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관해사 주지 자운 스님

자운 스님은 … 1950년 하동에서 태어나 하동 병설 중·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 불교문화대학원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1999년 마산 석봉암 주지 월봉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2001년 마산 관해사 주지로 취임했다. 이후 병원 위문공연을 진행하고 일일찻집 등을 통한 수익금으로 환우돕기를 실천해왔다. 태고종 경남종무원 중부분원 총무를 역임했으며 사단법인 가향자비회를 설립했다. 하동 경찰서 경승과 국립마산병원 IRB 위원, 경상남도 희망자치연대 대표 등도 맡고 있다. 현재 법원처분소년 장기쉼터인 ‘자운영청소년센터’를 운영 중이다.

청소년 대안가정 ‘자운영’ 센터 개설
엄격한 가풍으로 사회성 키워
검정고시 합격자·대학진학 최다
“대안학교 세우는 것이 마지막 꿈”

마산결핵요양병원 관해사도 챙겨
매실 경작 수익금을 환우돕기에
법회·일일찻집·탁발 등도 진행
가향자비회 설립해 후원조직 확립

눈이 내리기 직전이었다. 하얀 눈이 듬성 듬성 바람에 날려 경남 의령 다사리 마을에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기자가 차를 대자 10여 명의 남자 아이들이 마중을 나왔다. 차 문을 열자 모두 합장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들은 자운영 청소년센터에서 머무는 아이들이었다. 눈빛은 맑고 자세는 공손했다. 자운영 청소년센터는 소년범 재활쉼터다. 센터장을 맡고 있는 자운 스님은 이들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 기회를 잃었던 아이들이라고 했다.

12월 3일 자운영 청소년센터에서 이런 아이들에게 다시 한 번 더 삶의 기회를 주고 싶다는 스님의 원력을 들었다.

2011년 4월 개소한 자비마을 ‘자운영센터’ 모습
“청소년에게 새 가정과 새 삶을”

스님의 이끔에 따라 자비마을 자운영(慈雲-young)센터의 스님 처소로 향했다. 아이들이 머무는 따뜻한 방과는 달리 자운 스님의 처소는 냉골이었다.

기자가 처소로 들어가자 스님은 보일러가 고장이 났다며 전기스토브를 하나 급히 꺼냈다. 그것도 고장이 나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고, 손잡이조차 언제 돌렸는지 뻑뻑해서 잘 돌아가지 않는다.
이야기를 꺼내기 무섭게 아이들이 스님의 처소에 들어왔다. 공부하러 가야 한다며 차비와 용돈을 받아간다. 보기에도 어려운 살림살이인데 아이들의 공부와 식사까지 모든 내용을 책임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도움이 많이 필요하지요. 이번에 봉사자들이 김치를 담가 주기 위해 처음 왔어요. 이때까지는 도움 한 번 받아 본 적 없었는데, 그 손길이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갈 곳이 없는 아이들입니다. 인생에 있어 한 번 더 기회를 얻는 장소인거죠. 희망을 주는 곳입니다.”

스님은 대중의 관심을 당부하며 입을 열었다.

자운영 청소년센터는 위기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가정으로 시작됐다. 천종호 판사가 주축이 돼 2010년 10월에 설립한 대안가정 청소년회복센터 중 하나다. 청소년회복센터에 따르면 지난 5년간 회복센터를 나온 소년들의 재범률이 30% 이하로 하락했다. 자운 스님의 자운영은 전국 13개 대안가정 중 두 번째로 문을 열었다. 불교계로는 첫 대안가정이다.

“이곳에 있는 청소년들은 대부분 조손 가정, 위기 가정의 아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아버지는 알콜 중독으로 폭력을 쓰고 어머니는 그 폭력을 못 이겨 집을 나가죠. 보호받지 못하고 무서워 떨던 어린 아이는 가출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청소년이 되면 친구들과 비행을 반복하고 절도, 사기를 치다가 형사에게 잡혀 처벌을 받게 되죠. 이곳에 학생들은 대부분은 그런 가정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 자운 스님은 6개월의 기간 동안 아이들을 위해 치료하고 보호하며 가르친다. 또한 자립을 위한 취업교육을 비롯해 진학과 인성교육도 진행한다. 이 기간 동안 아이들은 보호지도 받으며 감옥을 가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아이들이 전과자라는 낙인을 받지 않을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다.
“오토바이 절도의 경우를 예를 들어봅시다. 법치국가에서는 아이들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전과자라는 낙인이 평생을 따라다니는 거죠. 폭력에 시달린 아이들은 이집 저집을 돌며 고통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그 아이들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핵 환자들과 산사 순례에 나서는 스님의 모습
검정고시 합격자 최다 배출

자운영은 올해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대안가정 중 검정고시 합격자를 최다 배출했다. 또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기도 했다.

이런 성과에 대해 자운 스님은 각 가정에 있는 가풍처럼 자운영만의 가풍이 있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했다.

자운영의 경우 불교와 예의, 봉사, 대화기술을 엄격하게 강조한다. 먼저 아이들은 입소를 하면 합장인사와 삼배, 차수 등 불교예절을 익힌다. 또 〈부모은중경〉과 〈목련경〉 사경과 〈반야심경〉과 〈법성게〉를 외우게 된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은 부모에 대한 원망이 큽니다. 분노는 살인적입니다. 입에 죽이고 싶다는 말을 달고 있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하지만 〈부모은중경〉을 사경하고 나중에 독후감을 적게 하면 눈물을 흘립니다. 〈반야심경〉도 〈법성게〉도 처음에는 뜻을 모르지만 씨앗을 뿌린다는 심정으로 익히도록 합니다.”
또 자운 스님은 아이들에게 행복해지는 대화기술을 익히도록 돕는다. 자운영 내에서 욕설은 일체 금지된다. 또 자운영 방문자에게는 반드시 웃는 얼굴에 당당하고 자신있는 언어를 사용하도록 한다. 그 가훈이 바로 ‘인생을 Yes! 행복해지는 대화 기술!’이다.

“인생을 Yes! 행복해지는 대화 기술!은 누군가의 요청이 있을 경우 무조건 yes!하고 달려가며 지시와 전달 사항 있는데도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경우 자신의 의사 표현을 상대에게 정확히 전달하라는 것입니다. 사회성은 대화하는 자세에서 출발합니다. 일반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배우지만 이곳에 오는 아이들은 대부분 유아기가 공백입니다. 전혀 기본적인 것을 익히지 못했습니다. 6개월 간 이 과정을 거치면 아이들이 기존과는 180도 바뀌게 됩니다.”

스님은 관해사서 매실과 녹차를 재배해 수익금으로 환우들을 돕고 있다.
결핵환자들의 아버지로도 활동

자운영을 이끌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스님은 빠지지 않고 국립마산결핵병원 관해사를 찾는다. 스님은 이곳 관해사에서 결핵환자들을 위해 15년간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처음 관해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이 있었을 때 주변의 만류가 많았다. 자운 스님이 당뇨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뇨병 환자가 결핵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말이 있었어요. 은사 스님을 비롯해 다들 말리더군요. 하지만 관해사에 머무는 스님이 안 계신다는 말을 듣고 환자들이 마음에 걸려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절에 갔더니 법당은 창고 수준이 되어있더군요.”

관해사는 1989년 주지였던 정관 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금강자비회와 양생회 회원들이 일군 사찰이다. 1974년 건립한 관해사 양생전(養生殿)은 투병 중인 환자들의 회복을 기원하며 건립된 곳으로 국립마산결핵병원의 유일한 불교 안식처였다.

하지만 정관 스님의 입적 후 2년 간의 공백 동안 이런 안식처는 사라졌다. 잠시 스님들이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자운 스님은 2001년 주지로 임명된 후 환자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섰다.

스님은 위로법회를 시작으로 결핵환우 보신공양, 연 1회 위로공연, 결핵으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수륙천도재 및 입원환자 의류 기증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환우들과 함께 소록도, 통도사 등으로 순례를 떠났다. 새로운 시도로 환자들은 즐거워했다. 외출이 어려운 상황인 그들에게 스님이 마련해준 여행길은 활력소였다.

“관해사까지 오는 길에 108계단이 있습니다. 부처님 뵈러 가야겠다는 신심으로 간절한 마음을 낸 자가 이 계단을 오르면 병을 낫게 된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그렇게 환자들과 마음을 나누며 다양한 활동을 펼치던 중 스님은 한 결핵 환자가 병이 낫기도 전에 약값이 없어 병원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2009년 봄이었다.

“한번은 환자 둘이서 찾아서 인사를 하는 겁니다. 병이 낫지도 않았는데 떠난다는 거예요. 약값이 없어서 치료가 힘들다고 하는데 약값을 제가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지요. 근데 그 병이 일반 결핵과는 다른 다제내성 결핵이라는 특수한 경우였습니다.”

다제내성 결핵은 처방 가능한 거의 모든 항결핵약에 내성이 생긴 것으로 2차 치료제를 써도 환자의 70%만 완치된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로 치료가 어려운 병이다. 2012년 희귀 질환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은 당시 하루 약값만도 한알에 6만원이었다. 다제내성 결핵 환우들의 고가의 약값을 지원하고 환우 자립 지원 사업을 펼쳤다.

“결핵이란 병이 전염성이 있어 격리되고 일반인들은 쉽게 관해사에 들어 올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시금은 생각할 수가 없었죠.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했지요”

스님은 관해사 경내에 있던 3000평을 일구기 시작했다. 스님의 손은 그 어떤 농부의 손보다 더 거칠어졌다.
“집집마다 탁발을 다니고 관해사에는 매실나무 450그루를 심고 녹차를 심었어요. 그렇게 생긴 이익금은 모두 환자들을 위한 후원금으로 사용됐죠. 그리고 알려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매년 자비사랑 보시실천 대법회를 개최하고 환우를 위한 위안 공연과 노래자랑도 열었습니다.”

2015년 9월 열린 결핵환우 힐링 한마당
결핵제로 운동에 종교계 나서야

환우들을 위한 스님의 모금 활동은 끝이 없었다. 매년마다 일일찻집을 개최해 자금을 마련하고 약값을 지원했다. 그리고 2009년에 사단법인 가향자비회를 설립하고 일반인들과 소통하며 후원조직도 마련했다.
“한 해에 결핵으로 사망하는 환자들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우리나라에만 3500여 명입니다. 아기 때 맞는 BCG 예방 접종이 몇 살 까지 예방이 되는지 아시나요? 청소년기가 되면 효과가 사라집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결핵 사망자수 1위 국가입니다. 결핵제로 운동에 모든 종교를 뛰어넘어 함께 노력하고 도움을 줘야 하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현재 국립마산병원은 재건축 중이다. 병동도 현재 별관 만이 사용되고 있어 관해사와 1km 정도 떨어진 곳에 환자들이 머물고 있다. 그로 인해 법회는 잠시 중단된 상태다.

“재건축 기간이 2년 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현재는 환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약사재일을 기해 병원을 찾아 갑니다. 2년 후 공사가 완공 되면 환자들이 다시 관해사 근처로 돌아 올 겁니다. 그 때를 대비해야죠.”

스님은 그동안 도량을 정비하고 환자들이 관해사를 찾을 때 안전하게 법회를 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대안학교 설립 원력도

스님은 자운영을 나온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인연이 연결되었다고 말했다.

“한 인연이 마무리가 잘되니 또 다른 인연이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저의 원력이 인재 불사입니다. 여건이 되면 대안학교를 지어 아이들을 교육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15명 이상 수용을 못 합니다.”

스님은 실력과 인성을 겸비한 불제자 학교를 지어 그 어느 누구에게나 교육의 기회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운 스님은 어릴 적 경남 하동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공부를 하고 싶어 6km를 매일 같이 달려서 다녀야 했다. 배우고 싶었지만 어려웠던 가정 형편에 중학교 진학이 어려웠다. 2년을 기다린 결과 낮에는 일을 하며 밤에는 다시 6km를 달려 야간 학교를 다녀야 했다. 공부가 하고 싶어 서울에서 내려온 고모를 몰래 따라 기차를 탔으나 길을 잃고 방황했다. 그 시간에 만난 친구들은 평생 두려운 기억을 안겨주었다.

“그때 절도, 비행, 폭력을 했습니다. 배움에 대한 갈증 그리고 당시 겪었던 방황기가 지금 자운영에 있는 학생들을 이해하는 원동력입니다. 누군가는 깨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도 합니다. 하지만 6개월 동안 비행을 안 하는게 또 어딥니까? 전 콩나무 비유를 자주 씁니다. 콩나무에 물을 주면 물을 다 빠져 버립니다. 하지만 분명 콩나무는 자라 있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도 그 안에서 분명 무엇인가는 자라 있을 겁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혹은 두 명은 변하는 것을 직접 봅니다.”

자비 자(慈) 구름 운(雲), 스님의 법명이다. 자비의 구름이란 뜻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하늘에 눈이 어느덧 쏟아 붓는다. 온 세상을 하얗게 높고 낮음도 없이 모두 덮는 하얀 눈처럼 자비의 구름이 몰고 온 따뜻한 세상이 온누리에 가득하길 발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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