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권선문

출가는 자유를 향한 여정이다. 지금 여기를 직시하고 깨달음을 위해 수행 정진하며, 자비를 실천하는 길이다. 교육과 포교 등 일선 현장에서 정진하고 있는 스님들이 출가 진흥을 위한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주>
 
오라! 출가의 길로
가섭 스님(조계종 출가상담사, 한솔종합사회복지관장)

20년 전 출가는 행복한 선택
부처님 미소는 당신 향해 있다

어느 날 라자가하의 거리를 거닐고 있던 우빠띠사(사리불존자)는 한 사문의 엄숙한 용모와 고요하고도 위엄 있는 거동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과거 수많은 생을 통해 완성을 성취하고자 노력해 온 우빠띠사의 끊임없는 노력이 이제 바야흐로 결실을 맺을 순간에 이르렀음인지 이날따라 사문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유달리 사로잡았다. 이 사문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최초의 다섯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아싸지(마승존자)였다. 우빠띠사는 이 고상한 사문이 누구의 제자이며 어떤 가르침을 받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아라한이 탁발을 마칠 때까지 계속 따라갔다.

“벗이여, 당신의 모습은 우아하고, 당신의 눈빛은 맑게 빛납니다. 누가 당신을 출가하도록 설득했습니까? 당신의 스승은 누구시며, 어떤 법(가르침)을 따르고 계십니까?” 하고 묻자, 아싸지존자는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주저하듯 겸손하게 말했다. “나는 교의와 계율을 길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그 대의만 간략히 말해 줄 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우빠띠사는 “좋습니다. 벗이여, 적든 많든 좋으실 대로 말해 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것도 그 대의입니다. 장황한 말이 왜 필요하겠습니까?”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아라한은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포용하는 연기법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게송을 한 수 읊었다. “원인에서 발생하는 그 모든 것, 그에 관해 여래께서 그 원인을 밝혀주셨네. 또 그것의 멸에 대해서도 설명하셨나니, 이것이 대사문의 가르침이라네.”

우빠띠사는 이 게송을 듣자 바로 그 뜻을 이해했다.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는 것’임을 그 자리에서 잘 이해하게 된 것이다. 기쁨으로 가슴이 벅찬 그는, 서둘러 죽림정사로 갔다. 부처님에게 귀의할 뜻을 사뢰자 부처님은 그들을 기꺼이 맞아들이며 말씀하셨다. “오라. 비구들이여! 법은 잘 설해져 있도다. 고귀한 삶을 통해 고를 완전히 없애버리도록 하라.”

사리불존자의 출가 인연이야기이다. 삶의 이치를 밝히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또 다른 삶의 길을 선택한 사리불존자의 탁월함은 오늘의 모든 수행자들의 선택과 다르지 않다. 사리불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겐 대자유의 삶, 평화로운 삶, 행복한 삶을 위한 수행자의 길이 언제나 열려있다.

부처님과 같은 수행자가 되겠다고 20여 년 전, 발심출가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행자시절 해인사에서 본 새벽의 가야산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새해 5일째 되던 날, 해인사에 일주문에 설레는 마음으로 첫 발을 내딛던 순간은 내 삶에서 가장 탁월한 결정이었고, 가장 행복한 선택이었다. 그간 부처님 제자로 살면서 받은 불은(佛恩)과 시은(施恩)을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출가는 자신을 위한 길인 동시에 이웃을 위한 길이다. 자신의 삶이 정리되었을 때 다른 것들도 정리되는 법이다. 자신의 욕망을 여의는 가르침을 따라 자신을 밝히고 그 수행의 깊이만큼 이웃을 자비한 마음으로 함께하는 여정, 이것이 이 시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출가의 길이다.

지금 이 순간 “오라. 비구들이여! 법은 잘 설해져 있도다. 고귀한 삶을 통해 고를 완전히 없애버리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시는 부처님의 환한 미소의 그대를 향하고 있다.

 

삶 직시하고 행복 찾아나선 길
본각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석존의 뒤 이은 제자들이 걷고 있다
자리 박차고 길 떠나는 용기 가져라

우리의 삶 속에는 수많은 일들이 포함되어 있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고, 그리고 즐겁고 괴로움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한다. 그리고 안주할 곳이 필요하고 가족도 있어야 하고 나를 감싸주는 주위의 모든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살아감은 매우 행복한 일이 된다.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좋은 사람과 만나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움이 영원하지도 않거나와 모두가 평등하게 누리지도 못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삶은 허무해지고 고통은 필연적으로 수반되며 고통의 위험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고통은 반드시 미래에 다가온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살아감은 죽어감으로 예정된 결과를 안고 있다.

2천6백 여 년 전, 인도 가비라 왕국에서는 귀한 왕자의 탄생으로 온 나라가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그 주인공이 바로 뒤에 지혜의 완성자인 석가모니이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분으로 호칭되는 석가세존, 곧 석존(釋尊)이다. 석존은 어린 나이에 약육강식의 잔혹함을 알았고, 고통 없는 삶을 사유하면서 고통의 근원을 깨달은 분이다. 모든 고통은 끈질긴 탐욕에서 일어남을 알고서는 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뭇 생명에게 다함없는 연민의 정을 간직한 분이다. 그래서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지혜의 길을 가르치셨다. 모든 생명에게는 자애로운 어버이이며 인류에게는 큰 스승으로 자리하고 있다. 석존의 가르침을 따라서 탐욕을 버리고 성냄을 버리고, 그리고 어리석지 않고 깨어 있으려는 부단한 노력이 불교의 핵심이다.

‘탐욕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절제하여 약육강식의 자만을 버리는 것이다. 소욕지족(小欲知足)의 즐거움을 깨달으면 모두가 행복해 진다. ‘성냄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에고이즘을 버리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지 말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우리들 하루의 삶조차 모든 생명의 희생과 노고로 이루어짐을 깨달으면 자연히 모두를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갖게 된다.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혜로워라’는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두가 지혜롭지 못해서 마음도 괴롭고 몸도 괴롭다. 1백년도 못살면서 1천년을 살 것처럼 집착하고 탐욕을 부리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상대방도 행복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강물이 맑게 흐르기 위해서는 강을 오염시키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자연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내가 배가 고프면 남도 배가 고플 것이라고 미루어 알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그래서 석존은 집착하지 말고 놓아버리고 탐욕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어떻게 하면 괴로움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를 가르치신 것이다. 속박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게 한 유일한 성자가 석존이다. 석존은 천당에 태어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지금 곧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는 것을 귀하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곧 출가인 것이다. 출가는 괴로움을 벗어나는 해탈의 길이며, 참다운 즐거움인 니르바나를 우리에게 안겨주는 길이기도 하다. 석존은 그 옛날 고통에서 벗어나는 지혜의 길인 출가를 몸소 실천해 보였다. 석존의 뒤를 이어서 무수한 제자들이 이 길을 걸어왔고 오늘도 걷고 있다. 얽히고설킨 삶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길을 떠나는 용기를 일으켜 보라. 출가의 용기를 일으키는 것은 어두운 방에서 전기 스위치를 켜는 행위와 같다. 어둡고 칙칙한 현재의 자기를 벗어 던지고 빛이 충만한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해주는 즐거운 일을 시작하는 주인공이 되기를 권유해 본다.

 

출가, 대승의 마음 갖는 것
명본 스님(울산 백양사 주지)

불교학 열망이 나를 이끌어
출가는 대자유를 위한 여정

가끔 일부 사람들로부터 출가 인연을 묻는 경우가 있다. 생각해보지만 별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연이 각기 다르듯 나는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동국대에 입학을 하면서 먼저 머리를 깎았다. 나에게 출가는 흔히 말하는 사회와 단절 및 속세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불교를 배우고 싶고 불교학에 관심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출가했다. 불교는 철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정신적 지도자를 이끌어갈 학문으로 메리트가 있었고 그런 방식을 배워보고 싶었던 열망이 컸다. 관심과 인연이 나를 출가로 이끈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불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현대인의 심리적 스트레스는 병적 수준에 이르렀고, 웰빙과 힐링은 치유의 트렌드가 됐다. 여기에 불교는 많은 대안점이 될 수 있다.

불교를 통해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고 시대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면, 그리고 대자유의 삶을 살고 싶다면 출가의 길을 걸어가 보길 권한다. 물론, 출가의 길이 순탄치는 않을 것이지만, 처음의 발심을 유지한다면 인내하며 갈 수 있는 여정이다.

출가자 확대를 위해서 종단에도 적극적인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먼저, 출가 수행자 연령의 폭의 차이가 크므로 20대 출가자와 40대 출가자가 같은 방식과 같은 교육을 이수한다면 전문가가 될 수 없다. 이 시대의 종교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맞춤식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지도자로서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출가자 확대를 위해서는 불교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통로인 포교도 함께 수반돼야 한다. 현대사회에서는 ‘도심 포교’가 활성화 돼야 한다. 지금의 교구제를 혁신해 도심 교구제로 재편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는 광역시가 됐고, 도시화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도시 안에는 교구가 없다. 포교를 위해 도심 거점 교구본사가 구성돼야 한다. 이제 불교는 포교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불교를 배워 발심해야 출가자가 배출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출가는 개인의 깨달음을 위해 단순히 속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이며 이는 재가자를 비롯한 여러 사회 구성들과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내 개인의 수행 목표를 바탕으로 대승적 마음을 함께 견지하는 것, 이것이 출가의 목적이어야 하며 종착지가 되어야 한다.

글을 통해 대중들에게 삶의 지혜를 주셨던 故 법정 스님은 출가를 ‘자유를 위한 버리고 떠남’이라고 말하셨다. 관련 글 중 일부를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 한다.

“출가의 본질적인 의미가 반드시 머리 깎고 수도승이 되는 데 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일반 시민들과 다른 제복을 입고 생활 방식을 달리하면서 사는 것은 종파적인 출가생활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적인 출가는 비본래적인 자기로부터 벗어나 본래적인 자기로 돌아가는 데 그 의미가 있어야 한다. 〈중략〉 훌쩍 떠나 버리면 전부를 한꺼번에 버리게 된다. 더 갖지 못해 부자유를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모두 버리고 떠남으로서 오히려 홀가분한 자유를 누리려는 것이다. 내 인생을 살기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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