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깊은 이해 가진 세도 정치가

조선 후기 노론 핵심으로
정조의 개혁정치에 협력해
詩文 능해 ‘초계문신’ 선발

치감·체일 스님 등과 교류
서산 진영 보고 詩 남기기도
추사와도 깊은 우의 나눠

▲ 선암사 만세루의 현판. 풍고 김조순이 쓴 것이다. 안동 김씨 세도의 기틀을 만들어낸 김조순은 불교에 깊은 이해를 가졌다.
조선 후기 노론 시파(時派)의 핵심이었던 풍고 김조순(楓皐 金祖淳, 1765~1832)은 정조의 개혁정치에 협력하였으며, 어린 순조가 등극한 후 그의 딸이 왕비로 책봉됨에 따라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진다. 정순 왕후가 돌아간 후에 노론 벽파를 제거한 그는 실권을 장악했으니 실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의 초석을 놓게 된 것은 이로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그의 자는 사원(士源)이며 풍고(楓皐)라는 자호(自號)를 썼는데 이는 단풍나무 언덕이라는 뜻으로, 그의 집 근처에 단풍나무 1000여 그루를 심었던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원래 단풍나무는 한나라 때부터 궁궐에 많이 심었던 나무라고 전해진다. 이로부터 단풍나무는 궁궐을 상징하는 나무로 인식했던 듯하다. 따라서 그의
호가 ‘단풍나무 언덕을 뜻하는 풍고’였다는 사실은 정치적인 의미를 깊이 상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재기가 있었을 뿐 아니라 문장에도 뛰어났던 그는 기량과 식견까지 출중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는다. 그가 어린 왕세자를 보필하는 직책을 맡았던 것도 정조의 그에 대한 신뢰를 짐작하게 한다. 특히 순조의 장인으로 국구(國舅)가 된 그는 왕에 오른 순조가 덕을 갖춘 군왕이 될 수 있도록 조력을 아끼지 않았다.

풍고의 정치적인 의지는 권력을 장악한 후에도 늘 중요한 요직으로 제수될 때마다 이를 사양하는 겸양의 미덕을 보였다. 그러나 당파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는 오래 가지 않은 듯하다. 후일 그를 둘러싼 척족들의 세력 형성에 말미를 제공했고, 안동 김씨와 순조의 외가인 반남 박씨가 득세한다. 특히 안동 김씨가 세도 정치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풍고의 영향이 컸다는 후대의 평가는 당연한 일이지도 모른다. 결국 권력의 속성은 풍고의 정치적 의지가 꺾인 요인일 것이다.

아무튼 그가 정조의 초계문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문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가 수편의 시문(詩文)이외에도 다수의 비명(碑銘)과 지문, 시책문을 지었다는 사실은 <풍고집(楓皐集)>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는 대나무 그림에도 능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후기 문신이며 정치가였던 그의 삶을 대략을 살펴보자. 그는 영의정을 지낸 충헌공 김창집의 현손이며 서흥부사를 역임한 김이중(金履中)의 아들이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그의 가문의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대체로 그의 환로(宦路)는 순탄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후 검열(檢閱)로 제수되었던 그는 지방의 민요와 풍속을 채록하여 ‘시정기(時政記)’를 수록하자는 의견을 건의하여 실시된 것은 초계문신으로 발탁된 후의 일이다.

그의 정치적 색채는 1788년 규장각 대교(待敎)로 재직할 때에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대립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지켰을 뿐 아니라 당쟁을 없앨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순조가 즉위한 후 부제학,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요직에 제수되었지만 겸양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순조 초기에 정치는 혼란했다. 정국을 주도했던 벽파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그 뒤를 이은 것은 외척 세력이다. 이들은 강력한 통제보다는 완화 정책을 선호하였지만 당시의 시류는 사회, 정치적으로 활력을 찾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세도 정치에 의한 권력 집중은 정치적인 문란을 야기했고, 이는 고스란히 백성에게 고통스런 짐이 되었다. 당시 지방 관리의 부패는 극에 달했으니 농민들의 불만이 방서(榜書)나 괴문서 형태로 나돌았던 것도 이 무렵이다. 도적 떼가 된 유락민은 약탈을 일삼았고, 농민이 주체가 된 민란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는 불교를 배척하기 보다는 불교를 이해했던 사대부였다. 유학자였던 조선 후기 선비들의 친불교적인 불교의 이해는 시대적인 흐름이었던 듯하다. 더구나 젊은 시절부터 새로운 문체를 즐긴 그는 신 유행을 선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소설체인 <오대검협전>을 썼던 사실에서도 드러났으니 정조 때에 일어난 문체반정은 당시 사조(思潮)의 일단(一段)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풍고는 승려들과 교유하며 남긴 몇 편의 시 또한 그의 불교적인 이해를 드러내기에 족하다. 그가 영명사와 의상이 개산조(開山祖)했던 태고사를 찾아갔던 일이나 서산대사의 진영을 배관했던 사실 이외에도 영원암의 치감 스님과 교외에서 만난 체일 스님과의 인연도 그의 시에서 살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먼저 그가 서산대사의 진영을 배관한 후의 감회를 나타낸 ‘서산대사 진영을 보다가 서산대사 시를 차운하다(觀西山大師影 仍次西山大師韻)’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관음전 오른 쪽에 청허실이라(觀音殿右淸虛室)
학 같은 서산의 진영에 학이 서있는 듯
(遺像西山鶴立鷄)
천겁이 지나도 묘향은 무너지지 않음을 알았으니
(千劫?香知不壞)
서산대사의 명성은 응당 산과 같으리
(師名應復與山齊)
- <풍고집(楓皐集)> 권 5

아마 그가 본 서산대사의 진영은 묘향산에 있었던 듯하다. 이는 그가 “천겁이 지나도 묘향은 무너지지 않음을 알았으니(千劫?香知不壞)”라고 한 대목에서 알 수 있으며 묘향산 관음전에 서산대사의 진영을 모신 곳을 ‘청허실(淸虛室)’이라 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높은 수행력을 지닌 ‘서산대사의 명성은 응당 산과 같으리(師名應復與山齊)’라고 한 대목이 돋보인다. 한편 그가 머물던 산방도 산사처럼 맑고 고요했던 것일까. 선미(禪味)적인 요소와 정서를 드러낸 그의 ‘산방(山房)’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산방은 산사와 같아(山房似山寺)
좁은 길엔 구름이 언덕을 이뤘네(仄徑到雲巒)
문 앞의 소나무들 고요한데(門對千松靜)
한 줄기 맑은 물이 사립문을 감돌아 흐르누나
(籬廻一水寒)
시름겨운 마음으로 홀로 앉아 있으니
(秋情思獨坐)
멀리 볼만한 건 저녁노을이라(殘照耐遙看)
가장 좋아하는 그윽한 곳에는(最愛通幽處)
고운 서릿발이 넓게 펼쳐졌네(霜花數畝寬)
- <풍고집(楓皐集)>권 3

▲ 풍고 김조순의 영정. 그는 노론의 핵심인물인 정치가였으며, 시문에도 능한 문장가였다.
그가 머문 산방 길은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위치했던 그의 단풍나무를 심었던 거처 주변의 초암일 것이라 짐작된다. 그러므로 산사처럼 좁은 길에 구름언덕이 생겼을 터이다. 더구나 선승이 머무는 곳처럼 문 밖엔 소나무 우거져 더욱 적력(寂歷)한 선미(禪味)를 드러내고 사립문 앞에 흐르는 산골 물소리, 맑디맑은 풍경을 그려냈다. 홀로 앉아 시름겨워하는 그의 심회는 멀리에서도 볼만한 저녁노을에서 장엄한 함축미를 담아냈다.
이처럼 문재(文才)가 뛰어났던 그는 ‘영원암의 치감 스님에게 주고 아울러 선을 드러내다(贈靈源菴致鑑上人 兼示諸禪)’에도 극명히 드러난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산 중턱에 한 암자를 새로 얽었지만 (山半孤菴結?新)
한가롭게 올라가지만 멀리서 놀러온 사람은 드무네(登臨閒殺遠遊人)
장엄한 풍경, 하늘을 향해 드러나고 (莊嚴逈露諸天相)
소쇄함은 속진을 뛰어 넘었네(蕭灑超離下界塵)
나란히 늘어선 잣나무 뜰, 다시 견성하고 (栢樹參庭還見性)
포단에 앉아 신과 통할 만하네(蒲團一坐可通神)
어떻게 많은 업을 탈각하는가 하면 (云何脫却多生業)
이곳에서 명을 피하고 또 참을 기르라 하겠네 (此地逃名又養眞)
-<풍고집(楓皐集)> 권5

영원암은 금강산에 있던 절로 치감 스님이 수행하던 암자이다. 이곳을 찾았던 풍고는 일없이 한가한 암자의 모습을 “장엄한 풍경, 하늘을 향해 드러나고(莊嚴逈露諸天相)/ 소쇄함은 속진을 뛰어 넘었네(蕭灑超離下界塵)”라고 읊었다. 더구나 견성(見性)은 잣나무 늘어선 뜰이라 하였으니 이는 조주선사의 “뜰 앞에 잣나무”를 말하는 듯하다. 이처럼 그는 화두의 한 소식도 알고 있었던 선비였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가 “어떻게 많은 업을 탈각하는가 하면(云何脫却多生業)/ 이곳에서 명을 피하고 또 참을 기르라 하겠네(此地逃名又養眞)”라고 하는 대목에서 일단의 묘처(妙處)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그는 불교에 밝았던 인물이었다.

그가 ‘산으로 돌아가는 원명 스님을 전송하며(送圓明上人還山)’를 위해 쓴 시에는 “강월 스님, 말을 나누다가(施言江月釋)/기림을 수호하려 돌아갔네(歸去守祗林)/ 속세에서 서로 사귀는 일을 끊었으니(却斷和光事)/거듭 발원하는 마음 일어나네(重思發願心)/대장경은 오히려 술지게미를 빠는 것일 뿐(大藏猶?粕)/초조(달마)는 맹렬이 침을 비비네(初祖猛?針)/약해지고 상실된 나의 도, 부끄러워(弱喪?吾道)/이리저리 헤매느라 흰머리가 되었네(彷徨白首臨)”라고 노래했다.

일찍이 초의는 1830년 두 번째 상경에서 그의 아들 황산 김유근(黃山 金根)과 창수(唱酬)한 시를 지은 바가 있고, 추사도 풍고와 깊이 교유했다는 사실에서 초의도 그를 만났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 또한 차를 즐긴 인물일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이러한 정황을 밝힌 문헌이 드러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연경을 다녀온 인사였다는 점에서도 그 개연성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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