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붓다 34회~37회

보리수 나무 아래서 정각을 이룬 싯다르타. 깨달음을 얻은 후 싯다르타는 드디어 중생구제를 위한 법륜을 굴린다.
무명으로 인한 탐진치와 고통 없애는 가르침 전해
다섯 비구 첫 제자로 맞고 사성제 설법, 팔정도 제시

지난 줄거리
수행자의 길을 택한 싯다르타는 온갖 고행을 체험한다. 여러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구했지만 마음에 차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가장 맹렬한 고행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싯다르타는 네란자라 강가의 우르벨라촌 근처의 보리수 밑에 자리를 잡고 수행에 몰두했다. 싯다르타는 전혀 음식을 먹지 않았다. 싯다르타의 몸은 극도로 피로해 80세의 노인과 같아졌으며 등뼈가 굽었다.
싯다르타의 가혹한 수행은 다른 고행자들의 모범이 돼 주변 모두가 그를 흠모하며 따랐다. 6년의 시간이 흐르고 싯다르타의 몸은 점점 야위었다. 콘다냐 등 다섯 비구들이 고행하는 싯다르타를 흠모해 따랐지만 정작 싯다르타는 고행에 회의를 품고 있었다. 네란자라 강에서 쓰러진 싯다르타는 수자타의 공양을 받고 기운을 차리게 된다. 싯다르타는 문득 고행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깨닫는다. 수자타의 죽을 먹은 싯다르타는 보리수 나무 아래서 다시금 정진에 들게 된다.

“나는 이 자리에서 일체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죽는다 해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싯다르타가 외친 말은 최후의 다짐이었다. 싯다르타가 가부좌를 틀고 선정에 든 순간 싯다르타의 몸에서 흘러나온 빛이 욕계에 가득했다. 마왕은 이것이 싯다르타가 장차 붓다가 될 징조임을 알고 방해하기 위해 다시금 나타났다.

수많은 고비를 넘어선 싯다르타에게 마군들은 수없이 많은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그 화살들은 싯다르타에게 닿지 못하고 꽂비가 되어 날렸다.
마왕은 마침내 외쳤다. “네가 궁극의 지혜를 깨친다 하여 누가 널 믿어 줄텐가.”
싯다르타는 선정인을 한 오른손을 풀어 무릎 위에 얹으며 땅을 가리켰다.
“대지가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우리가 흔들림 없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안에서 밖에서 행복과 고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마구니들이 쏜 화살은 꽃비로 변한다.
마침내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고 붓다, 즉 부처님이 된다. 부처님의 걸음걸음마다 구름이 모인다. 부처님은 대자연과 하나가 된다.
아이들이 부처님의 상서로움을 보고 수자타에게 말하고 부처님은 아이들과 과일을 먹는다.
“우리는 무의식 속에 오렌지를 먹지. 완전한 깨어있는 의식 속에서 먹으면 오렌지와 관계를 맺는 것이지. 우리 마음이 생각을 쫓아가기 때문이지.”

반면 샤카성에서는 라훌라가 성년이 된다. 숫도다나왕은 이렇게 말한다.
“라훌이 구속을 느껴선 안 되네. 어떤 지식도 모자람이 없게 하게. 삶의 실상을 제대로 가르쳐야 하네. 탄생, 죽음, 행복, 슬픔 등을 모두 라훌이 실상을 몰라서는 안 되며, 싯다르타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될 걸세.”
부처님의 곁에서는 수행자들이 모인다. 이들은 부처님에게 깨달은 바가 무엇이며 누구에게 이를 배웠는지 묻는다.

“나에게는 잠시 배운 이는 있지만 스스로 깨우쳤소.”
“스승의 공을 가로채는군요. 어느 누구도 스승이 없는 이는 없소.”
“사람은 궁극적 진리를 스스로 찾을 수 있고, 몸소 그것을 알아야 하오. 이 순간에 깨달음이 있고 자유가 있소.”

“진리가 평범하고 단순하다면 왜 현자들이 평생을 수행으로 보내겠소. 수행은 힘든거요.”

자살을 하려는 장자에게 법을 전하는 부처님
부처님은 지난 수자타의 공양을 보고 떠난 다섯 비구를 찾아 만난다. 다섯 비구는 부처님에게 의문을 보낸다.

“싯다르타는 음식을 먹고 속세사람들과 어울렸는데 어찌 깨달음을 얻었겠는가.”
“저는 꼭 부드러운 풀잎처럼 되겠다고 했습니다. 만물은 더러움이 없습니다. 아름답고 상서롭고 단순한 것입니다. 내면의 눈으로 저를 보세요.”

다섯 비구는 무릎을 꿇고 다시 제자가 되기를 청한다. 이윽고 길을 떠난 부처님은 마차를 수리하는 곳에서 한 아이가 독초를 먹는 것을 구해낸다.
“업의 윤회에서 구원받을 것을 나는 저 마차바퀴처럼 법을 굴려 펼치려하네.”

부처님은 다섯비구에게 첫 법문을 한다.

“무지에서 괴로움과 오해, 근심이 일어난다네. 탐욕, 분노, 자만심, 혼란, 질투와 두려움도 모두 무지에서 나온다네. 뒤바뀐 견해는 양극단으로 자리해 양면을 지닌다네. 북극성처럼 중도를 지켜야 하네. 몸은 굶주리지도 욕망에 치우치지도 말아야 하네. 그래야 모든 근심을 여읠수 있고, 사랑과 수용을 경험한다네. 이런 경험 후 아무도 증오하지 않고 자비심과 너그러움만이 남아있게 된다네.”

부처님은 미망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다. 계학, 정학, 혜학을 닦아야 함을 강조한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있다. 첫째는 중생이 있는 한 괴로움이 있어 인간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 둘째는 괴로움의 원인은 무상한 점에 애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벗어나는 점은 무엇일까. 셋째는 해탈의 진리를 일깨우는 것이 중요하다. 중도로 보고 양극단을 여의는 것이다. 넷째는 모든 괴로움의 족쇄가 풀리고 궁극적 진리를 보는 길이 있다. 바로 팔정도라네.”

깨달음의 순간 대자유를 느끼는 모습
부처님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언어, 바른 행동, 바른 직업, 바른 노력, 바른 알아차림, 바른 집중을 설한다.

샤카국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어떤 카스트든 상관없이 문호를 활짝 연다.”

부처님의 길에 한 사람은 자살을 하려 한다. 부처님은 이를 막아선다.
“이거 놓으세요. 제 삶의 권리는 저에게 있습니다.”

“아니네, 낳아주신 어머니에게 있고, 길러주신 아버지에게 있네, 자네와 얽힌 인연, 만물이 자네의 삶에 기여했고, 자네의 생명에 권리를 갖고 있네. 일어나게. 일시적 분노에 휩싸이거나 분노가 가라앉았는가.”
“저는 행복·부·번영이 있으나 모든 것이 덧없습니다. 제 마음에는 어둠만이 가득합니다. 끝을 알 수 없는 고통과 소외감을 느낍니다.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욕망이 일어나면 자네는 그것을 충족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우리는 다시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네. 욕망이 충족되면 다시금 욕망이 일기 때문이라네. 죽음은 다가 아니네, 삶을 부정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게.”

 

리뷰 - 법현 스님이 본 드라마 ‘붓다’
관계와 연기를 알아야

삼각관계가 전쟁과 쿠데타로
중생제도의 시작에 흥미 배가

드라마붓다에서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 나서도 대단히 재미있고 긴장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많다. 그것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관계와 연기를 알아야 한다.

드라마붓다에는 셋이 물고 물리는 관계가 꽤나 많이 나온다. 이른바 삼각관계이다. 대표적인 것은 끝까지 괴롭히는 관계이지만 번번이 싯다르타의 승리로 나타나거나 아예 싸움이 되지 않게 하는 싯다르타-야소다라-데바닷따의 관계이리라. 그들은 어려서부터 경쟁과 사랑의 나눔을 합리적으로 하지 못하는 관계였다. 경쟁자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으니 잘해서 왕권을 쥐는 것으로 노력했으면 좋을 텐데 그마저도 제대로 못해서 출가하였던 마하남(마하나마)에게 빼앗기는 데바닷따는 출가하여서도 여러 가지 못된 짓을 하여 산채로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인연으로 나중에는 성불하게 되리라는 경전의 스토리도 있다.

그런데 재미있으면서 서로를 존중하는 삼각관계도 있어서 흥미롭다. 유명한 국제미녀이자 창녀인 암바빨리와 빔비사라왕과는 연인 사이였고 암바빨리는 싯다르타를 좋아하는 마음도 있었다. 드라마에서는 빔비사라의 아들 아자타삿투가 그녀를 좋아하기에 그녀가 낳은 지와까(Jivaka)를 위해서 그와 혼인해 왕위를 물려주면 어떨까 하는 꿈을 꿔본다. 하지만 아들 지와까는 붓다를 존경해서 왕위보다는 출가자의 길을 가고자 한다. 그리고 승단의 주치의로서 활동하기를 원한다. 이 꿈은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로서 주치의를 하므로 절반의 성공인 셈이다. 그러나 야소다라를 사랑하는 싯다르타는 암바빨리의 이성으로 다가오는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신도로서의 마음만 받았으며, 사랑에 감동한 암바빨리가 나중에 그녀의 망고숲을 승단(상가)에 기증하였다. 이는 대림정사(암라수원)가 되었다. 그녀와 빔비사라가 낳은 아이가 콘단냐라는 설도 있고, 그녀가 낳은 아이가 유명한 의사인 지와까라는 설도 있다. 아무래도 콘단냐는 아닐 것 같다.

드라마에서 긴장을 유지하다가 왕위를 차지하지 못할 만큼 흐트러진 삶을 사는 아들 데바닷따에게 실망하고,온갖 나쁜 짓을 한 자신에게도 따뜻한 사랑과 고마움을 표하는 싯다르따에게로 마음이 돌아선 망갈라와 숫도다나 및 드로다난과의 관계는 흐릿한 삼각관계이다. 처음에 숫도다나는 망갈라와 좋아하는 관계였다가 마하마야와 혼인한 것으로 그려진다.

아주 특이한 삼각관계는 남자끼리의 관계이다. 그야말로 물고 물리는 전쟁까지를 사이에 둔 관계여서 흥미를 북돋는다. 그들은 싯다르타와 프라세나짓과 빔비사라이다. 물론, 싯다르타의 인격에 반한 빔비사라의 적극적인 협조로 최소한 빔비사라가 실권을 쥐고 살아있을 동안은 언제나 싯다르타와 빔비사라가 한 편이었다. 프라세나짓의 공격을 함께 막아내고 돕는 관계로 그린다.

삼각관계는 아니지만 관계를 통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이 정권의 평화적 이양이 아닌 쿠테타이다. 경전에는 쿠테타 이야기가 몇 있다. 샤카족의 나라에서는 숫도다나대왕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태자 싯다르타가 출가하고,이복동생인 난다도 출가하고,싯다르타의 아들 라훌라도 출가한다. 그렇게도 싯다르타의 태자자리를 탐내던 데바닷타도 속내는 붓다의 성스러운 지위를 무너뜨리려는 것이었지만 겉으로는 출가하였다. 샤카족의 왕권은 결국 마하남에게 넘어가게 된다. 우리가 좋아하는 승단은 그렇게 번성해갔으나 세속국가와 정치는 쉽지 않은 모양이 되어갔고 결국 다른 원인이 있기는 했으나 멸망의 길로 치달려 가게 되었다. 그런데 코살라는 마하코살라의 아들인 파세나디(프라세나짓)이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드라마붓다에서는 화를 돋아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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