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아닌 까닭에 모두가 거꾸로도 없고 바로도 없다!

꼭 이 마음의 도리를 공부해서 자기 자성을 발견해야 된다.
과거에 살던 자기 조상과 현실에 사는 자기가,
같이 합류화돼서 작용을 해야만이 진짜 인간이다.

인식하는 주체가 사라진 경지란?

질문 한 선사가 깨달음의 경지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경계(境界)를 인식하는 주체가 남아 있는 한 인식된 모든 것은 속임수다.”라고 하셨습니다. 인식하는 주체가 사라진 경지란 어떤 경지일까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그때는 주인공만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제 나름대로 헤아려 봅니다만 이에 대해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물맛을 알려면 내가 직접 먹어 봐야 압니다. 정말 뜨거운지 미지근한 건지, 따뜻한 건지 찬 건지 그거는 먹어 보는 사람이나 알겠죠. 그러니까 내가 먹어 보지 않는 이상에는 모두 거짓말이라는 얘깁니다. 아시겠습니까? 얼른 쉽게 말을 하는 겁니다, 지금. 그러니까 말로만 듣고 책을 보고 경전을 보고 모두 봐도 말로만, 이론적으로만 해 나가면 모두 거짓말이 되고 모두 헛것이 됩니다. 그래서 물을 딱 마셔 보고, 딴 물은 또 거짓말인지 모르니까 내가 딱 먹어 보고 그 물을 그냥, “야, 이건 먹으니까 시원하더라.” 하고 주는 것이 바로 이게 약사가 감로수를 주는 거와 같은 겁니다. 이걸 먹어 보지도 않고 저 물맛이 어떻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냥 주는 게 아닙니다. 어디서든 누구든지 나 아님이 없고 이럴 때는 물도 바로 내가 물이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맛을 아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물을 줘도 그때는 아주 톡톡한 맛이 나고 그게 감로수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 지혜를 얻으려면요, 나부터 먼저 알아야 지혜가 자꾸 늘어 가요, 나부터 알아야.

그러니까 여러분들께서 이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셔야 됩니다. 내 마음이 트여야 남도 이끌어 갈 수 있지, 내가 눈을 뜨지 않고, 내가 귀를 뜨지 않고 남을 이끌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열심히들 해서, 남에게 진짜로 보시해라 하는 거…. 금(金) 한 덩어릴 주고서 늘려라 이랬더니 그 금이 없어질까 봐 늘리지 않았다 이런 소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거기다 놓고 체험하고 가면서 남들한테 그 마음공부를 전달해 주게 되면요, 그만큼 공덕이 큰 겁니다. 이건 세세생생의 공덕입니다, 올바로만 관법을 일러 준다면. 한 사람을 이끌었는데 수십억의 중생들을 이끈 셈입니다. 그건 왜냐하면, 집합소 하나를 포교했는데, 집합소 안에 들어 있는 중생이 얼마나 많은지 말입니다, 그 집합소 안에 있는 자생 중생들이 전부 바뀌어서 화(化)해서, 보살로 화했으니 얼마나 그게 공덕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질문을 할 때 그냥 그 옛날에는 주먹을 번쩍 들거나 내리치거나 이런 등등 문제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 가지고 지금은 여러분을 이끌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귀띔을 해 줘 가면서 이렇게 해야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겁니다.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되는 도리를 어찌 알아서 산은 산대로 있고 물은 물대로 있는 도리를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트여 주면서, 귀를 트여 주면서…, 하하하.

여러분, 진짜 열심히 하십시오. 나중에 이 인간의 의식을 가지고 후회하시지 말고 열심히 해서, 우리가 지금 몇 발자국이나 떼어 놓고 이 모습이 없어지겠습니까? 하여튼 이 모습이 없어지기 전에 이 도리는 꼭 알아야 묵은 빚도 갚을 수 있고, 새 햇빛도 줄 수 있고, 그 뿌리에 물도 줄 수 있고, 꽃도 피게 할 수 있고, 그 열매도 열려서 영원토록 굶지 않고 먹게 해 줄 수 있는 바로 무종(無終)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무시(無始)요, 무종이요. 이 모두를 간파할 수 있는 여러분이 돼야 영원토록 정신계의 어버이로서 이 혼란에 빠진 중생들을 다 제도할 수 있으니 여러분이 다 그렇게 되셔야 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대하여
질문 저는 지금 목수 일을 하면서 틈틈이 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공부를 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과학 잡지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안에 시간이 앞으로 가는 지역과 거꾸로 가는 지역이 공존할 수 있다는 논문을 보았습니다. 우주가 대 폭발로 팽창을 하면서 앞으로 흐르던 시간이 다시 수축을 하면서 거꾸로 시간이 흐른다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 생각을 해 보니까는 지금까지 큰스님뿐만 아니라 살아 계셨던 선지식께서 미래를 다 알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미래라는 게 과거기 때문에, 이미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아셨던 게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정말로 시간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뿐이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정말로 시간의 흐름에는 앞과 뒤가 따로 없는 것인지 아니면 흐름 자체가 애당초 없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우리가 그냥 여러분들이 아시는 거와 같이 서울에서 부산을 차를 타고 간다고 생각을 하세요. 그런데 여기서는 타고 갔는데 거기서는 종점이 돼야죠. 그렇죠? 근데 댁은 종점으로 내렸지만 거기서 타는 사람은 시발점이 되죠. 댁이 타고 올 때 또 시발점에서 타죠. 그래서 시발점도 없고 종점도 없다 이게 되고, 이것이 거꾸로 가든 바로 가든 그것도 없다. 그건 논설이다, 이유다 그러는 겁니다. 이게 한 바퀴 이렇게…, 이게 둥글어서 둥근 게 아니라 진리가 그렇게 끊임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둥글다고 한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물과 이 평지, 이 허공 이것이 전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이게 끊임없이 돌아가는 겁니다. 끊임없이 둘 아니게 돌아가는데 우리가, 내가 그전에 버스라고 그랬습니다. 이 버스를 타고 안에서 이게 네 거니 내 거니 하고 싸우면 되느냐. 바깥에서 이 버스가 어디로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그럭하면 안 되니까 이 마음공부 열심히 하시라고 이렇게 말을 했죠. 그러니까 이 거꾸로 가느니 바로 가느니 그건 이유에 불과해요. 그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무슨 위대하고 커서가 아니라 진리가 조그마해도 그렇고 커도 그렇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우리는, 에너지가 이게 뒤에 달렸다면 우린 이 세상에 나온 물질세계입니다. 그래 정신세계는 보이지 않고 물질세계는 보입니다. 보이는 세계의 에너지는 얼마나 되느냐? 그게 아니다. 용도에 따라서 에너지가 정신세계에서 이렇게 배출된다 이거죠. 그러니까 우리 맘대로 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스럽게 너희는 살아라, 부처님께서 “내가 말하는 소리를 명심해서 듣고 너희가 훨훨 벗고 자유스럽게 살아라.” 이런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나시기 이전에도 진리는 그렇게 그대로 있었지만, 우리가 연결 연결 해서 본다면 그렇게 알게끔 다 이렇게 있는데도 생각해 보지 못하고 여직껏 그렇게 그냥 웅덩이 속에서 사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때요? 그 목수 일 하는 데, 거기에도 우주의 섭류가 있을 텐데요. 어디든지 없는 게 없어요. 발 한 짝 떼어 놓고 가는 데도 그게 보통 발 한 짝 떼어 놓고 가는 게 아니죠. 그래서 모두 살아나가는 게 과학 아닌 게 없지만 그 과학이라는 그거보다도 더, 아주 너무나 섭류가 많기 때문에, 이거는 연결이 돼 있기 때문에, 둘이 아닌 까닭에 모두가 거꾸로도 없고 바로도 없다 이런 거죠.

그래서 사람한테도 세포가 있고 이렇게 혈관이 있듯이 이 지구에도 이 법망이 있죠. 인간한테도 법망이 있죠. 이 법망이라고 해야 맞겠죠. 그런데 혈관이라고 그렇게 했겠죠. 들어가고 나가고 하는 생명들이 수없이 한편으로 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살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수없이, 우리의 몸속에서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씀씀이에 달려 있습니다, 그게. 죽어 가도 둘이 아니게 죽어 가느냐. 그래야 아무 기탄 없이 순서대로 개천에 물 흐르듯이 그렇게 흐르는 거죠. 따지고 보면 아주 정확한, 정말 인간을 만들어서 잘 살게끔 하기 위해서 이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있는 지구를 만들었나 싶습니다.

여러분은 ‘스님은 모든 걸 다 아시리라.’ 그렇게 믿고 계시죠? 보려면 다 볼 수도 있고 알려면 다 알 수도 있지만 그 귀찮게 조그만 거 가지고 알려고 하고 귀찮게 그럴 필요가 없죠. 알기만 하려면 뭐, 삼천 년 전 거든 후 거든 몽땅 알게 되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게 잘못됐다고 해서 또 말하거나 그런 것도 없죠. 단 하나 ‘어이구, 이런 거를 이렇게 좀 잘했으면 빨리 훨훨 벗을 텐데….’ 하고 아쉬움은 있겠죠. 그러니 모두 여러분들도 ‘지금은 과학 시대고 또 배움의 길이 이렇게 깔려 있는데 저런 말씀을 하시니 어쩌나.’ 이렇게 하시지 말고 한번 뛰어넘어서 생각해 보세요. 이 인간의 몸뚱이 속에는 보이지 않는 암흑이지만 이 보는 사람이 볼 때는 새새 틈틈이 어느 곳에, 어느 고장에 어느 것이 어떻게 되고 그런 것까지 다 알게 되죠. 그러나 우리는 우리 모습 그 속에 있는 모두를 모르죠. 하여튼 자신을 무시하지 마시고 열심히들 하십시오.

본래 불성이 있다면 무명은…

질문 중생들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불성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에게 본래부터 불성이 있었다면 무슨 까닭으로 그 불성이 온갖 무명(無明)을 일으키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만일 태초부터 무명이 있었다면 중생에게 어찌 불성이 있다고 했는지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불성이라는 것은요, 진리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불성이라면 그 생명의 근본은 전체에 같이 돌아가는 평등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주와 이 세상이 직결이 돼 있고, 세상은 가설이 돼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근본은 그렇게 같이 돌아가지만 그 외에 영혼이라는 그 자체가, 의식 자체가 천차만별로 돌아갑니다. 천차만별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하중생(下衆生)은 나쁘고 좋은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짐승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쁘고 좋은 걸 모르기 때문에, 이 몸 안에 든 중생들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이 다스리면서 놔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불성이 본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또 이런 공부를 해야 하느냐고 하지만 그것이 영혼 자체가 살아나온 관습에 의해서, 주어진 업에 따라서 그냥 진행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꼭 이 마음의 도리를 공부해서 자기 자성(自性)을 발견을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과거에 살던 자기 조상과 현실에 사는 자기가, 즉 말하자면 같이 합류화돼서 작용을 해야만이 진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맡긴다는 생각도 망념 아닌지요

질문 주인공에게 맡겨라, 맡겨라 하시는데, 그것은 ‘나’라는 존재의 온갖 망령된 장난일 뿐이라고 이해됩니다. 맡긴다는 생각도 망념의 한 가지일 것인데, 망념과 사량으로 주인공에게 맡겨서 무엇을 어떻게 닦아야 할 것인지 저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점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첫째도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 두 번째도 둘이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 세 번째도 둘이 아닌 도리에서 둘이 아닌 나툼을 알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무명을 벗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몸 안에 든 모든 의식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제 상대성의 끈에, 인과의 끈에 의해서 자꾸 바깥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니까 첫째는 주인공이라는 중심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무엇이든지 중심을 꿰어야만이 바퀴가 굴러가듯이 말입니다. 차도 중심이 있으니까 바퀴가 굴러가죠? 사람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중심이 없으면 목석이죠.

세상에 탄생한 것 자체가 화두입니다. 화두가 따로 있어서 내가 화두를 딴 사람한테 받아서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여북하면 부처 중생을 다 집어삼키는 공부라고 했겠습니까. 그리고 그대로 여여한데 그럼 왜 이런 공부를 해야만 하느냐? 이런 게 또 있겠죠. 하여튼 여러분이 쉬지 않고 돌아간다는 그 사실, 또 나 자체가 화두라는 거, 그리고 와선이나 입선이나 행선이나 좌선이나 이것을 한데 합친 것이 참선입니다.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이라는 말 자체도 바로 그 뜻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발심하셨는지요

질문 대행 큰스님께서 발심하실 때의 마음, 그리고 닦아 이루셨을 때의 체험 등을 말씀하여 주신다면 저희들 공부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답변 저는요, 9살에 남의 집에 가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디다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의지할 데가 한 곳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라는 소리도 제대로 못 불러 봤습니다, 얼마나 엄한지…. 그래서 (가슴을 가리키시며) 여기에다가 아빠라고 불렀던 겁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가 죽고 사는 것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이 한 번 나왔다가 한 번 가는 것인데 늙고 젊고가 따로 있겠느냐. 어차피 이렇게 갈 거라면 차라리 그냥 가는 게 좋겠지?’ 하고선 뭐, 죽고 사는 건 염두에 두지도 않고요.

그러나 남의 집을 살다 보니까 고생이 돼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울어도 아빠를 부르고 울었고, 고독해도 아빠를 부르고 울었죠. 그때는 물통에 물을 길어다가 먹었습니다. 일 전을 가지고 물을 사면 고련씩 요만큼씩 한 표를 주었는데, 표 하나씩을 가지고 한 지게, 두 지게 요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덟 지게를 져야만이 그 집이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홉 살, 열 살, 열한 살이 되기까지 그것을 져 날랐습니다. 그것만 져 나른 게 아닙니다. 엄마 없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애를 업고 잤습니다. 그런데 이루 말할 수 없는 문제가 벌어지곤 했죠. 나는 그 아이가 불쌍해서 그냥 업고 자고, 온통 야단을 하고 울면 같이 울고, 그렇게 아빠에게 맡기고 했는데, 그 애를 주려고 과자를 사 놓은 걸 내가 먹었다는 겁니다. 그 사정은 일일이 말로 다 못합니다. 그런 거를 드러내 보일 수도 없고 그러니까 그 자리만 붙들고 울었을 뿐이죠. 이걸 얘기를 하려니까 그 얘길 안 할 수가 없군요.

그래서 그저 모든 일체를 다 거기에 맡겨 놓고 했죠. 물을 길러 가도 신발이나 좋았습니까, 어디? 게다짝이죠. 또 게다짝이 닳아서 못 신으면 짚신이죠. 그렇게 해서 처음에는 물이 다 엎질러져서 옷도 다 젖고 그래서 귀퉁이도 무척 쥐어박혔습니다. 그렇게 한 열흘이 지나니까 한 모금도 떨어뜨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또, 저 바깥에 나가서 뜨뜻한 물도 없이 기저귀를 빨아서 전부 철망에다 널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손이 얼어 부풀어서 그냥 뭐, 막 아파서 죽겠죠. 시린 게 아니라 아파요. 아픈 거를 꼭꼭 쥐고서 거기다 맡겼죠. 그저 그때서부터 거기다 맡기는 것을 내내 하면서, 밤이면 밤대로 나같이 이렇게 불쌍한 사람, 나같이 어려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 그런 모든 사람들을 도와줄 궁리를 했습니다. 그때는 또 밥을 굶는 때가 많았습니다. 아주 뭐 밥 굶는 사람이 늘비했죠. 그러니까 있는 곳간에 가서 보이지 않게 훔쳐다가 어떡하면 저 사람네들에게 줄 수 있을까 하고 항상 내면에 맡기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성공을 했죠. 허허허….

내내 그렇게 하다 보니까 그게 참, 8·15 해방이 되기 전이니까 열여덟 살이 됐습니다. 그전에도 항상 감응은 왔지만 정말 열여덟 살에, 지금으로 치면 깨쳤다 그러지만 그때는 그것도 몰랐습니다. ‘나’가 혼연히, 모든 것이 이 마음에서 우러나왔고, 그 아빠는 반드시 나를 리드해 줬습니다. 항상 그저 잘못된 거면 잘되게 다스려 주고 또 이끌어 주고 ‘이렇게 해야 된다.’ 하는 것을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때는 이렇게 말씀하더군요. “네가 일할 때는 내가 너와 하나가 되고 일을 안 할 때는 네가 나와 하나가 되고,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자(子)가 부(父) 앞으로 가면 부와 하나가 되고, 부가 자 앞으로 오면 자와 하나가 되느니라. 무슨 까닭이냐?” 그때에 생각하기는 체가 없는 마음이니까, 마음이라는 것은 이름이지 그 결과는 아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 부와 자는 둘이 아니다. 그건 체가 없어서 그냥 이 몸도 움죽거리게 자꾸 이끌어 주면서, 그냥 같이 돌아가는 거니까 둘로는 안 봤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알고 갔는데 그 후에 날이 퍽 추웠습니다. 날이 추우니까 “여름이 옳은 거냐 겨울이 옳은 거냐? 겨울이 좋으냐 여름이 좋으냐?” 이렇게 물어요. 내가 모르니까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죠. “여름과 겨울이, 사계절이 어떻게 둘이 되겠습니까?” 했습니다. “사람이 춥다 덥다 하는 거지 진리라는 건 춥다 덥다가 없지 않겠습니까?” 했습니다. 그러자 그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 천지가 한데 합치는 거 같았습니다. 산하대지가 일제히 전부 손끝을 한데 모으고 (합장해 보이시며) 그냥 전부 그러는 게 보이면서, 천지가 그냥 하나로 뭉쳐져 버리면서 차츰 차츰 차츰 작아지면서, 불덩어리가 작아지면서 그냥 불덩어리 구슬이 돼서 그냥 팡! 일어나는데 그때에 놀랐습니다.

그럭하고 난 뒤에 무척 울었습니다. 왜 울었느냐 하면 ‘천(天)은 지(地)를 다스리면서 산하대지의 일체 만물을 다 기르는데, 제가끔들 천차만별로 마음에 따라서 저렇게 짓고, 죽이고 살리고 싸우고 하니 참 너무도 기가 막히구나! 나는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인데, 왜 저다지도 저러는가?’ 하는 생각에서,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 하여튼 무척 울었습니다. 그리고 미친 것처럼 또 싱긋싱긋 웃고 다녔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와서 가는 길만 알았지 오는 길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지금 이렇게 벌어지지, 가는 길을 알고 오는 길을 안다면, 그게 양면이 작용을 하기 때문에 너무나 즐겁고 좋은 겁니다, 싱그럽고. 그런데 그렇게 고생을 해도 고생하는 거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입산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열아홉 살, 8·15 해방되고 나서 입산을 해서 스물세 살, 즉 말하자면 6·25 나던 그해 3월 달에 계(戒)를 받았죠. 부끄럽고 창피해서 그 말을 영 못하다가 이 근래에 그 말을 하고 있습니다.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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