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승가대 명예교수 종범 스님

부처님의 입멸을 앞두고 아난존자는 부처님에게 앞으로 무엇에 의지해 고해를 헤쳐 나가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할 것(自燈明 法燈明)’을 당부했다. 이처럼 깨달음에 대해 중앙승가대 명예교수 종범 스님은 11일 방영된 불교TV 무상사 일요초청법회에서 마음을 그쳐 깨닫고자 하는 마음까지 사라져 원견(圓見)을 이루면 그 이전의 망견(妄見)과 조견(照見)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깨달음은 무엇이고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종범 스님의 법문을 정리했다. 정리=윤호섭 기자

▲ 종범 스님은… 1963년 통도사에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69년 통도사 강원 강주, 1980년 중앙승가대 강사ㆍ조계종 상임포교사, 1985년 중앙승가대 불교학과 교수, 1991년 한국불교학회 이사ㆍ행원문화재단 이사, 1994년 조계종 개혁의회 의원, 1995년 조계종 교육원 교재편찬위원장, 1996년 삼보법회 교양대학장, 2000년 중앙승가대 총장ㆍ제5대 승가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깨달음, 하는 것·아는 것과 달라
생각함이 아닌 그치는 데 집중해야
경계에 오직 뿐인 걸 알 수 있어
지혜 얻으면 마음·경계 사라진다

오늘 법문은 깨달음 이야기를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깨달음을 깨달을 오(), 증득할 증()자를 써서 오증이라고 하는데 이 내용을 비유한 것이 바로 오증비유입니다. 이 오증이라고 하는 깨달음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나 무엇을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인류는 불안을 물리치고 만족을 얻기 위해서 늘 하는 것아는 것을 해왔는데요, 깨달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많이 한 사람중에 굳이 한 명 꼽자면 진시황이 있고, ‘많이 안 사람중에 한 명을 꼽자면 사마천이 있습니다. 근데 이게 많이 하고 많이 아는데서 만족이나 평화가 오진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무상하고 허망해서 그렇습니다. 그동안 했던 것이 다 무상하고, 안 것이 다 허망합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 알았던 게 어디로 갔는지 허망하게 다 없어졌다고 느끼곤 하죠. 그래서 많이 하고, 많이 아는 것이 무상 속에, 그리고 부질없는 속에 견디질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하는 것으로도, 아는 것으로도 만족을 못 얻어요. 하지만 석가모니는 하고 아는 데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깨달음을 얻었어요.

깨달음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는 것과 아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깨달음을 말할 때 아는 걸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깨달음이 아주 특이한 겁니다.

그럼 깨달음이 무엇인가. 첫째는 자정자기(自淨自己, 스스로 본인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깨끗하게 하는 거예요. 색수상행식이 곧 자기인데 이것을 집중하고 연마하는 게 아니라 그 생각 자체를 깨끗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정기심(自淨己心자정기신(自淨己身) 하는 거죠.

생각이 앞을 가리면 깨달음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 비우는 것을 그칠 정()이라고 합니다. 생각을 자꾸 쫓아가는 게 아니라 멈추는 것이죠. 다른 것들은 생각을 움직여야 하는데 깨달음은 멈춰야 합니다. 그래서 아는 길하고 깨닫는 길하고는 전혀 달라요. 한 생각이라도 헛된 생각이 남아 있으면 그게 자기를 가려서 깨달음이 안 옵니다. 근데 알고 하는 것에 습관이 배서 아는 것을 그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습관 때문에 어려운 거지 깨닫는 것 자체에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둘째는 자견자기(自見自己, 스스로를 보는 것)입니다. 봄이 왔는지 오지 않았는지는 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자기 자신을 보는 겁니다. 우리는 으레 딱 보이면 의심이 없어지잖아요.

셋째는 자용자기(自用自己)입니다. 견성한 도인들이 하루 종일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곤 하죠. 그분들이 뭘 하고 있는 걸까요? 눈앞에 펼쳐진 것들을 그대로 수용하는 일, 앉으면 앉은 대로, 서면 선 대로, 보면 보는 대로 수용하는 게 자용자기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하는 것이나 아는 것으로 되는 게 아니라 자정자기·자견자기·자용자기로 이뤄집니다. 깨달음은 허망한 게 아닙니다. 하는 것과 아는 것처럼 허망한대로 돌아가거나 하지 않습니다. 하고, 아는 것이 허망해요. 조금 지나버리면 쓰지 못하기 때문에요. 그러니 젊었을 때 알게 된 지식을 내세우면 안 됩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새로운 걸 배우려고 노력해야죠.

깨달음은 어떨까요? 많은 선지식들이 깨달음의 경지를 이렇게 표현하곤 합니다.

염라대왕이 찾아와서 저승길을 재촉하면 이미 나는 이미 무량수님, 무량광님그 몸이라 말하노라, 그 몸이라 말하노라.

염라대왕은 생멸·생사를 주관하는 왕이에요. 삶과 죽음이 없으면 염라대왕이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 염라대왕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문제될 게 없다는 겁니다. 어둠이 없는 아미타불과 같아 삶과 죽음이 문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게 깨달음입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데 아무 영향 받을 필요가 없죠. 이런 게 선지식들이 전한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하는 것, 아는 것과는 달리 자기를 맑히고, 자기를 보고, 자기를 쓰는 게 깨달음입니다. 생각을 비워야지 일으켜서는 안 돼요. 하지만 습관 때문에 다른 건 다 아는데 깨달음을 모르는 겁니다. 천지만물을 다 알고, 세상 모든 것을 다 했는데도 중요한 한 가지를 모르는 거죠. 무언가를 아는 나는 누구이고, 여러 가지를 한 나는 누구인가. 그걸 모르는 거예요. 수만 권 책을 지으면 아는 게 얼마나 많겠어요? 그런데 그 많은 책을 지은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이런 엉터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이 그렇게 어리석어요. 다른 건 다 보고 아는데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모른다면 한계를 많이 느끼게 됩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니 틀렸다는 생각도 들겠죠. 그렇게 똑똑하지만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건 창피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장자> 외편의 추수(秋水)정와불가이어어해(井蛙不可以語於海) 하충불가이어어빙(夏蟲不可以語於氷)’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를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여름만 사는 벌레에게 얼음에 대해 말해주어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개구리가 우물 안에만 있는데 바다를 알 리가 없죠. 여름철 벌레 또한 얼음을 모를 테고요. 이것은 장자가 앎에 대한 한계를 그대로 얘기한 겁니다. 그만큼 인간이 아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에요. 그 아는 것도 세월 지나가면 소용없어져 무상하고 허망하게 돼요.

그런 면에서 보면 부처님은 아는 것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참 영리한 분이에요. 얄미울 정도로 영리하죠.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모르고 헤매는 게 많을까요?

우리가 보는 것에는 가장 먼저 몽식(夢識)이 있습니다. 꿈에 보는 것을 말하죠. 이를 몽식경계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은 의식(意識)입니다. 생각으로 보는 것이죠. 그래서 의식경계라고 부르고요. 그리고 몽식과 의식에서 더 깊이 들어간 영식(靈識)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아는 겁니다.

이 중에서 몽식은 망견(妄見)이에요. 허망하게 보는 것이고, 잘못 보는 것입니다. (찻잔 받침을 들어보이며) 이걸 폭탄으로 볼 수도 있어요. 물론 그릇으로 볼 수도 있고, 흙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근데 폭탄으로 보면 망견인 거죠. 온전한 걸 온전하게 보는 것이 망견이고, 망견에서 더 깊이 보는 것이 조견(照見)입니다. 조견을 해야 이 몸이 불생불멸임을 알아요. 그냥 망견으로만 보면 생로병사밖에 모르는 거예요. 하지만 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다고 보면 조견입니다.

이걸 넘어 생로병사도 아니고, 불생불멸도 아니고 그냥 그대로 청정진여(淸淨眞如,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하면 괴로움이 소멸돼 열반에 이른다는 진리)에 따라 법계에 있다는 걸 보는 것을 원견(圓見)이라고 합니다. 원견에 도달하는 것이 깨달음이거든요. 원견에 가려면 망견에 머물러 있어선 안 되겠죠? 먼저 조견을 해야 해요. 조견이 깨달음에 들어가는 시작입니다. 수행에 드는 것이죠. 그러다 원견에 들어가게 되면 생로병사를 보던 망견도, 불생불멸을 보던 조견도 없어지고 원견만 남습니다.

그래서 필경에는 불중생(佛衆生)이 없다고 말합니다. ()은 깨달은 분이고 중생은 못 깨달은 분인데 마지막에는 무불급중생(無佛及衆生)이라는 거죠. 맨날 축원할 때 하는 거예요. 이게 필경에는 일체만물이 법계대용(法界大用), 즉 큰 작용 하나뿐인 겁니다. 그게 원견의 세계입니다. 원각대용(圓覺大用)이라고도 하는데, 그럼 원견이 어떻게 이뤄질까요?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지만 장자의 나비의 꿈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몽위호접(夢爲胡蝶) 인몽화접여(人夢化蝶歟) 접몽화인여(蝶夢化人歟)

꿈에 나비가 됐는데 이것이 사람으로서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로서 꿈에 사람이 된 것인지를 생각한 겁니다. 인간의 아는 것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있었던 거예요. ‘꿈에 나비가 됐더라하고 말면 의미가 없습니다. 근데 지금 이 한평생이라는 게 꿈인지 뭔지 모르겠다는 거죠. 아주 근원적인 걸 들여다본 겁니다. 더 나아가면 가만 보니 사람 꿈인 줄도 알고, 나비 꿈인 줄도 아는 생각하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도, 나비도 아니죠. 즉 미상인 미상접(未狀人 未狀蝶), 일찍이 사람도 아니고 나비도 아니라는 것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꿈을 꾸기도 하고 깨기도 하지만 꿈도 아니고 깨는 것도 아니더라.’ 능몽능오(能夢能悟)라고 하는데 비몽비오(非夢非悟). 이것이 앞서 얘기한 영식이고, 원각이고, 원견입니다. 다만 망견 때문에 그걸 모르는 겁니다.

마음을 딱 그쳐서 집중하면 마음이 맑아지고, 밝아지면 보여요. 그걸 도통이라고 합니다. 안 그쳐서 안 맑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선정을 닦아야 한다고 하죠. ‘도대체 왜 무()라고 했을까고민합니다. 그치는 건 방법만 다를 뿐이지 안 그치고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안 그치면 아는 대로, 하는 대로 갈 수밖에 없거든요. 그럼 못 깨달아요. 그친 마음으로부터 지혜가 나오는데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정법생혜(定法生慧)라고도 합니다.

깨달음을 비유할 때 환호환 탄환사(幻虎還 呑幻師)’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서 환호는 마술로 만들어낸 호랑이를, 환사는 그 호랑이를 만들어낸 마술사를 뜻합니다. 즉 자기가 만들어낸 것에 의해 스스로 잡아먹혔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만들어낸 가짜가 진짜인 것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처음에 마음을 어딘가에 집중하죠. 집중하면 경계는 오직 식()뿐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첫 번째 밝아진 증거예요. 그리고 그 경계는 내 의식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오직 식밖에 없구나하는 지혜를 유식지(有識知)라고 합니다. 유식지가 이뤄지면 경계가 공함을 알기 때문에 의식이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본래 본식까지 없어져요. 깨닫고자 하는 마음까지 사라져서 완전히 원각대지가 나타나는 거예요.

그런 법문도 있습니다. 무량수님을 직접 보는 게 친견미타인데 친견미타는 빙상연화라는 겁니다. 즉 빙판 위에 장작불을 태우는 거예요. 그럼 불이 타지 않겠습니까? 불이 맹렬하면 얼음이 녹아요. 어떤 결과가 올까요? 불이 꺼지겠죠? 처음에는 불이 있고 얼음도 있었는데, 결국 얼음도 녹고 불도 꺼집니다. 다른 비유로 양목상계가 있습니다. 두 나무를 서로 비비면 불이 일어나지만 결국 두 나무는 모두 타버리고 없습니다. 마음과 경계가 끊어져 지혜가 생기면 이전에 있던 마음과 경계는 사라집니다. 즉 법계대용의 깨달음을 아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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