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법빠리사 운영책임 도반 이남재 씨

학생운동하며 사회문제 관심
불교의 대사회적 활동에 초점
나보다 ‘남’ 위한 삶 살아와
수행과 복지활동 양 날개 삼아
사회 선도하는 불교 거듭나야

▲ 이남재 씨는 … 광주 정광고등학교에서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며 불교에 입문했다. 1982년 부처님 가르침의 뿌리를 찾기 위해 동국대 인도철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민중불교운동연합·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파쇼헌법철폐투쟁위원회 등에서 활동했다. 1994년부터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 홍보팀장,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사무국장 소임을 맡았다. 1997~8년 일본 교토불교대학 유학 후 동국대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지구촌공생회 사무국장·민주주의불자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합천평화의집 사무총장·위드아시아 운영이사·서울 월곡청소년센터 관장 등을 맡고 있다. 사진=노덕현 기자

전두환 대통령을 타도하자!”

198232, 동국대학교 어느 단상에서 한 학생이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어디선가 전경들이 몰려들어 학생을 끌어낸 뒤 군홧발로 무자비하게 밟았다. 해당 학생은 전경들의 무력에 하릴없이 연행됐다.

동국대학교에 갓 입학한 스무 살 청년 이남재는 등교 첫날 이 같은 상황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했다. 그는 근본적인 부처님 가르침을 찾고자 인도철학과를 선택했지만 첫날부터 큰 혼란에 빠졌다. 학문의 상아탑이라고 생각한 대학에서 그가 마주한 것은 위대한 지식이 아닌 뼈아픈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두 발 딛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도외시한 채 그저 관념적인 내 공부만 할 것인가?’

청년 이남재는 한동안 고민했다. 그리고는 현실 문제를 직시하고자 학생운동에 발을 담갔다. 그는 노동현장에서 지내며 노동자들이 직접적으로 겪는 고충을 접하기 위해 학교를 1년간 휴학했고, 복학 후에는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파쇼헌법철폐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면서도 불교학생회·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활동을 통해 늘 부처님 가르침을 되새겼다. 특히 19855월에는 민중불교운동연합 창립에 함께하면서 불교 대중화에 앞장서기도 했다. 하지만 독재정권 타도에 앞장서며 정부의 눈엣가시가 돼 구치소 신세를 져야했다.

제가 인도철학과에 지원한 이유는 개인적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가다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그보다 눈앞에서 직면한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더군요. 휴학·구치소 생활·군복무 등을 다 겪다보니 대학교 졸업이 한참 늦어졌습니다(웃음).”

▲ 이남재 씨가 원폭피해자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1인 릴레이 시위를 하고 있다.

일본서 불교공부복지에 눈 떠
불교계, 그리고 시민사회계에서 30여 년째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이남재(53) . 그가 현재 맡고 있는 소임은 합천평화의집 사무총장과 ()위드아시아 운영이사, ‘원폭피해자 및 자녀를 위한 특별법추진연대회의공동운영위원장, 서울 월곡청소년센터 원장 등 단박에 외우기도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하지만 이렇게 수많은 소임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일이라는 점이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보살행에 빠지게 한 걸까?

이 씨는 1994년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 홍보팀장을 시작으로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며 불교계 전반에서 활동했다. 그렇게 일하기를 몇 년, 이 씨는 그동안 바쁘게 일하느라 할 수 없었던 불교공부가 문득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본 교토불교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본불교계의 적극적인 대사회적 활동을 보며 적잖게 놀랐다.

일본에서 1년 반 정도 유학을 했습니다. 일본의 종파불교에 대해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는데요. 공부를 하면서 여러 사찰을 다녀보니 일본불교계의 사회복지활동이 대단히 활발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조계종은 94년 개혁을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사회적 활동보다는 집행부 정리에 힘을 쏟을 시기여서 일본불교의 이런 모습이 무척 감명 깊었어요.”

이 씨는 유학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오자마자 동국대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해 복지를 공부하고, 허허벌판에 가까웠던 한국불교의 복지기반을 다지는 데 노력했다. 조계종사회복지재단의 제안을 받아 불교사회복지 현황조사에 나선 것이다. 그는 승합차 한 대로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 각지의 불교계 운영 복지시설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정리했다. 이런 그의 열정에 힘입어 1999년 한국불교복지의 현황을 망라한 한국불교사회복지총람이 발간될 수 있었다. 이후 점차 사회복지에 관심이 커진 이 씨는 서울 월곡청소년센터 원장직을 맡게 됐다.

처음 월곡동에 가서 느낀 건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야만 하는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골목도 좁아서 한 사람밖에 못 지나다닐 정도였고, 인근에 공부방이 없어서 학업과 멀어지기 쉬운 환경이었거든요. 그리고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조손가정이 많아 방치되는 아이들도 많았고요.”

이 씨는 월곡청소년센터 원장 부임 후 센터를 아이들의 공부방이자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또 무료급식을 위해 사찰을 찾아다니며 쌀을 지원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물론 결연후원사업을 펼쳐 아이들의 학비 걱정을 덜어주는 데도 힘썼다. 그 노력이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 민중불교운동연합 30주년 기념 토론회 및 기념법회에 동참한 이남재 씨.

국내외로 뻗어나간 복지원력
이 씨는 청소년센터 원장으로 일을 하면서도 빈곤국가 아이들의 어려움에 늘 관심을 기울였다. 물론 돕고 싶은 마음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그는 월주 스님을 찾아가 외국 불교국가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아이들의 삶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스님의 반응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국내에 어려운 사람도 많은데 굳이 외국까지 나가서 도와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 씨는 포기하지 않고 스님을 설득했다. 개신교계의 해외구호 활동을 비롯해 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훼불행위 등 같은 불교도로서 도와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했다. 또 월주 스님과 직접 불교국가를 돌면서 열악한 생활환경을 직접 경험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월주 스님을 설득하기 위해 함께 라오스 오지마을을 찾아다녔습니다. 당시 월서 스님도 함께 가셨는데 그제야 해외구호활동을 하자고 말씀하시더군요. 첫 시작은 직원이 몇 명 되지 않을 정도로 소소했는데 지금은 불교계를 대표하는 NGO단체가 됐죠.”

이 씨가 지구촌공생회에서 일하는 동안 라오스·미얀마·캄보디아 등에 지은 우물만 1000개에 달한다. 그는 이후 불교계 국제구호사업의 확대를 위해 지구촌공생회를 그만두고, 현 합천평화의집 운영위원장인 연암 스님과 함께 ()위드아시아를 설립했다. 캄보디아 오지마을에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공부방을 만들고, 당국과 협의를 통해 아이들이 중학교 진학에 불이익이 없도록 공부방 교육을 정규 교육과정으로 인정받게 했다.

해외구호사업에는 절대적인 원칙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주민들이 주체가 돼 마을을 이끌어가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방 교사도 초급교육대학을 나온 그 마을주민이나 이웃마을주민이 맡도록 했습니다. 단순히 주고 끝나는 일회성 지원은 오히려 이 사람들의 자립을 막는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죠.”

이토록 해외구호사업에 매진하던 그는 어느 날 연암 스님에게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원폭피해자와 그 후손들이 병마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특별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함께 일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간 어떤 사업도 주춤거리지 않고 성공적으로 끝냈던 그에게도 이 제안은 부담이 됐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과는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 많았기에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가 일을 해보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원효대사의 가르침이 한몫했다. 바로 원효의 일심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 본래의 참 마음으로 돌아가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한다)’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과도 맥을 같이 하는 이 가르침에 육바라밀만 잘 실천한다면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처음엔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직접 원폭피해자분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죠. 오래 전 월주 스님을 설득하기 위해 제가 직접 현장에 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원폭피해자들이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합천에 원폭피해자와 자녀를 위한 합천평화의집을 만들고, 관련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한 번 원폭피해를 입으면 당대에 끝나지 않고 3~4대까지 유전적 질환이 나타나기 때문에 반드시 지원이 필요합니다.”

이 씨는 이러한 원폭피해 문제를 사회적으로 환기하기 위해 2012년 합천 비핵·평화대회를 개최했다. 위드아시아와 합천평화의집이 주최한 이 행사는 국내 최초로 국내외 핵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는 자리였고, 이는 곧 핵 문제의 심각성을 사회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특별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를 열고, 1인 릴레이 시위까지 펼쳤다. 이러한 노력 덕분이었을까. 그동안 법 제정을 요구해온 원폭피해자특별법이 올해 11년 만에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논의 안건으로 상정되기도 했다. 특별법추진연대회의 측은 별다른 이견 없이 통과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특별법 안건 순서가 뒤로 밀려 현재까지(123일 기준) 논의되지 못한 상황이다. 소위원회는 추후 회의를 다시 열고 처리하지 못한 안건을 다룰 예정이다.

▲ 2013년 9월 캄보디아 뿌레이끄랑 마을에서 열린 위드아시아 드림나래센터 개원식.

건강 위기 극복 후 수행정진
이 씨가 불교계 다방면에서 활동한지 20여 년이 지났을 즈음, 갑작스레 그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2004년 러시아에서 열린 고려인 이주 기념행사에 참석했을 때였다. 갑자기 무언가가 계속 아랫배를 쿡쿡 쑤시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병원으로 향했다. 병명은 비호지킨림프종(non-Hodgkin’s lymphoma, 혈액암의 일종). 생존확률이 50%라는 의사의 설명에 덜컥 겁이 났지만 곧바로 수술을 받았다. 이 씨는 대장을 절반 이상 잘라내는 대수술을 후 지속적으로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항암제를 맞으면서 몸은 점차 야위었고, 어느덧 몸무게도 40kg대로 주저앉았다.

이 씨는 항암치료를 5회까지 받은 뒤 경북 문경으로 떠났다. 시골산속에서 작은 흙집을 짓고 요양했다. 참선과 기도, 수행정진의 시간이 계속됐다. 그렇게 4~5년가량 지냈을 때 그는 병원에서 완치판정을 받았다. 수행 덕분이었는지 기도가 이뤄진 것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여생을 이라고 생각했다. 수행과 봉사를 양 날개로 삼아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처음 병을 발견했을 때 당황스럽긴 했지만 이것 또한 나의 업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병 때문에 좌절하거나 우울하진 않았어요. 다만 건강을 되찾기 위해 욕심을 내려놓고 오로지 수행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완치판정을 받았을 때 앞으로는 죽을 때까지 남을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죠.”

이 씨는 이 같은 다짐 이후 그동안 수행을 뒤로한 채 사회활동에만 매진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데 집중했다. 그런 연장선의 의미로 최근에는 도반들과 수행모임 정법빠리사(Dhamma Parisa)’를 창립했다. 부처님 개척정신을 이어받아 수행·교육·자비행을 하며 새로운 전법시대를 열어가는 평등공동체를 만들어 가겠다는 취지에서다. 그는 정법빠리사에서 수행을 통해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중생심을 발보리심으로 바꾸는 힘을 키울 생각이다.

다른 사람의 티는 잘 보이지만 정작 자기 문제는 잘 안 보인다는 말이 있죠. 그래서 내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정법빠리사는 수행을 중시하지만 개인적인 앎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발보리심이 사회에 전해질 수 있도록 정진하는 게 목적입니다. 현재 매주 도반들과 수행을 하고 있고, 얼마 전 ‘108선지식 구도순례 입재법회를 봉행했습니다. 두 달에 한 번씩 전국 각지의 선지식들을 만나 수승한 진리가 무엇인지 공부할 계획입니다. 그런데 계산해보니까 108명을 만나려면 18년이 넘게 걸리네요. 오래 살아야겠습니다(웃음).”

▲ 지난 11월부터 정법빠리사 모임을 통해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수행하는 모습.

쉬운 교리 해석·청정승단 모범 절실
젊었을 때부터 그 누구보다 활발하게 불교계에서 일했던 이 씨. 그는 불교계의 사회복지활동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지금은 불교계의 복지활동이 꽤 세분화돼 있습니다. 90년대의 초기시절과 비교하면 상전벽해 수준이죠. 다만 불교 교리가 일반인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교리를 잘 녹여내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부담 없이 받아들여야 자연스레 지역 복지시설과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스님들이 올바른 청정승단의 모범을 보여 신뢰를 쌓는 노력도 필요하고요. 불교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억압을 받으면서도 사회를 선도하는 역할을 해왔는데 현 시대에 그걸 못 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이 씨는 인터뷰 내내 불교가 우리 사회의 큰 빛이자 목탁이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제자들이 내적 수행을 잘 다져야 한다고. 그는 불교가 현대인들을 위한 정신적 귀의처로 거듭나 경쟁이 격화된 시대에 상생·공생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대사회에서 불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복지와 마음치유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무량심과 자비희사 정신을 바탕으로 앞서 얘기한 두 축을 잘 세워야 불교가 인정받을 수 있을 겁니다. 또 한국불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점차 떨어지고 있는 이때에 재가자들이라도 나서서 열심히 수행하는 모습을 보이면 불교계 문제 중심에 있는 분들이 다만 조금이라도 느끼는 게 있지 않을까요?”

향기 나는 꽃에는 벌과 나비가 모여드는 법이다. 수행정진과 복지활동을 통해 세상을 맑히고 싶다는 이남재 씨의 원력이 비록 세상의 묵은 때를 단박에 씻겨낼 커다란 물줄기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그 향기를 맡을 날이 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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