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二’ 깨달음으로 佛·儒 경계를 넘다

불교 식견 높았던 문장가이자
‘억만재’ 서재 가졌던 독서가
금강산·오대산 스님들과 교류
<백곡집>에 정황담은 詩 남겨
“석가·유가 나누지 말라” 설파

▲ 조선 중기 문장가였던 김득신은 독서광으로도 유명했다. 어렸을 때에는 문리가 밝지 않았고, 20세가 돼야 문장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끊임없는 독서로 후에는 조선을 대표하는 문장가가 됐다. 그는 불교에도 높은 식견을 가졌다. 사진은 김득신의 일대기를 조명했던 KBS 미니 다큐 〈한국의 유산〉의 한 장면.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조선 중기의 문장가로, 다수의 승려들과 교류하였을 뿐 아니라 불교에도 상당한 식견을 드러냈던 인물이다.

그가 천기(天機)를 얻어 조화로운 시격(詩格)을 이루게 된 것은 다독(多讀)을 통한 그의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전해진다. 특히 어려서 천연두를 앓았던 그는 노둔하여 여러 번 책을 읽어도 기억하질 못했다고 한다. 그의 ‘행장초(行狀草)’와 ‘묘비명(墓碑銘)’에는 나이 10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부친에게 〈사략(史略)〉를 배웠지만 3일이 지나도록 읽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병으로 인한 장애요소를 극복하고 천하의 문장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바로 그의 학문에 대한 열의와 끈기, 그리고 다독(多讀)을 통해 이룩한 결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부친의 독려와 보살핌 또한 그의 성취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셈이다.

원래 그는 당대 명문가였던 안동김씨의 후손이었다. 경상 감사(慶尙監司)를 지냈던 안흥군(安興君) 김치(金緻)가 그의 부친이며, 외숙 목서흠도 문장에 밝았다. 이런 가문에서 태어난 그 또한 과거(科擧)를 통해 가문을 빛내고자하였다.

1626년에 부친의 삼년상을 마친 그는 이 해 가을 문사(文辭) 시험에서 외숙 목서흠으로부터 시재(詩才)를 인정받은 후, 청운의 꿈을 품고 산사와 경향을 두루 유람하며 과거 공부에 매진한다.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드러난 시기도 이 무렵이다. 택당 이식(澤堂 李植, 1584~1647)은 그의 문장이 “지금에 제일(當今第一)”이라 칭찬하였으며 시문에 밝았던 그는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백의의 제술관으로 추천되기도 하였다. 이는 그의 글 솜씨가 당대에 최고였음을 드러낸다.

이처럼 글에 능했던 그였지만 과거 시험에는 번번이 낙방한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부친이 “60세 까지는 과거에 응해 보라”는 유언에 따라 더욱 공부에 매진하여 1662년 3월, 드디어 증광시 병과에 19위로 급제한다. 실로 그가 품은 청운의 꿈은 59세에 이루어진 셈이니 그의 불굴의 의지와 도전 정신은 후인의 모범이 될 만하다. 아무튼 그가 세상에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일과 등과(登科)는 모두 독서의 힘이었다. 그가 쓴 〈종남총지(終南叢志)〉에는 자신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고 부른 연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본래 노둔(駑鈍)하여 다른 사람보다 배나 많이 읽었으니 〈사기〉,〈한서〉, 〈한유문집〉, 〈유자후문집〉 같은 것은 모두 손수 필사하여 만여 차례를 읽었다. 그 중에 〈백이전〉을 가장 좋아하여 일 억 삼천 번을 읽고 드디어 서재 이름을 ‘억만재’라 하고 이어 절 구 1수를 지어 ‘한, 송, 당, 진의 글들을 골고루 들쳐가며(披羅漢宋唐秦文)/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일 만 번씩을 읽었네(口沫讀過一萬番)/ 가장 좋아한 백이전의 기괴한 문체는(最愛伯夷奇怪體)/ 펄펄 나는 기운이 구름에 뛰어오를 듯하네(飄飄逸氣欲凌雲)’라고 하였다.

김득신이 〈백이전〉을 좋아했던 건 사마천의 강개한 문장의 기상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그의 시는 사마천의 〈사기〉뿐 아니라 〈한서〉나 당대의 한유나 유종원의 글을 토대로 삼았음을 나타낸다.

실제 그의〈종남총지(終南叢志)〉에는 어무적(魚無迹), 이행(李荇, 1478~1534), 정사룡(鄭士龍, 1491~1570), 정철(鄭澈, 1536~1593), 권필(權?, 1569~1612) 같은 전대의 시인뿐 아니라 남용익(南龍翼, 1628~1692), 김석주(金錫胄, 1634~1684), 홍만종(洪萬宗, 1643~1725) 등, 그와 동시대의 살았던 문장가의 시를 뽑아 비평을 남겼다. 후일 그를 비평가로 평가하는 것은 이런 저술 때문이라 하겠다.

한편 김득신과 승려의 교유는 그가 과거 공부를 할 때에 여러 산사를 다니며 공부했던 전력에서 기인된 듯하다. 비교적 여러 사찰을 순례하고 승려들과도 사귀었던 그는 승려들에게 준 여러 편의 시를 남겼는데 이는 그의 〈백곡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김득신이 같은 책을 수만 번 읽었던 괴산의 취묵당. 지금은 기와가 올라가 있지만, 본래는 초가였다.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를 드러낸 시문은 여러 편이 전해진다. 우선 ‘정 승려에게 주다(贈正上人)’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항상 무자를 화두로 삼아(無字須常念)
의심덩어리가 마치 불덩이 같네(疑團似火團)
만약 사악한 악마를 물리칠 수 있다면(邪魔如可?)
진여(眞如)로 응착하여 바르게 하리(一物的應看)

무자(無字)는 일찍이 조주 선사가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라고 묻었던 한 수행승에게 “무(無)”라고 답한 것에서 연유된 것이다. 이후 대혜 스님에 의해 무자화두가 참선의 방편으로 제시되면서 고려에서는 지눌(知訥)이 무자화두로 수행승들을 지도했다고 하고 혜심(慧諶) 또한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지어 화두 참선법을 제시한 바가 있다. 특히 휴정의 〈선가귀감(禪家龜鑑)〉에는 무자화두를 경절문(徑截門)의 방편으로 삼아 수행하도록 권하였다.

따라서 김득신은 이러한 선종의 화두 참선에 대한 내력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므로 의단(疑團)이 “마치 불덩이 같네(疑團似火團)”라고 한 것이며 “진여로 응착을 바르게 하리라”라고 말한 것이다. 아울러 그의 ‘패책 승려에게 주다(贈具策上人)’에는 불교의 불이(不二)사상이나 조주선사의 서리 발 같은 선기(禪機)를 이렇게 언급하였다.

조주선사의 서리 발 같은 검을 잡았는가(趙州霜劍把耶?)
육호지랑, 이것이 무엇인가(六戶支郞奈此何)
몸을 돌려 문득 무심지로 들어가니(?身頓入無心地)
생애가 찰나임을 알겠네(識罷娘生一刹那)
곧바로 비야(유마거사의 거처지)의  불이문을 밟고(直?毗耶不二門)
내 억지로 만든 (세상의) 이름을 미워한다고 하리라(生憎名字强云云)
모름지기 중요한 것은 자유자재하게 만난 곳에서(要須自在相逢處)
석가니 유가이니 하는 구역으로 나누지 말라(儒釋封彊且莫分)

그는 분명 불가의 불이(不二)법문을 능히 요해(了解)했던 유자(儒者)였다. 그러기에 무심지(無心地)와 “곧바로 비야(유마거사의 거처지)의 불이문을 밟고(直?毗耶不二門)”라는 불교의 심오한 뜻을 언급했을 것이다.
그가 수많은 책을 섭렵하면서, 공맹(孔孟)에만 국한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고승(高僧)에 득도의 일갈(一喝)을 열독했을 것이며 〈도덕경〉이나 〈남화경〉도 그의 서가를 장식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모르지기 중요한 것은 자유자재하게 서로 만난 곳에서(要須自在相逢處)/ 석가니 유가이니 하는 구역으로 나누지 말라(儒釋封彊且莫分)”고 말했을 것이다. 실로 그는 한때는 노둔했지만 다독(多讀)을 통해 무변(無邊)을 품엇고 불교를 알았기에 거침이 없었던 선비였을 것이다.
그가 장수사에서 승려가 준 짚신에 감사하며 지은 ‘사장수사승증망혜(謝長水寺僧贈芒鞋)’는 다음과 같다.

장수사 스님이 무슨 물건을 주었는가(僧從岳寺贈何物)
돌아가는 북객에게 두루 좋은 짚신이라(芒偏宜北客歸)
내일 두메의 높고 낮은 길에(明日峽中高下路)
숲과 돌길을 밟으며 저녁놀이 다하리(穿林踏石盡斜暉)

장수사는 함양 안의에 소재한 고찰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 때 그가 영남의 선주(善州)에서 머문 적이 있었다. 아무튼 그가 돌아갈 무렵 장수사 승려가 북쪽으로 돌아가는 김득신을 위해 짚신을 선물했던가보다. 이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장수사 승려에게 준 이 시는 그의 시적 감수성이 오롯이 드러난다.

한편 그가 유람했던 사찰은 금강산의 묘향사, 보은사(報恩寺), 청룡산(靑龍山)의 암자, 오대산, 청심암(淸心庵), 쌍계사(溪寺), 상왕사(象王寺), 성암사(聖巖寺), 정자사(正慈寺), 청평사(淸平寺), 두타사(頭陀寺) 등이다.
그와 교유했던 승려로는 △금강산의 승려, 휘상인(輝上人)·진일상인(眞一上人) △보은사의 도심(報恩寺僧法心) △청용산의 경천상인(靑龍山上人敬天)·벽안대사(碧岩大師) △오대산의 법장상인(五臺山僧 法藏上人)·현철상인(玄哲上人)·처림상인(處林上人)·탁영상인(卓靈上人)·두타사해상인(頭陀寺海上人)·혜정상인(惠正上人) 등이 있다.

특히 벽암대사(1575~1660)와 교유했던 흔적은 그가 벽암대사에게 준 ‘증벽암대사(贈碧岩大師)’를 통해 드러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송월과 소요가 모두 입적했으니(松月鞭羊皆入寂)
자비로운 배로 다시 백성을 구제할 수 없네(慈航無復濟蒼生)
조사의 도리 지금 쇠퇴 여부를 말하지 말라(休言祖道今衰否)
우리 대사의 법인이 가장 밝으니(最是吾師法印明)

벽암대사는 원래 보은 출신으로 8도도총섭이 되어 남한산성의 축성을 감독했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수천 명의 승병을 모집, 북진했던 수행자였다. 따라서 김득신은 법문삼걸(法門三傑)로 칭송되었던 송월, 소요가 모두 입적했다하더라도 수행력이 높은 벽암대사가 있기에 다시 창생(蒼生)을 구제할 수 있다는 희망을 드러낸 것이다.

그의 호는 백곡, 귀석산인이다. 그의 저술로는 〈백곡집(栢谷集)〉과 〈종남총지(終南叢志)〉, 〈종남쇄언(終南粹言)〉이 있고 〈환백 장군전(歡伯將軍傳)〉과 〈청풍 선생전(淸風先生傳)〉 같은 소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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