 누가 적게 하고 많이 하고 뭐, 이런 거 없어. 아시다시피 나까지도 같이 울력으로서 ‘아휴, 저것들이 애를 쓰는데 나도….’ 또 아랫사람들은 ‘아휴, 저 스님이 저렇게 애쓰시는데 나도….’ 이렇게 울력으로 하고 나간다고. 현실에 그렇게 행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발전이 되고. 이렇게 생각을 하지 않으면 발전이 될 수가 없거든.

우리가 생각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몸을 일으킬 수가 있어. 또 거기에서 무엇을 하겠다고 생각을 안 하는데 어떻게 무엇을 할 수가 있어. 우리가 생각 없이, 발전 없이 그 창조력을 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불을 켜고 앞장설 수가 없거니와 그건 목석과 같은 거다. 오늘 살다가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래요. 지금 살다가 이따 죽는 한이 있더라도 쾌활하게 발전 있게 그냥 살다가, 어느 순간에 내가 빠지면 이 옷은 그냥 남아 있겠죠. 좀 이렇게 살 수는 없을까요? 이 모두가 그냥 웃을 것만 아니라 하루 한나절 울어도 시원치 않아요.

탤런트들이 왜 서슴지 않고 소임을 맡아 가지고 일하는 줄 아십니까? 한번 생각들 해 보셨어요? 탤런트들이 왜 거지 소임, 죽는 소임, 임금 소임 또 머슴 소임, 허허, 뭐 사기 치는 소임, 사기 치는 소임을 막는 소임 이런 것들로 다 나오죠. 그렇게 어려운 소임을 맡아 가지고도 좋다고들 하고 소임들을 다하고 있죠. 왜 그럴까요? 아시겠어요? 왜 그나마도 소임을 맡지 못하면 안 되고 소임을 맡아야만 좋아할까요? 그걸 알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요거 막을 내리면, 요거를 다 마치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에요. 그 소임이 그냥 바뀌어지고 제자리로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에요.

지금 이 공부 하는 사람들은 나온 자리를 알고 갈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나온 자리를 알고 갈 자리를 안다고 탤런트들이 생각을 하고 그렇게 행하는 거를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나온 자리가 어디고 갈 자리가 어딘가? 그래도 이해가 안 갑니까? 우리 스님들이라도 이해를 하라고. 하하하.

또 한마디 더 하겠지만, 이 탤런트들이 잠시 잠깐 자기가 소임을 맡아 가지고 대사를 외우고 행을 했다가, 거지로 소임을 맡든지 임금을 맡든지 상관없이 그냥 감독한테 뽑힌 것만 좋아서 그저 그렇게 마음을 먹고 아주 쾌히 응낙하고 행을 하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아마 내내 그냥 “너는 거지로 박혀서 살아라.” 이런다면 아주 전부 꽁무니를 빼고 안 가죠. 그러나 잠시 잠깐이거든요. 잠시 잠깐이니깐 이거는 벌어먹고 살랴 또 활약하랴, 또 이름을 가져야 되겠고 또 그렇게라도 나가지 않는다면 아주 끊어질까 봐 겁도 나고. 모든 게 그렇죠. 꼭 그 말대로가 아니지만 그렇다는 얘기죠. 그래서 나가서 활약을 하듯이 그 모든 것을 다 끝내고 나면은 다시 와서 속이 후련하게 술 한잔을 마시든가, 뭐 드러눕는다든가, 뭐 아주 그냥 탁 털어놓고 ‘이젠 본 원점으로 돌아왔다.’ ‘또다시 맡아야지.’ 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거를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냥 아무렇게나 듣지 마세요, 이거.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럼 어디로 가기 이전에 무엇을 하는가? 탤런트들과 똑같은 얘깁니다. 우리가 지금 그 도리를 ‘어, 원점에서 와서 원점으로 가는구나.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또다시 소임을 맡아 가지고 나오겠지.’ 요거를 안다면 우리가 지금 어떠한 소임을 맡아 가지고 하든지 겁이 나지를 않아요. 잠시 잠깐이기 때문이죠. 우린 탤런트들처럼 잠시 잠깐 쉬었다 가는 길입니다. 이 쉬었다 가는 길에 부처님께서, “너는 쉬었다 가는 길에 요 교차로에서 네가 깨달아라.” 이런 겁니다. 만약에 그것들을 모르고 원점으로 돌아간다면 도로아미타불이다.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또 모습을 가지고 형성이 돼서 이 세상에 다시 나와서 또 그렇게 고비를 치러야 하니까.

그래서 이 마음을 아주 팽팽하게 가지면서 지혜롭게, 그 폭이 넓게 다 주고도 준 사이가 없이 다 내주라 이거야. 또 들여놓을 때는 들여놓는 사이 없이 다 들여라 이거야. 이 모두가 내 한 마음이 조금 너그럽고 좀 더 지혜로우면 다 포용력 있게, 질서를 지키고 도의 의리를 지키고, 나와 너와 둘이 아니게 지킬 수 있죠. 그리고 내가 수억겁 광년을 돌아올 때 무엇은 안 됐겠고 무엇을 어리석게 안 했겠나. 이걸 한번 침착하게 생각해 본다면은 나 아님이 하나도 없어요, 미우나 고우나. 잘못한대도 불쌍하고. 그 잘못하는 것이 그 사람 개인이 잘못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그냥 모르고 산 것이 고만 그렇게 된 거지요. 그러니 얼마나 눈물 나는 얘깁니까? 얼마나 기가 막힌 얘깁니까? 강도질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사기짓들을 하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게 되면요, 과거로부터 오는 것도 있지만 현실의 가정환경으로부터 짊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걸 볼 때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고 아픈지 여러분은 모를 겁니다.

‘저 사람 저거 괜히 그러는 거 아니야?’ 괜히라는 건 있을 수가 없어요. 모두가 내 자식 아님이 없고 환경에 따라서 내 부모 아님이 없어요. ‘공동묘지에 가니까 남녀노소도 없고 여자 남자도 없고 모두가 평등하게 늙었더라.’ 이런 말을 한 예가 있죠. 하여튼 여러분이 앞으로 잘 참작해서 지혜로워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전부터 군더더기가 붙는 말은 싫다고요. 그래서 되나 못 되나 그냥 말을 더듬거리든 말았든, 내가 실천을 했던 ‘참(眞)’ 그런 거를 얘기할 뿐입니다. 남들이 듣기 좋게만 하는 사람은 못 됩니다. 참 삶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여건이 되시길 빌면서 이런 얘기 하는 거죠.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사람이 죽으면 묘지를 쓰고 제사를 지내고 그럽니다. 그리고 또 이사를 갈 때는 무슨 손을 보고 뭐 한다고 합니다마는 이것이 모두 통합된 이치입니다. 이사를, 나쁘다고 하는데 가면은 안 된다는 그런 거, 제사 지내는 거, 묘지 쓰는 거, 묘지를 파내는 거 이 여러 가지 문제가 모두가 하나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아 둬야 할 문제들이 있는 것입니다. 첫째, 묘지를 쓸 때엔 우리 자체가 바로 지수화풍인 까닭에 이 지신(地神)과도 둘이 아닙니다. 지신, 이 땅을 관찰하는, 관리하는 흙신이라는 얘깁니다, 얼른 말해서. 흙도 생명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 안 드세요? 흙이 생명이 있다는 거 아시죠? 물도 생명이 있고, 바람도 생명이 있고, 불도 생명이 있고 그래서 한데 모여 동참을 하니까 공기로서 인간을 살릴 수 있다, 이런 거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신도 나요, 목신(木神)도 나요, 그 영혼 자체도 둘이 아니요. 이 영혼과 이 영혼을 한 물에다 집어넣으면 한 그릇이지 두 그릇이 아닙니다. 영, 영 해도 둘이 아니요, 영, 영, 영, 영 해도 둘이 아니요, 영 하나를 해도 둘이 아니요. 이런 것을 이렇게 얘기해 드리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아 둬야 앞에 닥칠 때 어떻게 커버를 할 수 있지 않겠나 해서 하는 얘깁니다. 이게 문제가 아주 큽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한번 얘기해 드리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묻을 때도 감사하게 세 번 마음에 절을 하고 네 번째 가서 자기의 주인공에 ‘아, 감사합니다!’ 하면은 모두가 혼합이 돼서 전부 빈손이 돼 버려요. 네. 그래서 이건 산 사람들한테도 아무 탈이 없이 오히려 좋은 일만 생기죠.

또 땅을 쓰기 위해서 산소를 파내라 이럴 때, 이건 예를 들어 얘깁니다. ‘파내라.’ 이래서 묘지를 파낸다 이럴 때 내 형제라도 그렇고 부모라도 그렇고 남이라도 그렇고, 모든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참, 여직껏 지켜 줘서 감사하구나.’ 이 흙이 지켜 줬지 않습니까? 안 그래요? 흙 속에 묻혀서 지켜졌으니까. 흙의 그 은혜 받은 거를 갚기 위해서 즉 물 한 그릇에, 어떤 사람은 떡 한 그릇을 해 놓고, 그것도 두 층 세 층이 있습니다. 이 도리를 완벽하게 아는 사람은 물 한 그릇을 안 떠 놔도 바다를 갖다 놓고 할 거고, 하하하, 이 도리를 아는 사람은 말입니다. 하기야 바다를 갖다 놓고,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을 다 갖다 놓고 지내면 되지.

그런데 그 도리를 모르는 사람에 한해서는 물·향·초 또는 땅의 고마움을 보은하기 위해서, 또 산 사람들이 그걸 파내려니 모두 힘들고 그러니까 막걸리 한 통을 갖다 놓고 지내야죠. 허허. 그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북어, 안주하게끔 북어 한 서너 개 가지고 가서 뜯어서 하면서 막걸리도 끼얹고 그 북어 대가리도 끼얹고 그럭하고선 삼배 올리고 나서 사배째는 자기한테 모든 거를 맡겨 놓는다. 그러면 아무 지장이 없어, 파내도. 그런데 아주 모르는 사람, 이 도리를 완벽하게 모르는 그런 사람들은 스님한테 와서 “이렇게 이렇게 하겠으니 마음 좀 내 주십시오.” 하고 가서 해라 이거야. 자기가 거기 일치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전부 따로 흩어지니까. 그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마는 모두들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 중요하다고 생각 안 합니다. 여러분은 그걸 모르고도 당하고 알고도 당하고 이런 사람들이 허다히 많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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