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포교원 연구실장 법상 스님

인간을 비롯한 생명은 모두 나고 죽는다. 만남과 이별이 불가분의 관계이듯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뒤따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혹시 모를 고통이나 삶에 대한 집착 등으로 인해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에 부처님께서는 현재를 살라고 설했다. 화엄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일체유심조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조계종 포교원 연구실장 법상 스님은 구랍 25일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미타재일법회에서 그대, 죽음이 두려운가라는 주제로 법문했다. 스님은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도 삶의 일부이며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리=윤호섭 기자

▲ 법상 스님은… 1984년 범어사 강원을 졸업, 동국대에서 철학박사를 취득하고 조계종 교육원 교육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조계종 포교원 연구실장과 교육원 교육아사리 소임 외 동국대와 중앙승가대 강사로 활동 중이다.

탄생 없는 죽음은 없다
각자의 집착 내려놓고
나를 비우려 노력해야

죽음도 삶의 일부다
오늘은 우리와 첨예하게 와 닿는 내용으로 설법을 드리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 제목은 그대, 죽음이 두려운가?’입니다.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선 합장하고 따라 해보세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삶에 있어서 태어남이 있다면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도 삶의 일부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로 태어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반면 죽음과 관련된 것은 싫어하기 마련이죠. 아마도 죽는 것을 좋아하는 분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 그것도 삶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삶의 일부라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늘 현재를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현재를 살고 계십니까?

현재를 살고 계신 분들은 참 행복한 겁니다. 그런데 가만히 주변에 귀 기울이보면 사람들이 과연 현재를 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우리가 주로 나누는 얘기를 예로 들어봅시다. “나는 과거에 어땠고 뭘 했다거나 소싯적에 잘나갔다등등 옛 이야기가 많습니다. 단순히 아련한 추억을 되새기며 잠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추억에 빠져 현재를 후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과거뿐만 아니라 또 미래를 생각합니다.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처럼 말이죠. 이건 어쩌면 남은 삶을 잘 살겠다는 각오이기도 하지만 절망을 느끼면서 살게 하는 병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앞서 말씀드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영향을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현세에 가장 충실하며 잘 사는 것일까요? 바로 뉘우침이 없는 삶, 후회 없는 삶을 살았을 때 비로소 만족할 삶이 되고, 그 만족한 삶은 곧 행복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이죠. 그러니 두려움을 없애려면 현재를 잘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럼 현재를 잘 사는 방법이 뭘까요?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배워서 알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스님들에게 지극한 믿음을 내고, 또 배운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살면 죽음이 닥쳤을 때 두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대집경에 보면 수명이라는 게 있고, 그 다음에 수명과 함께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온기(溫氣)라고 합니다. 우주에는 무한에너지가 흐르고 있는데, 그 무한에너지와 공명하는 방법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며 아미타부처님과 공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부처님은 지혜의 생명으로서 태양에너지와 같기 때문이고 그 태양에너지는 온기를 품고 있습니다.

사람은 대개 그렇죠. 아무것도 이루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이 되겠다고 마음을 내죠. ‘부자가 되겠다또는 명예를 얻겠다등등 각각의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그 부·명예·권력 등 소망을 이루고 나서 그 다음 뭘 얻고 싶어 할까요? 바로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입니다.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무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걸 얻게 하는 방법이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을 자기화하는 방법이기도 하죠. 물론 이것은 육신의 영원함을 얘기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현재를 살고 미래를 무한 생명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극락세계의 자기화다이 말입니다. 그래서 현재를 살라는 것은 우리들이 일체 공을 체득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일체중생은 공과 함께 삽니다. 그걸 다른 말로 진여라고 해요. 그래서 진여와 함께 산다고 하는데 그것은 청정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 청정한 마음의 주인공은 내가 돼야 합니다. 그러려면 찰나에 변하는 나에게 집착하지 말고, 놓아버려 무아(無我)가 돼야 합니다. 그러면 무한생명력을 얻게 되고, 그것은 곧 불성의 발현으로 이어집니다. 불성의 발현은 뭘까요?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겁니다. 누구나 다 불성을 갖고 계시죠? 아미타부처님과 같은 지혜의 생명을 무한에너지 생명으로 바꿔서 현실에 옮기는 작업이 이뤄지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 되는 것이고요.

이 우주는 무한한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는데 우주와 나라는 존재를 가만히 숙고해보면 도대체 무엇에 의해서 내가 존재하고 유지되는지 궁금해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몸과 마음을 갖고 태어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나올 때 어떻게 나올까요? 바로 어떤 생이 죽었기 때문에 태어나는 겁니다.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없죠. 곡식도 새로운 씨앗을 얻기 위해 한 해가 저물어 결실을 남기고 가잖아요. 그렇듯 죽음은 태어났기 때문에 오는 겁니다.

내가 있는 곳이 곧 극락
우리는 무언가를 갖기 위해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애착 때문에 스스로 좋고 나쁨을 정합니다. 싫은 게 있다면 내칠 것이고요. 애착은 어떤 접촉에 의해 옵니다. 접촉은 우리가 갖고 있는 육근(六根)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눈으로 보는 것[귀로 듣는 것[코로 냄새 맡는 것[입으로 맛보는 것[몸으로 감촉하는 것[머리로 생각하는 것[]들이 그것입니다. 즉 육근이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의 경계를 뜻합니다.

여기에 대응하는 인식 대상이 육경(六境)입니다. 눈으로 형상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입으로 맛을 보고[],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근이 육경에 접촉하게 되고, 그 접촉은 곧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이 같은 과정에 의해 형성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업을 지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그리고 업은 신구의(身口意) 삼업으로 짓는다고 하죠. 살생·투도·음행·양설·탐욕 등등 말입니다. 업은 무명에 의해 짓게 되는데 어쩌면 우리는 무명의 업력에 의해 태어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이 그렇게 돌아가듯이 우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고요.

우주는 균형을 맞추기 위한 힘을 자연현상을 통해 드러내고, 우리 인생도 균형을 맞춰 조화롭게 잘 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처럼 업력을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팔식(八識)이 그것입니다. 안이비설신식을 지칭하는 전오식(前五識)과 전오식으로 보거나 만질 수 없는 육식(六識)인 의식(意識)이 있습니다. 또 자기중심적 자아의식을 뜻하는 칠식(七識)인 말나식, 이것들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팔식(八識) 아뢰야식이 있습니다. 아뢰야식은 모든 업의 산물을 저장하는 능장(能藏)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 기능이 다음 생을 결정하는 요인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생에 부처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내서 잘 성숙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우주 DNA를 갖고 있다는 것도 이 같은 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들을 따라 끝없이 대를 올라가다 보면 전부 하나가 됩니다. 너와 내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최초의 생명으로부터 연결된다는 것이죠. 고로 우리는 지구 역사와, 우주 역사와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냥 형제라는 것이 아니고, 우주와 내가 본래 하나라는 겁니다.

우주와 우리는 마찬가지로 지수화풍공식(地水火風空識, 모든 만물이 생겨나는 6가지 원소)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의식에는 앞서 말씀드린 팔식이 있고 이것이 종자가 됩니다. 종자가 되어 인연을 만나면 각각 다르게 이끌어 갑니다. 그게 바로 과거로부터 내려온 인연이 만나서 부부가 되고 자식을 낳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연은 더더욱 소중하고 값진 것이죠. 무한한 중중무진 법계에서 그만큼 소중한 인연은 또 없을 겁니다.

우리 인생은 진업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은 생명력과 온기, 식이 합쳐져 이뤄지는데 죽을 때 이 중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가는 것이 생명력입니다. 그 다음이 온기고요. 온기가 빠져나갈 때 사람은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고 합니다. 그 고통을 줄여주는 방법이 앞서 얘기한 아미타부처님의 자기화, 즉 아미타불 염불입니다. 죽음도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죽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때 가서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기 때문이죠.

염불을 해서 온기가 정수리로 빠져나가면 극락에 간다고 합니다. 즉 부처가 되는 것이죠. 눈으로 빠져나가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고요. 그리고 심장으로 빠져나가면 오계를 잘 지킨 것으로 봐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배로 빠져나가면 아귀, 무릎으로 빠져나가면 축생, 마지막으로 발바닥으로 빠져나가면 지옥이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항상 밝은 얼굴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사실 극락은 저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 태어날 때부터 평화롭고 행복한 존재였으니까요. 하지만 살아가면서 때가 묻어버린 겁니다. 처음 물건을 만들었을 때는 무척 깨끗하지만 사용하다보면 더러워지기 마련이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하얀 때도 때라고, 더러운 것만이 때는 아니긴 합니다만 우리는 일체중생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함께 사는 우리가 되려면 모든 이들에게 자비의 에너지를 보내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이 그 시작이고요.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이걸 느끼기 어렵습니다. 근데 여러분이 계속 염불을 한다면 부처님을 뵐 수 있습니다. 지금 결제기간이죠? 이 기간만이라도 열심히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하면 자신에게서 광명이 쏟아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을 견불단계라고 합니다. 이 단계를 불퇴진 단계라고도 하는데 아미타부처님의 위신력을 믿고 물러나지 않는 단계에 이른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자기 본성을 봤다고 해서 견성이라고 합니다. 즉 나와 아미타부처님이 본질상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본래 마음이란 불생불멸합니다. 염불하면서 나를 텅 비우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나를 비우는 것을 아공(我空), 나를 이루고 있는 존재까지 비우는 것을 법공(法空), 비웠다는 생각까지도 비우는 것을 구공(俱空)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면서 느낄 수 있습니다.

불성은 천지가 씨앗되기 전에도 있었고, 설사 우주가 무너지고 허공이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사라지거나 죽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불성을 발현하고 사는 것이 참된 불자입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있는 법당이 극락이고,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집이 극락입니다. 현재에 집중하며 살면 죽어서도 극락이 될 것입니다.

 

탄생 없는 죽음은 없다
각자의 집착 내려놓고
나를 비우려 노력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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