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미소원 장유정 이사장

장유정 미소원 이사장은 … 1983년 설립한 비영리 봉사단체 자비원 봉사회 후원회 회장을 맡아 불교 나눔 활동에 동참했다. 2011년 11월 미소원을 개원하고 현재 부산 오륜소년원 멘토링 사업, 법무부 부산 구치소 재소자 교화, 결핵환자 살리기, 제3세계 우물 파기, 독거어르신 및 만성질환자 반찬봉사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4년 법무부 장관상, 2009년 보건 복지부 장관상, 2012년 대한민국 국민나눔대상 복지부장관상, 2014년 부산시 자원봉사 금배지 대상 등을 수상했다.
단칸방 가족, 타인 돕기 보며 발심
옷가게 판매 수익 일부, 기부 시작
주변 설득해 ‘자비의 종소리’ 결성
30년 동안 500여 명 나눔실천 이끌어

2011년 미소원 개원, 전문상담 진행
“봉사 함께하는 도반 있어 행복해요”

향후 5년간 미소원 차기 구성원 모집
도반 자녀 모아 청년회 구성·훈련도
“전법활동·인재불사에 박차 가할 터”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터전이 된 부산의 곳곳에는 한국인의 삶 속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부산의 3대 재래시장인 진시장, 평화시장, 자유시장은 전쟁 후 억척스럽게 살아갔던 흔적이 남아있다. 범일동에 모여 있는 3대 시장은 하루 벌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상인들의 희망이었고,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들의 직장이었으며, 남편을 잃은 미망인들의 집이었다.

1970년 후반, 3대 시장에서 소외계층들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 있다. 바로 미소원 이사장 장유정 불자(60)다. 처음 그녀가 내민 손은 빈손이었다. 그녀는 후원을 한 것이 아니라 후원을 받으러 다녔다. 시장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1000원씩 후원금을 받아 자신들 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을 돌아봤다. 어려울수록 실천한 나눔 활동이 삶의 원동력이 되고 진정한 노동의 가치를 발견할 것이란 지론에서 였다. 나눔의 개미군단이라고 불리는 3대시장 상인들을 이끈 장유정 이사장을 구랍 23일 미소원 법당에서 만났다.

2015년 12월 24일 성탄절 기념 반찬봉사에 나서는 장유정 이사장(사진 오른쪽 첫번째)
나눔은 살아가는 힘
장유정 이사장의 어릴 적 삶은 너무나 고단했다. 6남매 중 첫째인 장 이사장은 1972년 중학교 3학년 때 16세의 나이로  가정을 돌보기 시작했다. 몸이 편치 않았던 아버지를 간호하는 어머니를 대신해서였다. 장 이사장은 20살에는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시장으로 나서야 했다. 희생이란 단어를 떠올릴 시간도 없이 억척스럽게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견뎠다. 25세가 되어 드디어 가게를 열고 자리를 잡아가며 동생들을 공부시켰다.
장 이사장은 나눔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우연히 들은 방송 ‘홈런 출발 김동엽’이란 방송 사연 때문이라고 했다. 6·25이후 단칸방에 살던 한 가족이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눔을 실천 한 사연을 듣고 가슴이 하루 종일 두근거렸다고 했다.

“단칸방에 살면서 자녀들이 공부방이 없다고 투덜거리자 사과 상자 박스를 가져와 용돈이 생길 때마다 그 박스에 넣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어렵게 자란 자녀들은 그 박스에 돈을 넣을 때마다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해요.”

당시 시장에서 옷을 팔던 장 이사장은 아침 첫 판매의 수익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했다. 그리고 이후에는 하루 매상의 10분의 1을 기부하며 액수를 늘려갔다. 그렇게 매일 기부활동을 하다 보니 혼자서 하기 보다는 주위에 있는 도반들과 함께 했으면 했다. 그 후 장 이사장은 시장을 돌며 그동안 쌓은 인연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장에서 자비의 종소리 라는 후원단체를 결성해 기부금을 모아 후원을 하던 중 부산 미룡사 정각 스님이 운영하는 자비원 봉사회를 알게 됐어요. 그 때는 불교계에 봉사단체가 많지 않았던 시기여서 너무나 신선했죠.”

자비원을 방문 했을 당시 그곳의 환경은 열악했다. 도움을 손길을 바라는 곳은 너무나 많았다.   자비원에서 진행하는 활동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후원을 자처했다.

고아들이 머물던 성우원, 재활원, 양로원 곳곳을 다니며 후원 활동을 자비원과 함께 펼치던 장 이사장은 1985년 자비원 봉사회 후원회 회장을 맡아 3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하며 지원을 하게 된다.

2012년 10월 국립마산병원 위문활동
자비의 종소리, 곳곳에 자비 온정으로
장유정 이사장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자비원 후원회는 매달 1000원에서 2000원 그리고 5000원, 10000원씩 시대에 따라 금액도 점차 늘려갔고 회원도 500여명에 이르게 됐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들은 실명 위기의 환자를 후원하고 국립마산결핵병원을 방문해 가족이 없는 환우를 위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소년소녀가장을 위한 장학금 지급, 독거어르신 반찬지원 등 활동도 펼쳤다. 또 정토회와 연계해 인도 결핵 환자 치료에도 나섰다.

“4년에 걸쳐 인도 결핵환자 108명을 살렸습니다. 그 때 당시 우리나라 돈 15만원이면 그들을 구할 수가 있었어요. 그 후 3년 만에 다시 108명을 살렸고 지난해 3차로 108명을 살렸습니다.” 총 324명이였다.

그들의 후원활동은 단순히 모금에서 그치지 않았다. 장애인을 위한 컴퓨터 구입에 회원들은 자신들이 판매하던 물건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의류, 미역, 신발, 양말 등 각종 물건들이 바자회에 나왔다.

“장애인들은 밖에 외출하기도 힘들잖아요. 하지만 컴퓨터라도 있으면 언제든지 소통이 가능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매년 장애인 시설에 컴퓨터를 넣어주기 위해 바자회를 열고 있습니다.”

자비원 후원모금 활동과 함께 장 이사장은 봉축일마다 ‘조방연등회’를 결성하고 범일동 곳곳을 연등으로 가득 채우고 법회를 열었다. 당시 성우원 어린이들의 합주회 및 다양한 신행활동을 이끌기도 했다. 3대 시장은 연등이 화려하게 걸려 지역의 자랑으로 자리 잡았으며 봉축일 때는 시장 상인들이 종교에 상관없이 모두 부처님 오신 날을 함께 축하하며 축제를 즐기고 있다.

도반의 인연이 남편 잃은 슬픔 달래
이런 도반들의 인연은 장 이사장의 개인적인 아픔도 치유했다. 장 이사장은 6남매의 뒷바라지를 하던 1979년 결혼을 했다.

“남편이 좀 몸이 약하고 천식이 있었어요. 하지만 사업도 하며 아이들도 낳고 잘 키우고 살았는데 그렇게 갑작스럽게 떠날지는 저도 몰랐습니다.”

1994년 7월이었다. 잠을 자고 있던 남편은 아침이 늦도록 일어나지 못했다. 장 이사장은 준비도 생각도 못했다고 했다. 39세의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장 이사장은 매일 밤, 일을 끝내고 나면 남편을 묻은 통도사 삼덕공원묘지를 찾았다. 그녀는 밤마다 남편의 무덤 앞에서 108배를 하고 금강경을 읽었다. 새벽 두시 까지  기도를 올리며 49일을 보냈다.

“그 때 도반들이 제 옆에 있었어요. 저에게 1000원씩 주머니를 털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달라며 매일 마수(하루 장사 시작 후 첫 수입)를 내밀고 하던 그들이 제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장 이사장의 오랜 나눔 활동으로 시장에서 만난 인연들은 도반이 되었고 그 사람들은 그녀를 위로했다.
“그 사람들이 있어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내준 용기와 격려는 제가 살아갈 힘이 되었습니다. 나눔을 실천하니 어느새 제 주변에는 따뜻한 사람들만 있더군요. 인덕이 있다는 말을 평상시에 자주 듣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이해했습니다. 제가 나눔을 실천하자며 그들에게 기부금을 요구했을 때 함께 뜻을 하는 사람들이 제 주변에 모여들고 남아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품고 어떤 의지를 가지고 사는가에 따라 제 인생의 모습과 환경은 모두 그 조건에 맞춰 바뀌어있는 것이죠.”

미소원 독거어르신 장수기원 사진촬영 행사 모습.
미소원 개원, 신행과 봉사를 하나로
2011년 11월 11일, 부산을 대표하는 세 시장의 한가운데 미소원이 개원을 했다. 관세음보살님을 모신 그곳에 이사장과 평생을 함께한 도반들이 모였다.

“40대였던 그분들이 이제는 70대가 됐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그분들은 함께하며 봉사하시고 마음을 내어주십니다. 이곳 미소원은 그분들이 주인이며 그분들이 쉬는 곳이며 그분들의 안식처입니다.”
장 이사장은 그분들을 위해 평생을 함께 기도할 도반으로 봉사하고 살아가기 위해 미소원의 문을 열었다고 했다.

장 이사장은 법당을 개원하던 당시 도반들이 1000일 동안 기도를 하며 회비를 모았던 것을 회상했다.

“한 달에 10만원, 혹은 5만원, 하루에 천원 등 각 자신의 상황과 조건에 맞게 팀을 구성해 자발적으로 기도를 하고 법당을 위해 마음을 모았습니다. 한번은 폐지를 주워 모으시던 할머니가 법당을 차린다는 소문을 듣고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돈 2만원을 내고 가신 일도 있었어요. 이 정성들을 모았으니 더욱 열심히 회향 할 일만 남았죠.”

개원 이후 미소원은 그동안 진행한 나눔 활동을 쉬지 않았다. 신심으로 어우러진 봉사의 마음에 전문성까지 갖추기 시작했다. 장 이사장은 2004년부터 준비한 사회복지사 공부에 상담공부까지 마쳤다. 이후 장 이사장은 전문 상담가로 나서고 있다.

또한 미소원에 있는 도반들도 함께 심리상담 전문가 과정을 이수하고 현재 25명의 회원들이 구치소에 있는 재소자, 소년원, 어르신들을 위한 정서지원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결손가정 돕기, 제3세계 우물 파기, 한국JTS 북한 돕기, 말기암 환자 전화상담, 요양병원 목욕봉사, 무료 돋보기 행사, 변기 교체, 연료비 지원, 군부대 후원, 다문화 가정 자격증 취득 후원 까지 미소원의 활동과 손길은 끝이 없다. 특히 매주 목요일 독거 어르신 및 만성 질환자를 위한 반찬 봉사는 위생, 건강, 정성까지 소문이 자자하다.

2015년 10월 부산구치소 교정 70주년 행사에서 표창장을 수여받는 장유정 이사장(사진 오른쪽 두번째). 장 이사장은 구치소에서 정서지원 상담도 진행한다.
전법과 인재불사를 위해 나아갈 것
“앞으로 미소원은 지금까지 해온 일을 잊지 않고 이것을 바탕으로 나아 갈 것입니다. 지금 우리 도반들은 집에 결혼, 칠순 등 잔치가 있거나 차를 사거나 집을 사거나 하면 자연스럽게 나눔으로 회향을 합니다. 그들은 모두 나눔이 생활화가 되었습니다. 또한 삶의 이유를 나눔과 봉사에서 찾았다고 입을 모읍니다. 저도 이분들 덕분에 삶의 힘을 찾는 것이구요.”

장 이사장은 앞으로 미소원의 활동을 바탕으로 전법 활동과 인재 불사에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요즘 들어 더욱 실감합니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병원에 누워 있는 아픈 사람도 부처님의 법을 들을 수 있더군요. 방송과 신문의 힘이 굉장하니 말이에요. 어디서나 티비와 핸드폰, 신문을 접할 수 있잖아요. 불교를 전할 수 있도록 그들을 후원하고 지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장 이사장은 앞으로 5년 동안 미소원을 이끌어 갈 차기 세대를 위한 구성원 모집 및 훈련을 강화 할 것이라고 했다.

“지금 미소원에 있는 구성원들이 각 팀을 구성해 그 역할을 너무나 잘하고 있습니다. 그 자녀들을 모아 청년회를 구성하고 이 미소원을 이끌어 갈수 있도록 훈련 할 계획입니다.”

장 이사장을 만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졌다. 동지를 지내고 하루 정도 지나서일까 어둠은 일찍 찾아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법당으로 누군가 들어와 부처님께 절을 올린다. 현재 미소원에서 매주 목요일 마다 어르신들을 위해 공양을 준비하고 있는 김화숙 팀장이라고 했다. 장 이사장은 바로 그녀를 불러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둘의 눈빛은 신뢰와 따뜻함 그리고 오래된 친구 사이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가득하다.

장유정 이사장을 바라보며 김화숙 팀장은 말한다. “미소원이 없었으면 어떻게 봉사를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 작은 돈으로 어떻게 큰 일을 할 수 있었겠어요? 이렇게 큰 일에 함께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준 것에 너무 감사하죠.”

장 이사장은 요리를 하다 다친 김 팀장의 손을 말없이 감싸 잡았다.

“도반들이 없었으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이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도반들 덕분에 정말 행복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 복도에 걸린 미소원 간판 위에 글이 눈에 들어온다.

“함께 웃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봉사 1번지 이곳은 미소원입니다.”

봉사하는 가운데 서로를 위한 마음으로 이미 웃음이 가득한 곳, 미소원. 그들의 행복 가득한 미소가 세상에 가득하길 발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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