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붓다’ 38회~40회

빔비사라왕이 불가에 귀의하다. 빔비사라왕은 부처님께 귀의한 후 죽림정사를 보시한다. 부처님은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전법행에 나선다.

지난 줄거리
싯다르타는 드디어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정각을 이룬다. 부처님이 된 싯다르타는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 등의 가르침을 다섯 비구에게 전한다. 이어 길을 떠난 이들 일행은 고통받는 수많은 중생들에게 법을 전하기 시작한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극단의 길이 있는데, 수행자는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두 가지 극단의 길이란, 하나는 육체의 요구에 자신을 내맡겨버리는 향락의 길이요, 또 하나는 육체를 지나치게 학대하는 고행의 길이다. 수행자는 양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배워야 한다.”
빔비사라왕 귀의 후 죽림정사 기거
죽은 아이로 고통받는 여성에게 설법
중도의 가르침과 자비를 설해

마지막 정진에 들기 전 빔비사라왕이 싯다르타에게 만약 깨달음을 얻는다면 자신을 제자로 받아 줄 것을 당부한 대목을 기억할 것이다. 부처님은 빔비사라왕을 찾아간다.

“대왕이 선업을 지으면 시간은 세세생생 대왕의 삶에 전과는 차원이 다른 흐름을 갖고 올 것입니다. 성불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쌓아온 모든 업의 고리를 끊고 궁극적 진리에 연결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 일행은 마가다국에서 전법에 나선다. 하루는 제자들이 탁발공양에 나섰을 때의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부처님의 제자들을 욕했다.

“일도 하지 않고 공짜로 숙식을 하다니 부끄럽지 않은가.”
제자들은 부처님을 찾아와 다른 곳으로 옮기자며 이런 말을 한다. 부처님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전한다.
“만약 그들이 꽃을 들고 자네들을 환영한다면 기분이 좋았겠지. 이는 나의 마음을 남에게 내줬다는 의미네. 외적 요인이 마음을 기쁘게도 불안하게도 하는 것이라네.”

제자들은 외적 요인으로 인한 마음의 변화를 직시하고 다시금 정진에 들 것을 서원한다. 부처님은 “우리는 그동안의 사람들의 믿음을 변화시키려 하고 있다네. 혹여 폭력적이거나 모욕적인 것이 있더라도 인내해야 한다네”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빔비사라왕이 제공한 어떠한 편의도 거부하고 제자들과 함께 대중 속으로 걸어간다. 이후 부처님 일행은 죽은 아이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한 여성을 만난다.

“제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제 고통을 없애주십시오. 아들을 돌려주십시오.”
“아들을 살려줄 수 있다네. 그럴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 어떤 집에도 가서 겨자씨를 한 줌 얻어 오게나. 한 가지 명심하게, 겨자씨를 죽음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은 집에서 가져와야 하네.”

이 여인은 집집마다 다니며 묻는다. “혹시 돌아가신 분이 있으신가요.” 죽음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집은 없었다. 이 여인은 깨닫는다.

죽은 자식을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여인에게 설법하고 있다.
슬픔에 빠져 다시 돌아온 여인에게 부처님은 설법한다.

“태어난 자는 죽기 마련이라네. 이게 자연의 이치라네. 모두가 죽음을 맞이한다네. 만약 전에 이런 말을 했다면 믿었겠는가. 자네 아들도 살아 있네. 자네 가슴에 살아 있다네. 마음이 진정돼서 이해하는 것이라네. 궁극의 진리는 만물이 존재하는 한 괴로움이 그림자처럼 따른다네. 이 괴로움의 근원이 사람을 물질에 묶어두고 있다네.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을 안다면서도 말이네. 자유를 원한다면 감각을 깨워야 한다네. 고통이던 아니던 양 극단 사이에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그 길에서 괴로움의 족쇄가 풀리고 궁극의 지혜를 얻는다네. 그 이후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이런 설법을 옆에서보고 감명받은 빔비사라왕은 귀의 후 불교 최초의 정사인 죽림을 보시한다. 그 때까지 부처님은 숲속의 묘에서 설법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공양을 얻지 못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부처님
이후 많은 제자들이 부처님 아래로 들어오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신분의 승가가 형성된다. 빔비사라왕은 아들인 아사세 태자와의 갈등이 심해진다. 빔비사라왕 대신 빨리 왕위를 물려받고 싶은 욕망을 부처님 출현 이후 위기의식을 느꼈던 브라만들이 부추겼던 것이다.

아사세 태자는 빔비사라왕에게 결국 자객을 보낸다. 마가다국에서는 부자지간의 갈등이 더욱 높아진다.
이런 와중에 부처님은 샤카국으로 드디어 향한다. 금의환향이었다. 부왕인 숫도다나왕이 영접에 나서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샤카국에 도착한다. 야소다라와 라훌라를 만난 부처님은 이들을 잊지 않았음을 말한다. 이어 수십년을 기다린 야소다라와 부처님이 단 둘이 만나게 되며 40회는 끝을 맺는다.

마침내 샤카국으로 돌아와 숫도다나왕을 만난 부처님



리뷰 - 법현 스님이 본 드라마 ‘붓다’
전법교화와 신비현상

붓다는 가만히 보면 자비스런 현상이나 절대자에게 복을 비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은 것으로 경전에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묘한 일을 겪지 않거나 붓다에게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선 꿈 이야기를 해보자. 붓다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 몇 가지 꿈을 꾸었다고 한다. 하나는 산 위 하늘 구름 위에 누워있는 꿈이다. 이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으면 모든 이들 위에 있으며 모든 이들과 통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둘은 트리야나라는 나무가 배꼽에서 자라나서 구름 위까지 자라나는 꿈이다. 셋은 모든 사람들이 붓다의 발아래에 모이는 꿈이다. 이는 사해(四海)다의 중생들이 신앙의 전통에 관계없이 모두 붓다에게 귀의한다는 것을 예지한다. 넷은 네 가지 색을 가진 비둘기가 모두 흰색으로 변하는 꿈이다. 인도, 불교에서 흰색은 성스러운 것을 상징하고 뒤에 대승불교에서는 연각,성문,보살의 셋이 하나인 일불승(一佛乘)을 지향한다는 의미를 품기도 한다. 다섯은 진흙상과 지하감옥을 지나는 꿈을 꾼다. 그런데 아무런 흙이 묻지 않았다. 이는 구제를 위해 더러운 중생세간에 머물지라도 그들에게 물들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꿈은 아니지만 스스로 체험해보는 신비로운 이야기도 있다. 자신의 수행이 깨달음을 향해 제대로 가고 있다면 흐르는 물 위에 발우를 띄워놓았을 때 물의 흐름을 따라 흘러내려가지 않고 거꾸로 위쪽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라고 예언하고 실제로 그런 현상을 여러 사람과 함께 목격한다.

그러나 붓다 자신은 신비스런 현상과 관련하여 강조하거나 기적적인 효과를 위해 비는 행위를 권장하지 않았다. 불교에서는 어떤 일을 마음대로 결정하는 창조주나 주재주를 인정하지 않지만 신통력 등 일정한 신비는 현상으로 긍정한다. 그럼에도 합리적인 원인을 제공해야 합리적인 결과(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기도를 해서 죽을 사람이 살아난다거나, 되지 않을 일이 되는 일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붓다는 말한다. “연못 속에 바위가 빠졌으면 건져내야 한다. 연못 물 위에 기름이 쏟아졌으면 건져내야 한다. 떠오르게 해주십시오, 가라앉게 해주십시오 하고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그것은 기도를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제자 가운데 신통력이 제일인 제자가 사리뿟다(사리불)의 친구인 목갈라나(목련)이다. 그의 집중력이 신통으로 발현하는 힘은 놀라워서 붓다를 만나서 지도를 받자 사리뿟다는 14일만에 깨달음을 얻었는데 목갈라나는 7일만에 얻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는 긴 장대 끝에 달려있는 발우를 날아서 내려오기도 하고 샤카족의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신통력으로 구하겠다는 제의를 하기도 하지만 붓다께서는 인연따라 해야 한다며 말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후대의 불자들은 신비현상인 신통력을 기대하는 마음이 강하다. 신통력은 위대한 이들이 가진 능력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숙명명, 천안명, 누진명의 3명(明)에다가 잘 달리는 신족통, 잘 듣는 천이통, 남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타심통의 3통(通)을 더해서 3명6통 또는 6신통이라고 한다.

요즘 스님이나 불자들도 좋아하는 기도(祈禱)라는 말보다는 정진(精進)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보다 붓다의 가르침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지만 아직도 더 많은 사람들이 기도라는 말을 좋아하는 것도 중생계의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다만, 정진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위리야(viriya)에서 온 말로 정정진, 정근(正勤)이라고도 한다. 정진은 본뜻은 열반(涅槃)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이미 생겼으면 더 자라게 하고 생기지 않은 것은 생기게 하는 것이다. 반대로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이미 생긴 것은 잘라 없애버리고,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은 생기지 못하도록 누르는 것을 말한다.그런 정진을 잘하신 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의 명호를 지극하게 부름으로써 따라가는 것은 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정근(진)이라고 하는 것이다. 붓다의 전법교화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 자체가 당시의 시대상황으로서는 기적이나 신비로운 현상으로 비쳤던 것이지 실제로 붓다께서 신비를 강조하거나 체험하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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