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화쟁의 가치는 무엇인가

상대 인정이 화쟁 출발점
내 잣대 강요하지 않아야
최소한의 합의 이뤄지면
구성원 간 소통 門 열린다

화쟁에 대한 두 가지 오해
우선 화쟁에 대한 흔한 착시현상 두 가지만 언급하고 시작하자. 흔히 ‘화쟁’이라는 논리적 혹은 사상적 태도는 원효로부터 비롯되었다고 간주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화쟁’ 혹은 ‘회통’이라는 접근 방식 자체는 그 원형적인 입장을 붓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동아시아 불교는 물론 불교 전통 전반에 존재한다.

동아시아 불교 특유의 전통적 입장 중의 하나로 ‘교판’이 있는데, ‘교판’은 기본적으로 회통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자체로써 회통 혹은 화쟁의 과정을 담고 있다. 때문에 화쟁이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원효에게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다만 화쟁의 방법론적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러한 사고방식이 불교의 한 특질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에 원효사상의 한 특징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화쟁에 대한 두 번째 착시현상은, 화쟁을 화해와 통합(통일) 혹은 종합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이라고 이해하는 점이다. 이른바 화해의 사상, 통일의 사상이라고 하는 형태로 화쟁이 받아들여지는 현상이다. 물론 화쟁을 목적론적으로 이해한다면 그런 해석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원효의 경우에 있어서, 화쟁은 이견을 회통시키는 논리적 과정으로 포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화쟁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원효는 화쟁이라는 논리적 과정을 통해서, 경전에 제시되어 있는 ‘무쟁(無諍)’에 이르는 다양한 길들이 관점에 따라 지니게 되는 타당함[是]과 그릇됨[非]을 포착하고, 그것을 통해서 시비논쟁을 조화시키는 관점을 획득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때 화쟁의 과정으로부터 얻어지는 결과가 원효 특유의 사상성으로 귀착된다. 때문에 화쟁 그 자체는 사상이 아니라 논리적 과정으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원효의 사상을 화쟁이라고 규정하는 관점, 곧 화쟁사상이라고 하는 관점은 대체로 두 가지로 맥락적 배경을 추정한다. 당시 동아시아 불교 내부의 사상적 대립과 갈등이 그 하나이며, 삼국통일이라는 신라사회의 사회적 갈등을 또 다른 배경으로 지목하는 것이다. 이 경우 화쟁은 대립과 갈등을 해소한 통합의 상태, 달리 말하면 ‘서로 다른 의견이 동일화’된 상태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곧 획일화된 것으로 차이[다름]가 사라진 상태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른바 다양성이 부정되어버린 상태로도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 내적으로도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대단히 위험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전체주의적 관점을 생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원효의 화쟁은 단순한 종합주의, 통합주의, 통일주의를 지향하는 통합의 논리로는 기능하지 않는다.

화쟁은 다름과 같음에 대한 수긍에서 시작

그러나 원효의 경우를 보면, 화쟁에 의해서 그 다름[차이]의 존재가치가 부정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원효의 화쟁은 각각의 서로 다른 견해가 가지는 다름[차이]이 각각 그 자체로써 유의미하다는 점이 끝내 부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런 견해의 차이 속에서, 다시 견해 사이에 존재하는 동일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견지된다. 다름과 같음에 대한 수긍이 원효가 추구하는 화쟁의 논리적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전제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화쟁은 서로 다른 견해들 사이의 다름을 삭제하는 과정이 아니다. 곧 동일화의 과정이 아니라는 말이다. 곧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서 다름을 삭제하여 동일화시키는 과정이 아니다. 갈등하고 대립하는 쌍방이 있을 때, 쌍방의 같고 다름을 먼저 인정하고 용납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사실은 갈등하고 대립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대방의 존재가치를 수긍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쌍방이 서로 간의 ‘같고 다름’을 곧장 ‘옳고 그르다’라고 하는 가치판단의 상태로 전환시켜 버리는 데서 발생한다. ‘같고 다름’이 ‘옳고 그릇됨’의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옳고 그릇됨’이라는 가치판단의 상태로 돌입하게 되면, 화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다. 제일 중요한 전제 조건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가치판단의 상태가 되어버리면, ‘나와 다른 상대방’은 부정되어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가치를 가지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존재가치가 수긍되어야 할 상대방이 없애야만 하는 적대감의 대상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의 화쟁

소통해야 할 상대방이 없애야만 할 적이 되어버리면, 이미 화쟁을 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따라서 소통해야 하는 상대방을 적극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가치관의 전제가 필요해지게 된다. 동아시아불교 더 좁혀서 원효는 이 점을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에 대한 적극적 긍정에 의해서 극복하고자 한다.

중생 하나하나, 사람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서 부처와 같은 온전히 완성된 존재이기 때문에, 부처와 동일하게 존중되어야 할 가치를 지닌 고귀한 존재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적어도 동아시아불교 그리고 원효에게 있어서 하나하나의 생명은, 아무리 하찮게 여겨지는 생명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그 자체로서 부처님과 동등한 고귀한 생명가치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상당히 형이상학적인 관념으로 비쳐질 수도 있지만, 이것은 반드시 수긍되고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가치였다. 이것은 화쟁에 자기 자신과 상대방에 대한 무한긍정의 바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흔히 대립과 갈등을 해소해야만 하는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해소를 위한 초점이 되는 것은 늘 대립과 갈등을 유발한 원인이다. 이때 원인이 먼저 부각되면, 대립과 갈등의 쌍방 당사자는 사라져버리게 된다. 갈등과 대립의 상황에서 쌍방 당사자는 배제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주체와 갈등과 대립의 내용이 분리되어버리면, 문제의 본질이 왜곡되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래서 대립과 갈등의 해소에는 늘 다름[차이]에도 불구하고, 늘 상대방이 긍정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래서 일체중생실유불성이라고 하는 뭇 생명존재에 대한 머뭇거림 없는 가치긍정이 필요하다. 생명존재들이 생명존재로서의 존엄한 가치를 인정받아야만, 갈등의 해소과정이 시작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일체중생실유불성의 가치관은 대화의 상대방을 인정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상대방을 부정하면 대화는 시작되지 않는다.

논리적 과정으로서 원효 ‘화쟁’의 독창성

박태원 울산대 교수는 원효 화쟁의 논리적 과정에 나타나는 특징의 하나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한다. 그는 “‘관점을 성립시키는 조건들의 연기(緣起)적 인과 계열’, 다시 말해 ‘견해/주장의 조건적 타당성을 성립시키는 인과계열’ 내지 ‘견해 계열[門]의 의미 맥락’을 원효는 ‘문(門)’이라는 말에 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화쟁의 논리적 과정에서 원효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명료하게 드러낸다. 각각의 다른 주장들이 성립되는 인과적 계기맥락에 대한 면밀한 고려가 선행되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원효는 각각의 주장들이 가지는 이러한 견해계열을 면밀하게 고찰하는 것에 의해서 조건적 타당성과 부분적 타당성을 말한다.

이것은 본인의 관점에 의한 무조건적 판단의 잣대를 상대방의 주장에 적용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원효는 상대방의 주장을 무조건 자신의 입장에 비추어서 판단하는 방식을 배제하는 좀 더 객관적인 논리방식을 제안하고 적용했다는 이야기이다. 나와 상대방의 가치판단을 무조건적으로 절충하는 방식이 배제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만의 논리와 가치판단을 잣대로 들이대고 보는 일반적인 소통과정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화쟁이 이 시대의 대안이려면
앞에서 여러 가지로 원효의 화쟁이 가지는 특징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원효의 화쟁은 이 시대에 대안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충분히 이 시대의 대안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이 시대에 적절한 대안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조건들이 적지 않다.

첫째, 원효의 화쟁은 사회갈등을 대상을 한 것이 아니라, 불교 내부의 서로 대립되고 상충하는 다른 주장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곧 상충되고 대립되는 다른 주장들이기는 하지만, 이미 그 다른 주장들은 추구하는 바 대상에 대하여 최소한의 합의점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는 점이다. 따라서 화쟁을 현대 한국사회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무엇을 구축해야 하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최소한의 인권, 최소한의 환경, 최소한의 삶의 조건,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합의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둘째, 원효의 화쟁은 각각의 주장이 성립하는 인과적 계기맥락에 대한 면밀한 고려를 전제로 한다. 이것을 요즘의 민주정치체제에 비추어 본다면, 절차적 민주주의 과정이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절차적 민주주의 과정을 배제한 채, 가치 판단이 선행된다면, 그것은 이미 소통이나 화쟁이 아니라 폭력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원효의 화쟁에서는 뭇 생명존재에 대하여 절대적 고귀함과 존엄성이 전제된다. 헌법으로 말하면 행복추구권이 가까운 말일 것이다. 그러나 원효는 뭇 생명존재가 행복해야 할 당위적 권리를 말한다. 그러나 현실사회는 여전히 뭇 생명존재들의 존엄한 가치를 평등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적으로 적용한다. 뭇 생명존재들의 존재가치가 당위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이미 화쟁과 소통의 가능성은 배제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는 사회적 갈등이 상존하고 또 쉽사리 증폭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갈등하고 대립하는 쌍방은 서로 상대방이 자신만의 가치,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이것은 어느 쪽을 막론하고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상대방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에 기반하여 타협과 절충을 찾는 데서 대화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이익이든 이익의 최대확보를 선행전제로 삼는 대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화쟁이 진정한 화쟁으로써 대안이 되려면, 이 같은 사회적 가치관의 전제조건 바꾸기에 대한 신중하고 면밀한 고려와 실제적 적용을 위한 절차적 구체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화쟁은 허공에 그리는 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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