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민간신앙 흡수하며 자연스레 발전
승려, 지식층으로서 여러 분야 활동
조선 억불정책으로 위기 겪었지만
찬란한 문화유산 계승ㆍ발전돼야

불교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국가 정치와 국민 정서, 문화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때는 국교로 인정받기도 했고, 다른 시대에는 억압을 받으며 다양한 부침을 겪었지만 여전히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은 지난 1120일 순천시 문화건강센터에서 열린 한국 전통산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국제학술대회에서 한국 역사 속 불교문화의 위상을 주제로 기조강연 했다. 이 원장은 불교는 역사에서 현실에 대한 고통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위로하고 어루만져주면서 희망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잡이의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정리=윤호섭 기자

▲ 이배용 원장은… 1969년 이화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동 대학원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 서강대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21년간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한 뒤 2006년 제13대 이화여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한국여성사학회장, 조선시대사학회장, 서울시 문화재 심의위원, 제3대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인간은 예로부터 현실의 갈등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예를 들면 삶과 죽음의 갈등, 전쟁과 평화의 갈등, 소유와 욕망에 대한 갈등 등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해결되지 못한 근본적인 문제가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데서 상생과 구원 그리고 위안의 기능이 필요했고 샤머니즘이 등장한 것이죠. 그러나 점차 인간의 지혜가 발달하면서 타인에 의지해서 소망을 갈구하는 것보다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의지가 점차 발휘됐습니다. 분명한 교리에 근거한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죠. 바로 불교는 이러한 시대적 필요성에 의해 전개되고 수용되었던 것입니다.

삼국의 불교 수용과 의미
한국 역사에서 불교는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 2(372), 백제 제15대 침류왕 원년(384), 신라 제23대 법흥왕 14(527)에 공인되었습니다. 불교는 그 시대의 사회적국가적 요청에 의해 공인되었는데 그 배경은 첫째, 명실 공히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분리되는 고대 국가 형성과정에서 각계각층의 일체감을 조성하는 사상적 통일을 위해 필요했습니다. 둘째, 정복전쟁 속에서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호국불교의 형태로 공인되었습니다. 셋째, 치열한 전쟁의 각축기에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죽어가는 영혼을 위로하는 내세 구원의 사상이 필요했습니다. 넷째, 타율에 의한 구원보다 교리에 의한 자율적 깨달음의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불교는 한 차원 높은 인간관과 세계관을 제시하고 고대국가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하여 준 것입니다.

불교는 기존의 토착신앙을 배제하지 않고 그것을 포용하면서 전래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불교는 외래종교이면서도 이전의 전통문화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파괴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지금도 사찰 후원 영역에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이 배치된 것도 민간신앙과의 습합과정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불교는 새롭고도 다양한 국제문화를 전해주었습니다. 이 시대 외국문화의 수용은 사신의 내왕과 더불어 승려의 외국유학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삼국은 불교를 통해 당시의 국제문화를 폭넓게 접하게 되고 다양한 문화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문화발전에 품격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불교신앙이라는 공통분모를 삼국민 사이에 형성시킴으로써 동질성을 마련하였던 점입니다. 삼국은 서로 7세기 동안 분열, 대립함으로써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이질적인 것이 많았지만 불교라는 공통의 문화가 있어서 통일 이후의 민족융합을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삼국시대 불교가 담당했던 역사적 공헌은 큽니다.

신라의 삼국통일과 승려의 역할
삼국시대 승려들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식층에 속했습니다. 그들은 한자를 알았고 의술이나 토목 등 기술에 능한 이도 있었으며 음악이나 조각, 회화, 서예 등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남다른 활동을 펼쳤습니다.

특히 신라에는 국가발전에 기여한 승려가 많았습니다. 원광법사(555~638)의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유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이라는 화랑도의 확실한 정체성과 자세를 심어주면서 불교신앙과 현실의 갈등을 유연하게 풀어주었습니다. 즉 불교의 원리는 살생하지 말라는 것이지만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생을 해도 가려서 하라는 동기부여를 준 것이죠.

원효(617~686)는 귀족불교인 법성종의 종파를 이루었지만 여러 종파의 대립을 배격했습니다. 어려운 문자를 통한 불교 신앙의 접근이 아니라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외우면 누구나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는 정토신앙을 전파하여 글자를 모르는 민중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또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괴리감을 해소하여 불교를 통한 화합을 이루어냈고요. 원효는 당나라에 유학하지 않았으나 당에서 존경받는 승려였으며 100여종 240여 권의 저술을 남긴 뛰어난 학승이었습니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은 국내외에서 명성을 얻었고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교학은 한국불교의 토대를 마련하였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의상(625~702)은 당나라에서 화엄학을 배우고 귀국하여 신라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문무왕 16(676)에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사상을 전파하여 통일 직후 민족융합이나 사회통합에 기여했습니다. 의상의 학문과 신앙체계는 신라사회에 두루 전파되어 의상의 10대 제자와 화엄십찰이 유명하죠.

자장은(590~658) 진골 출신으로 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하는 계율종을 확립했습니다. 636년 제자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청량산의 문수보살상에 기도하고 가사와 부처의 발우 그리고 사구게(四句偈)를 받았습니다. 자장은 643년 귀국해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을 쌓았습니다. 또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우고 장륙존상을 건립했습니다.

고려의 건국과 선종의 사상적 배경
이후 신라 하대에 불교계의 새로운 경향은 선종(禪宗)의 유행이었습니다. 선종은 경전에 의하여 그 종파를 구별하는 귀족불교의 교종(敎宗)과는 대조적 입장에 있었습니다. 즉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여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는 논리로 복잡한 교리를 떠나서 심성을 도야해 마음속에 불성을 찾는 데 치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종은 개인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배경이 중앙정부에서 이탈해 새로운 시대를 여는 혁명원리에 명분을 준 것입니다.

선종은 주로 6두품 세력과 지방의 호족들이 주도하여 소위 선문구산(禪門九山)이 각 지역에 성립되었습니다. 선종은 또 호족의 종교로서 성장하여 지방의 일반 백성들의 적극적으로 지지와 협력을 얻어 고려 건국의 사상적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던 사회로 유교는 정치영역을, 불교는 생활과 정신영역을 담당하면서 이원적 체제가 유지되었습니다. 고려왕건의 훈요십조를 보면 우리 국가의 대업은 정녕 여러 부처님의 호위하는 힘에 의지한 것이다. 그런 고로 선(), (의 사원을 세워 주지를 차견하여 분수케 하고 각기 그 업을 닦게 하라는 불교를 육성하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개경에만 70개에 이르는 사찰이 건립되고 팔관회, 연등회 등 각종 국가적 불교행사가 행해졌습니다.

1170년 무신의 난이 일어난 이후 고려불교는 산간불교화 되면서 새로운 경향이 생겨났습니다. 무신정권 시대를 전후해서 선종의 9산은 종명을 새로 조계종이라 하고 진흥을 꾀하였습니다. 조계종의 세력을 크게 펼친 승려는 보조국사 지눌이죠.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내세웠는데 돈오는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는 것이고, 그 깨달음을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점수입니다.

조선시대 억불정책과 불교문화
조선시대의 불교는 정치적 탄압에 의해 위축된 수난의 불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 민중들에게는 종교적 위안과 용기를 주면서 꾸준히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왜냐하면 유교는 내세관이 없고 영혼의 구원 기능이 없는 현실 도덕사상이었기 때문에 1천여 년을 이어내려 온 불교의 종교적, 사상적 기능을 하루아침에 떨쳐낼 수는 없었습니다.

태조는 무학대사를 왕사로 삼았고 세종은 궁궐에 내불당을 지어 돌아간 이의 명복을 빌었고, 1446년 한글을 반포한 후 착수한 것이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의 간행입니다. 세조 때는 원각사를 지어 현실 고뇌의 위안 기능으로 삼았으며 불경 언해본을 출간했습니다. 왕릉 옆에는 명복을 비는 원찰이 항상 설치되었습니다. 명종 때 문정왕후는 보우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시켰고 승과제도를 부활시켰습니다. 선교 양종을 재정립하고 선종의 불사로는 봉은사를, 교종의 불사로는 봉선사를 삼는 등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다시 승려들이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은 선조의 부름을 받아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 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했습니다. 늙은 승려들은 절을 지키면서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부처에게 기원토록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통솔하여 전쟁터로 나가 나라를 구하는 데 힘썼습니다. 이에 제자 처영(생몰년 미상)은 지리산에서 궐기해 권율의 휘하에서, 사명당 유정(1544~1610)은 금강사에서 1000여 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유정은 문도 1500명의 의승을 순안 법흥사에 집결시키고 스스로 의승군을 통솔해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했습니다. 이와 같이 유정은 15931월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우자 선조는 선교양종판사를 제수했습니다.

인쇄문화의 발전과 종합예술로서의 불교
한국 인쇄문화 발전의 배경에는 불교가 있습니다. 불교는 문자의 보급에 기여했고 종이를 만드는 기술도 승려들에 의해 전승되었습니다. 승려들은 종교의 전파자로서뿐 아니라 종합예술가로 공헌했는데 건축, 조각, 공예 등 모든 예술 창조의 중심에는 승려들이 있었습니다.

목판인쇄물인 8세기 중엽에 간행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에서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입니다. 탑을 만드는 공덕을 강조한 이 경이 미타산과 법장에 의해 당나라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것은 704년경이었습니다. 불국사의 석가탑 속에서 발견된 이 인쇄물은 불국사가 창건되던 751년 무렵에 간행되어 탑 속에 넣었던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는 현종 대() <초조대장경판>을 만들었으나 고종 대(1232)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려 다시 대장경을 새긴 것이 재조대장경판이라고 하나 소위 팔만대장경입니다. 1236년부터 조성하여 16년 걸려 1251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몽골군의 침입을 불력으로 격퇴하려는 민족적인 염원에서 국가적 총력을 기울여, 한자 한자 정성을 다하여 판각하였으며 가장 완벽한 대장경으로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82천 경판에 84천 법문이 수록되었고 글자 총수는 약 5200만자 정도로 추정됩니다.

한편 직지심체요절은 1377(우왕 3) 청주목의 교외에 있던 흥덕사에서 금속활자인 주자로 찍어낸 것이 그 초인본(初印本)입니다. 구텐베르크의 성경보다 78년 앞선 것으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로 즉 사람이 눈을 외계로 돌리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올바로 가지면서 참선하여 도를 깨우친다면 마음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이 바로 부처가 됨을 뜻합니다. 고려 말기 사회적 모순과 혼란을 정화시키려는 불교계의 정풍운동을 인쇄로 담은 것이기도 합니다.

한편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석굴암, 성덕대왕 신종 등 수많은 사찰에 조성된 석탑, 석등, 불화, 불상, 불교 공예의 종합적 불교예술은 한국 문화유산의 보고입니다. 지금 남아 있는 사찰 건축들은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후기에 거의 중창불사를 한 것입니다. 앞으로 찬란한 불교유산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어 세계인에게 많은 영감을 주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불교는 한국인들의 삶과 내면적인 영역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실에 대한 고통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면서 내일의 희망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잡이의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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