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茶 평생 의지처로… 초의의 막후 후원자

고성암 보은산방서 스님들과 교류
만덕사·대흥사 대중들과 더욱 각별
정병·발우 마련, 초의와 우의 다져
만덕사 수룡 스님 입적에 절절한 애도

강진 백련사 응진전 전경. 이전에는 만덕산에 있다고 해서 만덕사라고 불리었다. 정학연은 아버지가 기거했던 보은산방에서 만덕사, 대흥사 승려들과 깊은 교류를 나눴다.
유산 정학연(酉山 丁學淵, 1783~1859)은 다산의 장남이다. 초명은 학가(學稼), 자는 치기(穉箕)였다가 후에 치수(穉修)로 바뀌었다. 호는 유산(酉山), 백아노초(白雅老樵), 철마산초객(鐵馬山樵客) 등을 사용하였다. 시문에 능해 추사나 홍현주, 홍성모, 이만용 같은 사대부들과 교유하며 두릉시사(杜陵詩社)를 주도했다.

그가 강진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로 부친을 찾아간 것은 1802년 겨울 무렵이며, 1805년 겨울에 다시 부친이 계신 강진으로 내려갔다. 당시 고성암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수행하던 승려들에게 주역(周易)을 강학하던 부친을 모시고 겨울 한 철을 보낸다. 당시 유산이 강진에 내려왔지만 동문매반가의 단칸방에서는 이들 부자가 함께 머물 수 있었던 형편은 아니었던 듯하다. 이런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아암은 이들 부자가 함께 추운 겨울을 편히 보낼 장소를 마련했는데 이곳이 바로 보은산방이다.

따라서 유산은 고성암 보은산방에서 만덕사 승려들뿐 아니라 일부 대흥사 승려들과 넓은 교유를 확대했으며, 이들과 교유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와 차를 가까이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초의는 1809년 운흥사에서 대흥사로 수행처를 옮긴 후에 다산초당을 드나들며 유산이나 황상, 윤종영, 윤종심 등을 만난다. 이들은 평생토록 교유하며 우정을 이어갔다. 특히 초의가 추사를 만난 인연도 유산 때문이었으니 그는 초의와 경화사족들을 이어준 가교이자. 후원자였던 셈이다. 따라서 유산이 초의에게 미친 은덕(恩德)은 그의 부친만큼이나 컸기에 초의의 막후 후견인으로서 미더운 우정을 나누웠던 이들의 만남은 조선 후기 아름다운 유불(儒佛)의 교유로 회자될 만하다.

한편 유산의 일생은 그리 평탄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아버지의 정치적인 어려움에 묻혀 자신의 소신을 펼 기회를 얻지 못했던 그에게 말년에 겨우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로 임명되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그가 처한 현실은 녹녹하지만은 않았다. 사옹원 봉사로서 분원의 개혁의지를 드러냈지만 그의 포부와는 달리 정치, 사회적인 질서가 허물어지던 시기의 현실에서 그가 뜻한 대로 이행하기는 어려웠다.

이미 사옹원을 둘러싼 관리들과 종친의 이권개입을 피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 백자의 질을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에 잡혀간 조선피로사기장(朝鮮披露砂器匠)의 후손들과 접촉하는 등, 분원의 개혁을 시도하려했던 그의 뜻은 실현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음서직(蔭敍職)으로 분원의 관리가 된 그였기에 현실적으로 과거를 통해 등용된 관리들의 차별을 감수해야만 했다.

실제 학계에는 그가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에 임명된 것은 1855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1846년 2월에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그가 분원의 일에 간여난 시기가 1855년보다 앞당겨 보아야할 듯하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산 정학연이 범해 각안에게 쓴 편지. 유불간 교류를 알 수 있다. 일산 원각사에 소장돼 있다.
수룡스님이 입적하셨다니 천리에서도 마음의 상처가 큽니다. 이 노스님께서 일찍이 고성암 보은산방에서 아버지를 모신 사람이라 (누구보다)그립고 아낌이 출중(出衆)납니다. (더구나)옛 친구가 돌아갔다니 어찌 슬퍼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다비는 마쳤겠지요? 모든 일이 끝났겠지요. 봄추위가 품을 파고듭니다. 이런 때에 수행은 청건(淸健)하시며 용상(龍象)도 모두 편안하지요. 철우 노스님의 근황은 어떻습니까. 소식을 듣지 않은 지가 아득히 오래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망연히 노심초사하여 잊을 수가 없습니다. 늙은 저는 4년 동안 괴이한 병이 들어 머리가 부도(浮圖)의 정수리처럼 되었고 이빨은 마치 썩은 흙 장승같으며, 눈은 해골 구멍처럼 광채를 다 잃어 일말(一末) 싸늘한 시체와 같습니다. 수룡스님의 좌탈한(坐化)것과 견줄만하여 도리어 한 계책을 따를 뿐이니 스스로 가련해한들 어쩌겠습니까. 무엇으로 말미암아야 사뿐히 걸어 천천히 멀리 가는 객과 같겠습니까. 어느 날, 내직(內直)께서 상원(上院) 여암(如菴) 사이에 이르렀을 때에 스님들과 편안하게 담소한 것은 이사람 뿐이었습니다. 부고를 전하는 글을 대하니 눈물이 흐를 뿐입니다. 분원(分院, 광주분원) 자기 창에서 생산되는 묘한 그릇 중에 스님께서 쓰실 정병(淨甁)과 발우(飯鉢)를 찾아 둔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인편이 마땅치 않아 보내지 못했습니다. 다시 어찌 해야 할지요. 마침 감천(紺泉윤종심)이 파수(水)를 건너간다고 하니 산란한 마음으로 몇 줄 편지를 썼습니다. 어느 날 스님께 도달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머지는 이만. 1846년 2월 28일 유산 병부 화남(袖龍笙寂 千里傷神 此老曾侍先人於山房野寺者 而眷愛出衆矣 舊交零落 寧不悲歎 已茶毗否 萬事已矣 春寒入懷 此辰 法履淸健 龍象皆安 鐵牛老師禪? 更如何 漠未聞消息 有時?然 勞心無以忘矣 老物怪疾四年 頭如浮圖頂 齒如朽?人 眼如??孔 神彩都亡 一末冷屍 比袖龍坐化 還遜一籌 自憐 奈何 何由快步 如徐霞客 一日內直到上院如菴之間 與師輩?拂穩談 此生已矣 臨紙然耳 分院瓷廠産妙瓷 覓師輩淨甁飯鉢 置之已久 而無以因風吹送 亦復奈何 適因紺泉渡行 數行書 未知何日達梵展 都留 不究書式 丙午 二月 卄八日 酉山病夫 和南)

이 편지는 1846년 2월에 보낸 것이다. 그가 “분원(分院, 광주분원) 자기 창에서 생산되는 묘한 그릇 중에 스님께서 쓰실 정병(淨甁)과 발우(飯鉢)를 찾아 둔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라고 했다는 점에서 실제 그가 분원에 간여한 시기는 학계에 알려진 1855년경 보다 앞선 시기인 1846년경부터 간여했다는 것을 밝힐 자료가 발굴된 셈이다. 따라서 그가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로 분원의 일에 간여한 시기는 1846년경 부터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의 편지에서 언급한 수룡색성(袖龍性, 1777~1848)은 만덕사 아암의 고족(高足)으로, 차를 잘 만들었으며 시와 글씨에도 능했던 승려였다. 수룡이 다산의 전등계 제자 중에서도 으뜸으로 이름을 올린 것은 그만큼 다산과의 인연이 돈독했음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수룡의 입적 시기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유산의 사옹원 봉사의 임명 시기와 수룡의 입적 시기가 1846년이었음을 함께 밝힌 자료인 것이다. 이뿐 아니라 수룡은 유산이 강진을 내왕하던 시기에 만나 오랫동안 교유했던 승려로, 유산이 불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내직(內直)은 다산이 예문관 검열과 사간원 정언(正言), 사헌부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던 적이 있었기에 이리 부른 듯하다. 상원(上院)내암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승려들과 담소했다는 사실에서 다산이 머물던 고성암이나 만덕사가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무엇보다 친밀하게 소통했던 수룡의 열반은 유산에게 있어 “천리에서도 마음의 상처가 큽니다. 이 노스님께서 일찍이 고성암 보은산방에서 아버지를 모신 사람이라 (누구보다)그립고 아낌이 출중(出衆)납니다. (더구나)옛 친구가 돌아갔다니 어찌 슬퍼 탄식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던 것이다.

수룡의 열반 소식은 그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었으리라.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초의를 향한 그의 속내는 “분원(分院 광주분원) 자기 창에서 생산되는 묘한 그릇 중에 스님께서 쓰실 정병(淨甁)과 발우(飯鉢)를 찾아 둔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인편이 마땅치 않아 보내지 못했습니다. 다시 어찌 해야 할지요(分院瓷廠産妙瓷 覓師輩淨甁飯鉢 置之已久 而無以因風吹送 亦復奈何)”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자신이 관여하는 분원에서 생산되는 자기 중에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초의에게 보내고자한 그의 마음은 이처럼 친밀하고 따뜻했음을 드러낸 대목이다.

마침 초의와도 내왕이 있는 윤종심이 해남으로 떠난다기에 이 편지를 쓴다는 사연도 함께 밝혀 두었다. 바로 감천(紺泉)은 윤종심으로 다산의 다신계제자이다. 다산이 해배된 후에도 해남의 다신계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대흥사 승려들과 교유하며 시회(詩會)를 여는 등, 스승의 유풍(遺風)을 잊지 않았는데 이는 윤종심이 쓴 〈가련유사(迦蓮幽詞)〉에서 확인된다.

유산 정학연의 글씨. 황상에게 쓴 글이다. 유산은 시문에도 매우 능했다. 〈개인 소장〉
유산이 시문에 밝았던 선비였음은 이미 두릉시사(杜陵詩社)를 이끌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거니와 선종의 수행법인 참선(參禪)에도 이해가 깊었다. 이러한 사실은 1831년경에 지은 그의 시를 통해 확인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쟁그랑 울리는 대지팡이 소리,
오히려 멀리서도 들리는데(?然竹錫遠猶聞)
슬피 바라보니 참으로 무리지어 날아가는
학과 같구나(?望眞同放鶴群)
느릅나무 서 있는 서당에는 오직 담담한 달빛뿐
(鍮葉西塘惟澹月)
귤 꽃 피는 남쪽 산마루에 외로운 구름이라
(橘花南嶺自孤雲)
참선을 파하면 도연명의 꿈을 품을 수 있겠지만
(罷禪可有懷陶夢)
잔병에 지쳐 글 지어 보낼 수도 없네
(淹病仍無送暢文)
연사에서 동맹을 맺음이 부질없는 일이라
(蓮社結盟渾?事)
서리 내린 귀밑머리가 이미 삼분의 일이라네
(?邊霜雪已三分)

초의의 시에 화답할 당시 그의 나이는 불혹(不惑:40살)을 지나 오십에 가까웠다. 귀밑머리는 이미 삼분의 일이나 서리가 내린 듯 백발이 되었다고 하였다. 분명 “쟁그랑 울리는 대지팡이 소리”는 초의를 말하는 것이며 그의 수행자다운 품색은 “무리지어 날아가는 학과 같”다고 했다. 이는 학은 깨끗한 기상을 가진 초의를 빗댄 말이다. 이미 학처럼 맑디맑은 초의와의 이별도 그저 “슬피 바라”볼 뿐이었던 그였다. 남쪽 산마루는 초의가 있는 곳, 산마루에 걸린 자유로운 구름처럼 초의는 걸림이 없는 운수납자였다.

유산 자신도 속세에는 살고 있지만 참선하고 나면 유유자적하던 도연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린 그로서는 글 쓸 힘조차 없었다. 그의 우환은 이미 앞서 소개한 편지에도 “늙은 저는 4년 동안 괴이한 병이 들어 머리가 부도(浮圖)의 정수리처럼 되었고 이빨은 마치 썩은 흙 장승같으며, 눈은 해골 구멍처럼 광채를 다 잃어 일말(一末) 싸늘한 시체와 같다”고 하였다.

따라서 초의 같은 승려들과의 굳은 결의도 부질없는 일이라 하였으니 그는 무상함과 공(空)도리를 깊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욕이 교차된 그의 삶에서 승려들과의 교유를 통해 불교를 이해했던 일이나 차의 진미를 알았던 것은 실로 간난했던 그의 일상의 의지처였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찍이 부친의 가르침으로 농사법이나 의술 등, 실용적인 학문에 눈떴던 그는 〈종축회통(種畜會通)〉, 〈유산총서(酉山叢書〉〉를 남겼다.

그가 지은 시는 〈삼창관집(三倉館集)〉에서 그 규모를 살펴 볼 수 있고, 두륜산(해남 소재 대흥사)을 유람한 후 쓴 ‘유두륜산기(遊頭輪山記)’를 남겼다. 이 밖에도 그의 편지를 묶은 〈유산척독(酉山尺牘)〉과 〈십병함해(十病函海)〉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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