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사 주지 허운 스님

필요치 않은 정보로부터 멀어져
조용히 자아 성찰 시간 가지며
잡담 아닌 진리에 대해 말하고
욕심으로 인한 애달픔 버려라

우리나라 속담에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는 표현이 있다. 말로는 그럴듯하나 실상은 좋지 못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을 두고 공자는 삼사일언(三思一言)’, 노자는 지자불언 언자불지(知者弗言 言者弗知)’를 강조했다. <탈무드>에서도 물고기는 언제나 입으로 낚인다. 인간도 역시 입으로 걸린다며 문제가 될 만한 말을 경계했다. 그럼 부처님은 뭐라고 하셨을까? 부처님은 수행자는 법()에 대해서만 말하라고 당부했다. 대구 파계사 주지 허운 스님은 1127일 방영된 불교TV 무상사 일요초청법회에서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부족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침묵은 단순히 고요함이 아닌 가장 사랑스러운 말을 하기 위한 긴장의 시간이자 바른 주장을 하기 위한 성실함이라고 설명했다. 정리=윤호섭 기자

▲ 허운 스님은… 1972년 일우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8년 고산 스님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77년 범어사 승가대학 대교과를 졸업하고, 1988~2002년 보림사 주지, 2002~2006년 대구 은적사 주지, 2005년 조계종 총무원 재무부장, 2006~2010년 동화사 주지를 역임하고, 현재 대구 파계사 주지를 맡고 있다. 〈사진=불교TV 캡처〉
속도로 번 성찰의 시간은 없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만남과 이별을 경험합니다. 게다가 그 사람의 그릇, 또는 그 사람의 운명에 따라서 만남의 대상은 천차만별로 바뀌기도 하죠. 그러다보니 어떤 만남은 바람처럼 가볍기도, 바다처럼 깊기도 합니다. 만남에 대한 경험은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남은 그런 거죠. 아무리 상대방에게 요구해도 시원치 않고, 또 아무리 내 것을 주어도 후련하지 않은 것.

그래서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사람 중에 나는 왜 이 사람을 만나게 됐을까?’ 혹은 어떤 인연으로 오늘 이 자리에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까?’와 같은 물음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부부의 인연이든 부모자식간의 인연이든, 아니면 스승과 상좌의 인연이든 우리는 현재 직면하고 있는 인연에 매달려 자기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 삶이 고단하고 힘들다고 느끼는 이유는 자기 환경의 골격의 전모를 인식하기 어려운 데서 오는 상실감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계는 너무 열려 있기 때문에 자기를 돌아보는 데 필요한 닫힘의 구조를 갖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닫힘이란 필요하지 않은 정보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사회를 두고 흔히 정보사회라고 말하죠. 여기에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정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습니다. 여러분도 많은 정보를 접하다보니 스스로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정작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별로 아는 게 없다는 걸 느낄 때가 있을 겁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속도가 갖다 준 착각입니다. 그리고 그 속도라는 것은 시간을 절약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속도가 만들어준 시간의 절약, 나를 돌아보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됐을까요?

저는 오늘 대구에서 서울을 올라왔습니다. 요즘 고속철을 이용하면 2시간도 안 걸려요. 정말 빨라졌죠. 그렇다면 과거 교통이 발달하기 이전에 걸어서 이동했을 때를 생각해봅시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겠어요.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교통이 발달해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됐지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은 늘어났습니까? 오히려 빨리 온 만큼 빨리 돌아가야 하지는 않았나요? 분명 시간을 아꼈는데 나에게 저축된 시간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아꼈다고 좋아할 것만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따로 마련하세요.

성스런 침묵으로 자신 돌아보라

아함경에 보면 출가한 스님들이 모여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이 있습니다. 불자님들도 법당에 오시면 이야기를 많이 나누시죠? 그래서 법당 예절과 관련해 지적하는 부분 중 하나가 잡담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나아가서 전화통화를 하는 분들도 있죠. 그럴 때 보면 법당에 부처님이 계신다는 생각을 잘 안 하는 것 같아요. 분명히 부처님이 있는 것 같아 왔을 텐데 하는 행동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은 거죠. 부처님이 정말 내 앞에 계신다면 그 시간에 전화하겠습니까? 그렇게 한번 만나 뵙고 싶은 부처님이 앞에 계신데 말이에요. 이것도 앞서 말씀드렸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부족하고, 또 자기 골격의 전모를 보면서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옛 스님의 글 중에 신심동조(神心洞照)에는 성묵위종(聖默爲宗)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신령스러운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성스러운 침묵이 근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말이 요란하고 시비를 해서는 마음을 볼 수도 없고 마음의 편안함을 얻을 수도 없다는 것이죠.

부처님께서도 어느 날 비구들이 모여 있는 처소를 지나가시면서 비구들의 잡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비구들은 각자 출가하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한참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광경을 보고 이렇게 경책하셨습니다.

수행자는 어떤 경우에도 법(, 진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라.”

이것은 곧 할 말만 하라는 겁니다. 진리에 관한 것만 하라는 것이고요. 그리고 그 외에는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침묵이라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밥을 지으면 뜸이 들어야 되고, 장을 담글 때도 심혈을 기울여 발효시켜야 장맛이 나잖아요. 참 침묵은 바로 가장 사랑스러운 말을 고르기 위한 긴장의 시간입니다. 단순한 고요함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는 정말 바른 주장을 하기 위해 더듬고 있는 성실함이고요.화려하게 말을 잘 하는 건 자랑거리가 못 됩니다. 조금 느리고 더디더라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게 더욱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한 참 침묵이야말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법정 스님도 생전에 우리에게 침묵을 당부하셨던 겁니다.

만남에 필요한 예의 갖추자

요즘은 말이 홍수처럼 쏟아집니다. 말이라는 것은 관심을 갖고 노력하는 만큼 달라지긴 하지만 세상에는 말로 인한 탈도 많고, 일도 많습니다. 여러분도 지금껏 별 생각 없이 내뱉었던 자신의 말이 어땠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요? 그런 과정을 거친다면 스스로도 더 좋은 말을 하기 위해 고민하게 되고, 그것이 곧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몇 번의 특별한 만남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사람과의 만남, 둘째는 시대와의 만남, 셋째는 사상과의 만남, 넷째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의 만남입니다. 이 중에서도 넷째 세상과의 만남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과 만나지 않는다면 통일을 걱정할 일이 무엇이 있고, 노동이나 개혁을 걱정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을 걱정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있고, 만나고 있다는 겁니다. 이 만남 자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만남 얘기를 하다 보니 일상생활에서 이뤄지는 만남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만남을 충실하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저는 그 중 가장 중요한 게 약속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상사 일요초청법회에서 가장 많은 불자님들이 법문을 듣고 싶어 하는 스님이 아마도 종범 스님일 겁니다. 저는 제 은사스님과 종범 스님을 오래 전부터 모시고 공부할 수 있었기에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종범 스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약속을 잘 지키기만 해도 성공할 수 있다.”

성공의 열쇠는 다른 게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종범 스님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약속장소에 나갈 때도 예의가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아랫사람을 만날 때는 10분 늦게 가거라. 윗사람을 만날 때는 10분 먼저 가거라.”

종범 스님은 약속시간은 꼭 지키는 것이 맞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아랫사람이 늦는다면 그 미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기에 윗사람으로서는 조금 여유 있게 약속장소로 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대로 아랫사람은 조금 일찍 나와 윗사람을 맞이하는 예의를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셨고요.

세월은 부드러운 회초리

세월은 참 거침없이 흐르기 마련이죠. 한때 마음속으로 품었던 저 사람 좀 안 볼 수 없을까?’ 아니면 저 사람 좀 안 나오면 안 될까?’와 같은 생각도 세월이 지나면 바뀌게 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먼저 바뀔 수도, 혹은 나 스스로 먼저 바뀔 수도 있습니다. 세월이 가져다주는 일종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번 돌아봅시다. 물론 모든 불자님들이 다 그렇진 않겠지만 여러분이 젊었을 때 소중히 여겼던 신념가치소신야망 등등. 모두 갖고 계십니까? 이제와 돌아보니 다 덧없었던 것이잖아요.

요즘 자녀들이 부모에게 나는 돈도 명예도 다 필요 없다. 오로지 난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반항했다고 예를 들어봅시다. 그럴 때 부모로서 여러분은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잔말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호통을 치거나 자식 때문에 복장 터져 죽겠다고 하소연 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젊어서 안 그러셨나요? 사랑 말고는 가치 있는 것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고 외쳤던 그 젊은 시절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나는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세월이야말로, 시간이야말로 부드러운 채찍이고 회초리입니다. 단박에 어떤 깨달음을 주진 못하지만 우리가 삶을 살면서 경험하도록 부드럽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이 세계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또는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영혼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등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즉답을 보류하셨습니다. 현재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걸 안다고 해서 고통이 해결되는 건 아니라고 보신 겁니다.

독화살의 비유에서도 부처님은 세상이 무한하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수행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독화살을 맞았음에도 이를 뽑지 않고 누가 쐈는지, 화살의 재질이 무엇인지 생각한다면 독이 퍼져 죽기 때문입니다.

부모에 대한 효행이 곧 공불(供佛)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성냥개비 하나, 이쑤시개 하나도 말입니다. 모든 것이 필요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그냥 생긴 건 없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러분도 어마어마하게 큰일을 하려고 사람 몸을 받고, 부처님 법을 만난 겁니다. 늘 법당을 찾아와 기도를 올리는 불자님들을 볼 때면 많은 복을 짓고, 서원한 일을 이루시길 바라곤 합니다.

다만 우리가 경계해야할 것은 내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내가 무엇을 하기 위해 사람 몸 받기를 원했는가를 잊지 않도록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그 본원을 망각하지 말고, 자신이 가진 게 없다고 애달파하지 마세요. 그리고 남과 비교하지 마세요. 없는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본래 없는 걸로 애달파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 본래 있는 걸 찾도록 노력하세요. 충만한 마음을 찾아 자비 가득한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꽃이 지고난 뒤에야 봄이었음을 알고, 사람을 보내고 난 뒤에야 사랑이었음을 알고, 볼 수 없게 된 뒤에야 그리움에 한숨짓습니다. 여러분은 항상 부처님 가르침을 만난 인연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세요. 그리고 부모에 대한 효행을 게을리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부모에 대한 효행의 공덕을 강조한 대승본생심지관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모든 세간에 무엇이 가장 부()하며 무엇이 가장 빈()한가. 부모가 집에 있는 것이 부요, 부모가 있지 않은 것이 빈이다. 부모 있을 때가 한낮이요, 부모가 죽었을 때 해가 진 것이며, 부모 있을 때가 달빛이 밝은 것이고, 부모가 죽었을 때가 어두운 밤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들은 부지런히 효행을 닦아서 부모를 효도로써 받들어 모시면 공불(供佛)하는 것과 복이 같을 것이니 이와 같이 부모의 은혜를 갚으라.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그때가 가장 행복한 때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가장 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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