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죽고 생활하는 게 그대로 불교고 그대로 참선!

당당하게 땅을 짚고 일어나거라.
절름발이가 되지 말고, 눈 뜬 장님이 되지 말고, 귀머거리가 되지 마라.
이 우주 천하 모든 도리천은 너의 마음에 직결되어 있다.

여러 지원에서 온 신도님들이나 본원의 신도님들이나 다 같이 한자리를 하게 돼서 더욱더 반갑습니다. 언제는 뭐 아니었습니까마는 오늘 뵙고 보니까 특별히 더 반갑습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드렸지마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죠. 그렇듯이 인간의 생명도 바로 한데 뭉쳤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생물이 생긴 것도 역시 지수화풍이 한데 합쳐졌기 때문에 생명체가 생기듯이, 우리 한 몸뚱이가 나오려면 양 부모의 뜻과 내 영혼의 뜻과 또 그 형체가 형성되면 작용해 줄 수 있는 그 업식, 그 의식들이 악하든지 선하든지 자기가 지은 대로 다 합쳐서 이 세상에 형성돼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말씀드렸지만 지수화풍이 아니라면 인간이 살 수도 없고 또 최고의 동물로서 활동도 못할 겁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본다면 우리 이 지수화풍이 바탕이 돼서 모든 것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연구를 할 때도 내 마음을 떠나서 연구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을 통해서 두뇌로 해서 연구가 되는 거죠.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게 연구가 돼서 지금 세계적으로 없어서는 아니 되는 그런 물질이 개발되고, 지금 현재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죠. 지수화풍이 아니라면, 그것이 바탕이 되지 않았더라면 뭐 고체니 기체니 액체니 이러한 말도 없었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것으로 하여 또 레이저 광선이 개발이 됐죠? 물론 그것보다도 더 여러 가지 현명한 이름들이 많겠지마는, 그걸 방편으로 예를 든다 하더라도 손색은 없을 겁니다. 그 이름이 바로 레이저 광선입니다. 그 레이저 광선을 지금 얼마나 유리하게 세상이 다 쓰고 있습니까? 병원이라면 병원, 떠다니는 비행기 또는 하늘 꼭대기로 쏘는 거, 일거일동입니다. 라디오, 텔레비전 할 것 없이 말입니다, 전화까지도. 그것뿐이 아니죠? 일체가 지금은 그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빠르고 그렇게 속성과로 그렇게 다양하게 쓰여지는 그런 레이저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 다양하게 쓰여지고 있는 건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지요? 없어서는 안 되죠? 속에 병이 들어도 거기다 광선을 쫴야 하고, 또는 재는 거라든가, 쏘는 거라든가 아주 일품으로 쓰이죠?

그런데 지금 우리가 앉아서 공부하는 거…, 한마디 더 하고 넘어가죠. 레이저 광선은 어디나 쓰여지는 겁니다. 멀리도 갈 수 있고 가깝게도 갈 수 있고 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공부하는 것을 한번 그걸로 비교를 해 보십시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과거로 돌아갔다가 올 수도 있고, 미래로 갔다가 올 수도 있고 또는 어떠한 업식이라도 녹일 수 있고, 즉 말하자면은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윤회성이나 또는 어떠한 거든지 유전성 영계성 세균성 업보성, 이 모두를 녹일 수가 있는 공부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만 명이 있다 하더라도 동시에 내가 될 수 있는 공부입니다. 만 명이다 하면 숫자를 놓는 게 아닙니다. 숫자가 없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어떤 거든지 나투어서 응신이 돼서 내가 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둘이겠느냐.

그것뿐이 아닙니다. 이 공부는 과거로 돌아갔다가 미래로 돌아갔다 마음대로 자유자재할 수도 있거니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찰나찰나에 지금 생활 속에서 나오는 모든 업보 그 자체를 녹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가깝든지 멀든지 그걸 불문에 부치고 끌어다 보려면 끌어다 보고, 놓고 보려면 놓고 보고, 갖다 먹을 수 있으면 갖다 먹고, 갖다 줄 수 있으면 갖다 주고 맘대로 할 수 있는 공부입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수가 있다는 공부입니다. 날아가는 새나 비행기나 뭐가 다릅니까? 뭐든지, 로켓도 올라가는 걸 멈추게 하려면 멈추고 없애려면 없애고 할 수 있는 공부입니다. 이건 엄청난 공부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말로 어떻게 다 하리까? 자유대권을 갖는데…. 이 천지, 우주 천지의 모든 대권의 소유자인데….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그렇기에 부처님께서도 근기에 따라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만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요만큼 얘기를 하시고, 이만큼 가진 자에게는 이만큼 얘기를 하셨습니다. 아무리 줘도 흘려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거는 말로, 지식으로, 학식으로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 유마힐 거사가 같이 도반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방편으로 보여 주신 거는 어느 누구도 이런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그 표현을 해 주신 겁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지구에서 이렇게 살아나가는 동물로서 어떤 때 생각을 하면, 이 모두가 아픔을 껴안고 먹고 또는 먹히면서 전쟁 아닌 전쟁을 해야 하는 이런 판국에서 하치않게 생각이 되면서도 그 생명의 존엄성은 엄연합니다. 이 인간만 그런 게 아닙니다. 미생물에서부터 쭉 계속해서 올라오면서 인간까지 말입니다. 얼마나 치열한 싸움입니까? 꼭 칼을 들어야만이 싸움이 아닙니다. 뼈저린 아픔을 견디면서 참으면서 살아왔는데 좁게만 보지 마시고 넓게 한번 펼쳐서 봐 보십시오. 어떠한가?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육체적 장애자뿐만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장애자도 장애자인 것입니다. 정신장애자도 장애자인 것이고요. 그것뿐이 아니지 않습니까? 멀쩡하게 살다가도 병신이 되고, 이것이 누가 뒤에서 쫓아오고 쫓는 게 아니라 쫓아가 잡아먹으려고 하면서 또 잡아먹히는 이러한 세상을 모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모두 사는 게 쓸데없이 생각이 되고요. 허! 기가 막혀서 하늘을 쳐다보고 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 내 몸, 내 가정만 생각하고 모든 걸 아주 좁게 살아나가는 여러분이 계시니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러니 더 막막하단 말입니다. 어떤 땐 기가 막혀서 그저 나같이 바보라도 됐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먹고 먹히는 그런 항아리 속에서 쫓고 쫓기지는 않겠죠.

이 불교에서 불법이다 불교다, 사찰에 가면은 그저 부처님 믿는 걸로 이렇게 생각들 하시지만 그게 아닙니다. 부처님은 당당하게 “너부터 알라.” 그랬습니다. 네 몸뚱이가 내 몸뚱이하고 다른 게 있느냐? 네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다른 게 있느냐? 생명도 다른 게 없고 마음도 다른 게 없고 몸도 다른 게 없다. 그러나 생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항상 말하지마는 기독교니 가톨릭교니 뭐 알라신교니, 원불교니 불교니, 이렇게 모두 방방곡곡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가만히 보면 전부 기복이에요. 어쩌면 그렇게…. 자기 앞 한 치도 내다보지 못하게 막아 놓고 어쩌면 그렇게 상대로만 믿고 가요? 상대를 믿고 그렇게 가다 보면은 세세생생을 두고 항상 노예밖에 더 되겠습니까? 종노릇밖에 더 하겠습니까? 종노릇 하라고 부처님께서 가르친 게 아닙니다. “당당하게 너는 땅을 짚고 일어나거라. 절름발이가 되지 말고, 눈 뜬 장님이 되지 말고, 귀머거리가 되지 마라. 이 우주 천하 모든 도리천은 너의 마음에 직결되어 있다.” 이렇게 가르치신 겁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유마힐 거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스님네들이 앉아서 좌선하고 있는 걸 보면 “좌선을 했다 일어나면 끊어지지 않느냐.” 하고 충고도 했고, 여러 가지로 말입니다. 또 “내 몸이 나으려면 중생들이 다 나아야 내 몸이 낫지 않느냐.” 하기도 했고, 그것을 얼른 생각해서 내 내면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모두 바깥으로 그 말씀만 받아들여서, 이 바깥의 중생들을 다 거둬야 자기 몸이 낫는 걸로 이렇게 착각을 하고 있어요. 내 몸속의 중생들이, 그 생명의 의식들이 작용을 해서 그 모든 의식들이 병이 나아야 나도 낫는 거 아닙니까? 각자 여러분 말입니다. 얼마나 현명합니까? 몸속의 그 생명의 모습, 의식들이 바로 나와 네가 둘이 아니라는 거를 알게 만들어 주는 것도 내 마음입니다.

내가 항상 얘기했죠, 지구가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우리는 가늠할 수가 없노라고. 모든 오장 육부의 생명들, 생명체는 우리 인간이 부산으로 가는지 서울로 가는지 모릅니다. 그걸 알게 해 줘야죠. 내 마음먹는 대로 같이 뭉쳐서 같이 한마음을 내서, 들일 건 들이고 낼 건 내고 자유자재권을 형성시켜서 나가야 그것이 천백억화신으로 화(化)하죠. 나의 그 모든 수십억의 의식들은 바로 한마음으로 뭉쳐서 내가 생각하고 내가 말하는 대로 바로 같이해 줄 수 있는 그런 심력이 길러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거를 모르고 믿질 못해서 의식들은 의식들대로 놀고, 즉 말하자면 위 공장은 위 공장대로 따로 놀고, 장 공장은 장 공장대로 따로 놀고, 방광 공장, 척수 공장, 척추 공장, 콩팥 공장, 심장 공장 죄 따로 노는 겁니다. 죄 따로 노니까, 호랑이 없는 산에 여우가 선생이라고 그러죠. 내가 제일이라고 하거든요, 모두가. 그러니 내 마음을 따라 주지 않는 거죠. 그렇게 되면 앞에 어떠한 용도가 닥친다 하더라도 그건 대치를 못합니다.

내 마음속에, 이 마음이 잡을 것도 없고 쥘 것도 없고 빛깔도 없는데 그렇게 역력하게 빛깔이 있고 잡을 수 있다면, 이 삼천대천세계를 집어삼킬 수 없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러한 대권을 가질 수도 없는 겁니다.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렇게 많은 여건에 따라서 내가 이거는 꼭 필요하다 할 때, 괜히 장난으로 하는 것 말고요. 이게 필요하다 할 때 그거는 틀림없이 레이저 광선이 쏴 들어가듯이, 그것보다도 더 빨리 한 찰나에 드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들, ‘옛날의 선지식들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향권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두 자신들을 믿지 못해요. 그렇게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 우주 천지를 다스리겠습니까? 우주 천지를 다스리는 것도 내가 높아서 다스리는 게 아니어야 됩니다. 불에 들어가면 불덩어리로 하나가 되고, 물에 가면 물로 하나가 되고, 공기로 가면 공기로 하나가 되고, 흙으로 가면 흙으로 하나가 되고, 어떠한 보이지 않는 영계로 가면 영계로 하나가 되고, 산 사람으로 가면 산 사람으로 하나가 되고, 모든 것이 내가 될 수 있어야만이 그런 여건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 몸뚱이 속에 자기와 동료로서 같이 움죽거리는 그것도 못 믿으니 어떡합니까? 예? 그것부터 믿어야 되는데. 아무리 회초리가 가늘고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한데 합쳐서 이렇게 뭉쳐 놓으면 꺾을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내 몸뚱이 속의 그 수십억 의식들이 한데 합쳐서 돌아가는데 어찌 그걸 꺾겠습니까? 이것부터 아셔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아프니까 아픈 것이 낫지 않으면 ‘에이, 주인공도 쓸데없어.’ 이렇게 일축해 버리는 분들이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이거 맡기는 것이 안 되면 또 ‘에이그!’, 그렇게 ‘에이그!’ 하고 버릴 사람이니까 안 되는 겁니다. 이런 일이 있었지요. 저 충주 시멘트 공장에 다니는 사람인데 부인이 백혈병에 걸려서 왔습니다. 구박이 자심하고 그래서 왔다고 울면서 그때 25만원인가 정성을 들이면서 쌀 한 말에 초에 이렇게 해서 가져왔습니다. 여기 이소저 할머니가 여관 하실 때죠. 그런데 그때는 이렇게 여러분한테 마음공부를 가르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성과로 아주 들어갔죠. 마음공부는 못 시킬망정 그 애로점을, 그 울고불고하는 거나 없애주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죠. 그런데 그 병이 나아서 갔습니다. 그 여관에서 며칠 있으면서 그냥 병원에 가서 다시 진찰을 해 보니까 이거 오진을 했다고 하면서 내보냈습니다.

그랬는데 남편이 그 소리를 듣고 말입니다, 오진이라는데 왜 그런 돈을 없앴느냐 하면서 돈을 찾으러 왔습니다. 허허허. 그때 찾으러 오기 전에 이런 말을 했죠, 이소저 할머니더러. “그 쌀하고 초하고, 꼭 그 보따리를 놔두십시오. 그 봉투도 건드리지 말고요.” 이랬습니다. 그랬더니 “왜 그것을 꼭 두라고 하십니까? 신도들 오는데 밥이라도 해 주지.” “그냥 놔두십시오. 쓸데가 있습니다.” 이랬는데 아, 찾으러 왔답니다. 찾으러 왔으니 안 줄 장비(張飛)가 없죠? 하하하. 무슨 그거를 탐내고 그러는 사람 같으면 “부처님 앞에 정성들이고 간 거를 왜 되찾으러 왔느냐?” 이러겠지만, “가지러 올 줄 알고 여기 놔두었다.” 그러고 보냈단 말입니다. 보냈는데, 그 부인은 나았는데 반대로 본인이 암에 걸렸단 말입니다. 하하하.

그러니까 그 업식이라는 거를, 그 업보라는 거를 면치 못하는 겁니다, 이게. 이게 하나에 종속되어 있는 게 아니거든요. 이거를 없애면 저게 생기고 저거를 없애면 이게 생기고 이러는 거니까, 그게 그렇게 될 수밖에요. 그래서 그것을 그렇게 찾아가고는 염치가 없으니까 못 오죠. 그런데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후에 어떤 사람이 와서 그렇게 딱하다고, “하이고, 그렇게 그 부인도 어린애 못 낳는 것 어린애 낳게 해 주시고, 미친 것도 낫게 해 주시고, 또 백혈병도 낫게 해 주셨다는데 그것 좀 낫게 해 주십시오.” 하기에 “아이, 내가 뭐 병원의 의사입니까?” 이럭하고선, 그래도 마음으로 안됐어서, 그저 간간이 감자물이라도 해 잡수라고 했는데 그 감자물이 낫게 하는 거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살아 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마는, 우리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죽고 사는 걸 떠나야만 그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 되는 겁니다. 내가 만약에 아이고, 죽는 게 두렵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건 부처님이 있으면 살려야지 죽이는 법은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이거 안 되는데, 이거 안 되니깐 주인공도 쓸데없는 게 아닌가?’ 이렇게 올팡갈팡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주인공은, 수억겁 광년을 거쳐 미생물에서부터 존재해 왔다는 겁니다. 나를 형성시키고 진화시키고, 쫓고 쫓기면서 형성시켰단 말입니다. 그래서 고등 동물까지 이끌고 온 장본인을 믿지 않는다면은 그건 어떡합니까? 거기서만이 나오는 거니까 거기에서만이 그 해결을 하지, 마음으로 병난 거는 마음으로 해결을 해야 하고, 육신이 병난 거는 육신으로 대치를 해서 병원에서 고쳐 나가는 거죠?

이 물질적인 문제도 또 없어서는 안 되지. 일체 만물이 있기 때문에 이 마음 염파가 걸러 걸러 돌아가면서 이것이 확립이 되니까요. 그러니까 찰나에 쏜살같이, 한 생각이 일어났다 하면 그대로 그냥 한꺼번에 전달이 되는 거니까요. 하나가 이렇게 섰다면…, 이 자가발전소라고 표현을 해도 되겠습니다. 여기 발전소에서 전력이 나갈 때는 그냥 동시에 쫙 전력이 나가듯이, 마음에서 한 번 생각하면은 이 두뇌로 해서 사대(四大)로 그냥 전파가 되고 통신이 됩니다. 통신이 되면 내 마음대로 이 모든 것이 따라 주니까, 그냥 이 마음은 체가 없어서, 의식도 체가 없어서 나가면서 들어오면서 주위의 모든 것을 다 살피고 그래서 내 신장이 내 부처를 동시에 적절히 모시고 다니는 거죠.

이 모두가 옛날이 아닙니다. 작년 재작년만 하더라도 어느 청년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스님, 저는 뭐 아무것도 몰랐는데….” 고등학교 학생인데요, 가방을 메고 어느 골목길에 들어섰는데 한 열댓 명이 착 나서더니만 그냥 칼을 들고 위협을 하더랍니다. 그 순간 급하니까 내가 일러 준 생각이 났더랍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거죠. 이거 이럭하면 어떻게 되는 건지도 모르고 그냥 그 순간 ‘아이고, 주인공!’ ‘아이고, 스님! 주인공!’ 급하니깐요. 그러고는 그냥 거기다가 전념을 다하느라고 그 열다섯 명이 칼을 들었는지 뭐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멍청이처럼 우두커니 쳐다보고 섰으니까, 오더니만 아래위로 딱 전부 뒤지더니 돈 만 원이 나오니까 돈 만 원만 가지고선 “에이, 여기 이 새끼는 속에 시계도 차고 그랬지만 아무것도 볼 것 없어.” 그러고선 아, 그대로 가더랍니다. 발길질 한 번 안 하고 그렇게 했다는 것은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하고 다 간 뒤에 벌컥 주저앉아서 ‘야, 이런 거로구나!’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이런 거로구나!’ 하고. 여기다가 그렇게 급하게 맡기니까 급하게 조달이 된 거죠.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의식들이 그 사람들의 마음속을 다 점령을 해 가지고, 그 악하게 마음이 됐던 것을 선하게 이렇게 해 놓으니까 그냥 갈 수밖에요.

이게 어떻게 생각하면 알고 모르고 이걸 떠나서 이렇게 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경전을 달달 외우고, 학술적인 지식적인 뭐를 가지고 거기에 그냥 딱 죄여서 머리가 굳어 가지고는 옴짝을 못하는 경우가 많죠. 살아오면서 그것이 관습이 돼서 아주 인이 박혔으니까요. 사람이 너무 약아서 요건 요렇다, 요건 못한다 한다, 이럭하면 잘되겠고 이럭하면 못되겠고, 이것이 아주 뚜렷하니까 거기에 딱 틀이 박혀서 믿음이라는 게 확실히 들어가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좀 무식하고 바보 같아야 더 빠르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아는 게 많으면 망설이는 게 많거든요. ‘이게 정말인가? 이게 거짓 아니야?’ 거짓이고 잘못이고 따질 게 뭐 있습니까? 자기가 자기 믿으라는데. 타의의 어떤 형상을 믿으래야 ‘이게 어떻게 되는 건가?’ 하고 살펴볼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중들의 고깃덩어리를 믿으래야 살펴볼 수도 있는 거지, 이름을 믿으라나 허공을 믿으라나? 아이, 이러니까 살펴볼 것도 없지요, 못났든 잘났든 자기 믿으라는데. 자기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고통도 없을 거고 즐거움도 없을 거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좌선하던 사람은 좌선만 해야 하는 줄 알고, 또 좌선하면 무슨 큰 불법을 깨닫는 도리나 얻을 줄 알고 이렇게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그냥 생활 자체, 이렇게 우리가 나고 죽고 생활하는 게 그대로 불교고 그대로 불법이고 그대로 참선이고 그대로 공안(公案)이고 그대로 여여함입니다. 그거를 아시고 생활 속에서, 내가 가고 오는 데서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주인공! 이 주인공이라 하는 거, 이 ‘공(空)’ 자가 들어간 거는 뭐냐? 고정됨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공이 들어가는 겁니다. 공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고정되게 한 가지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한 가지만 듣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저 찰나찰나 돌아가면서 그저 요것 보면 마음이 달라지고 조것 보면 또 달라지고, 요것 들으면 달라지고 조것 들으면 달라지고 이게 그냥, 아주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죠. 그러니 그 도리를 그대로 여여한 줄 알고, 그대로 참선인 줄 알고, 그대로 불교인 줄 알고, 살림살이하는 게 종교인 줄 알고 돌아가야만 이게 진실히 믿어지고, ‘죽는 것도 네가 죽게 하는 거고 살게 하는 것도, 형성시키는 것도 네가 하는 거다.’ 그렇게 믿게 되죠. 그런데 어디다가 생사를 붙일 겁니까? 그 생과 사의 가운데에 마음이, 움죽거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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