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불담론 생사 탐구… 불사에도 시주

실학 영향 받았던 추사의 제자
박학다식·시문 능해 ‘儒將’ 칭송
귀양시절 초의선사 만나 위로받아
일지암에 머물며 불교·차를 배워


신헌(申櫶1810~1884)의 초상. 그는 실학의 영향을 받았던 추사의 제자로 초의 선사를 만나 불교와 차에 심취했다.
신헌(申櫶1810~1884)은 실학에 영향을 받았던 추사의 제자다. 무신(武臣)이면서도 박학다식(博學多識)했던 그는 시문에도 능해 유장(儒將)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문인적인 성향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당시 추사의 문하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학문적 입장을 훈습 받았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그는 개화파 인물이었던 박규수(朴珪壽)와 강위(姜瑋) 등과 깊이 교유했기에 변화하는 시대 조류에도 어느 정도 수용 의지가 있었음을 드러낸다.

특히 근대적 군사제도의 수립에도 힘썼던 그는 다산의 민보방위론(民堡防衛論)을 계승, 발전시켜〈민보집설(民堡輯說)〉과 〈융서촬요(戎書撮要)〉등을 저술하였다. 이외에도 금석학, 서법(書法)에 깊이 천착하여 〈금석원류휘집(金石源流彙集)〉과 역사지리서인 〈유산필기(酉山筆記)〉와 농법을 연구한 〈농축회통(農蓄會通)〉을 저술하였다.

따라서 그의 다양한 관심사와 이에 따른 저술의 업적은 그의 학문적 토대인 실사구시를 실천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원래 노론 집안에서 태어나 초명을 관호(觀浩)라 부르다가 헌(櫶)으로 개명하였다. 자는 국빈(國賓)이며 위당(威堂), 금당(琴堂), 동양(東陽), 우석(于石) 등의 호를 사용하였다.

1828년에 무과에 급제, 훈련원주부에 임명된 후에 전라도 병마절도사와 전라도우수군절도사, 도총부부총관 등을 역임했다. 1849년에 헌종이 위독할 때에 사사로이 의원을 데리고 들어가 진찰을 했다는 것이 빌미가 되어 전라도 녹도(鹿島)로 유배되었다. 이런 그의 정치적인 위기는 외척세력인 안동 김씨 일파에게 배척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1854년에 녹도에서 무주로 이배되었다가 1857년경에 해배되었으니 이것은 철종의 배려로 인한 것이다.

그의 환로가 다시 빛을 발한 것은 고종 초기이다. 대원군의 신임을 얻어 형조뿐 아니라 공조, 그리고 병조의 판서를 역임했던 그는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로 임명되어 강화도를 수비하다가 1876년에는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구로다(黑田淸隆)와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1882년에도 전권대관의 자격으로 미국의 슈펠트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등 조선 말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도 그의 외교적 수완은 빛을 더했다. 개항기의 혼란 속에서 그는 보국충신(保國忠臣)의 의지를 잃지 않았다.

한 때 그가 외척 세력의 견제 속에서 영어(囹圄)되는 어려움 속에서 그를 위로했던 이는 초의선사이다. 전라우수절도사 재임 시절 추사의 소개로 초의를 만났다. 이미 그는 추사로 부터 초의의 수행력이나 시재(詩才)는 익히 들었을 터이다. 물론 차에 대한 인식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그의 불교에 관심은 추사의 영향이 컸다 하겠다.

하지만 전라우도수군절도사로 재임하던 1843년경부터 시작된 초의와의 깊은 교유는 그의 불교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폭시켰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헌이 초의선사에게 쓴 서찰. 추사의 제자답게 불교와 차에도 조예가 깊었다.
끊긴 서운함이 매우 큽니다. 비가 내린 다음엔 겨울인데도 따뜻해져서 과연 봄기운이 도는 듯합니다. 스님께서는 맑고 화목하신지요. 마음에 두고 늘 생각함이 지극하고도 간절하여 어느 때에는 마음이 암담하다는 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스님에 대한 생각이 이처럼 간절한데도 살피지 않으니 도리어 온통 얄미워집니다. 지난번 편지에 어느 정도 삼십봉을 달게 받겠다고 하셨으니 (그것을)명백히 알고 있음을 인정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하. 두륜산에서 한번 보고 어찌 아무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또 초암에서 묵으며 함께 유불을 이야기하면서 생사의 핵심을 밝혔고 현적(玄寂)을 탐구하였으니 진실로 크게 바라던 것입니다. 다만 관아의 위세를 생각하니 산문에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비록 엄하게 경계하지만 또한 효과가 없어서 맑은 인연을 막을 듯합니다. 실로 영원하고도 참된 재질을 틈틈이 갖추지 못한 것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지금 겨우 요행히 이르렀기에 그러므로 이를 보내서 오로지 스님에게 의지하니 스님만이 벗어나게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허생이 그 사이 부친의 병환으로 집으로 돌아갔고 지금은 속세를 떠나지 못하고 있으니 탄식할 만합니다. 양식도 함께 여기에서 준비해 보냅니다. 이만 14일. 우석생 돈 감초 3속과 고초장 2승, 진유 2승, 만 향 한 봉지를 부처님께 올리는 것이 어떨지요. 종제(從弟)는 아직 경험하지 않은 일이고 나이가 어리지만 보는 것이 좋습니다. (阻?比甚 雨餘冬暄 果行小春 卽詢禪履淸穆 懸念切至有時想到不覺? 未審師意如是之切也 還切可憎 向書之多少自甘三十棒 可認其白知也明矣 奉呵奉呵 頭輪一見 豈無意也 亦一宿草菴 共談儒佛 明核死生 鉤玄探寂 固所大願 第念牙纛之威 恐貽山門之累 雖戒嚴之 亦似無? 自阻淸緣 實多可愧永眞膏材料 間無備焉 今才幸到 故玆以委送 專恃於師 唯師指脫耳 許生間因親病還第 今未得俗去 可嘆也 粮饌?自此備送耳 不式 十四日 于石生 頓 甘藿三束 古椒醬二升 眞油貳升 萬香一封 可供佛否 從弟未經事 年少其善視之也)

우석(于石)은 신헌의 호이다. 실제 이 편지를 보낸 시점은 알 수 있는 근거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14일이라는 날짜가 명기되어 있고 편지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편지를 쓴 시점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가 “관아의 위세를 생각하니 산문에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비록 엄하게 경계하지만 또한 효과가 없어서 맑은 인연을 막을 듯합니다.”라고 한 것은 그가 관직에 있을 때 쓴 것임이 분명하다. 이뿐 아니라 그가 “허생이 그 사이 부친의 병환으로 집으로 돌아갔고”한 대목이나 “초암에서 묵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 편지를 쓴 시점이 언제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는 이미 확보한 셈이다. 그럼 허생은 누구인가. 바로 소치이다. 그가 신헌의 막하를 내왕한 것은 1844년경이다. 물론 이 일도 추사의 소개로 성사된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1846년에 소치는 신헌을 따라 상경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이런 전 후 사정을 미루어 볼 때에 신헌의 편지는 대략 1845년경에 쓴 것이라 여겨진다. 특히 주목되는 대목은 “초암에서 묵으며 함께 유불을 이야기하면서 생사의 핵심을 밝혔고 현적(玄寂)을 탐구하였다”고 말한 점인데 이는 그가 초의를 통해 불교에 깊이 천착한 정황을 나타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가 묵었던 초암은 바로 초의의 수행처인 일지암이다. 따라서 그가 전라우수군절도사시절에 초의에게 보낸 편지는 신헌이 초의와의 교유에 중요한 촉매제는 불교였다는 것을 확인해 준 자료이다. 더구나 초의에게 의지하여 불교의 깊이 천착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인연 때문이었던가. 초의는 신헌이 녹도로 유배되었을 때에 험한 파도를 헤치고 적거를 찾아가는 성의를 보였다.

이러한 사실은 신헌이 쓴 ‘일지암시고후발(一枝菴詩稿後跋)’에 “내가 녹도로 유배되었을 때에 초의가 위험을 무릅쓰고 거룻배를 타고 와서 만났다. 내가 진서산 선생이 편찬한 〈심경〉을 읽고 있었는데 함께 〈심경〉의 깊은 뜻을 생각하고 찾다가 돌아갔다(余方謫居海中 草衣抗葦涉險而來見 余讀眞西山先生所輯心經 仍與之 玩繹及歸)”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당시 사대부들이 초의의 깊은 수행력이나 생사를 초월한 경계를 인정하고 교유했던 정황은 신헌의 ‘유연자칠고찬발(悠然子七高贊跋)’에 “초의는 선에 깊었고 사생에서 대해서도 밝았다 사대부들과 잘 교유하였다(草衣深於禪 明於死生 喜與士大夫)”고 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뿐 아니라 신헌은 추사의 해배를 기원하기 위한 불사(佛事)에 크게 시주하여 완성된 것이 대광명전이다. 이곳에서 초의는 추사의 해배를 기원하는 불사를 주도하였으니 신헌의 스승에 대한 우정은 이런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말년에 초의는 대광명전에서 열반했으니 이들의 인연은 이렇게 끈끈하였다.

신헌이 쓴 ‘벽파정’ 현판. 신헌은 무신이었지만 시·서·화에 능했다.
한편 신헌은 차를 즐기며 지은 몇 편의 다시(茶詩)를 남겼다. 그가 차를 마신 후의 여유로움과 독서의 이로움을 드러낸 〈소재(小齋)〉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을이 오면 귀밑머리 희어짐을 알겠고
(秋意年來感?毛)
무릎을 용납할 작은 집, 가벼운 거룻배인 듯하네
(小齋容膝似輕)
비온 후에 뜰에 비친 달빛 온통 넓고도 환하며
(雨餘庭月空明闊)
숲 끝에 높이 부는 바람, 기세당당하구나
(樹外天風氣勢豪)
붉은 꽃 피운 밀랍초에는 이삭이 맺혔으며
(蠟燭撥花紅結穗)
차 솥에 차를 다리자 녹색 물결이 이누나
(茶?飛雪綠生濤)
번거로운 세상의 인연은 넉넉하고 한가로운 날
얻기 어려워(塵緣難得優閒日)
책 속에서 다시 일생의 근심을 잊었네
(卷裏還忘百歲勞)

이 시는 담박한 삶을 살았던 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무엇보다 선비의 거처로, 검소함을 드러낸 소재용슬(小齋容膝)은 겨우 무릎을 용납할 정도의 작은 집을 말한다. 사대부의 검박한 삶은 가벼운 작은 배처럼 단순하여 장식이 많거나 무거운 것이 아니며 가을은 투명하고 맑은 계절이라 선비의 기상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때에 “차 솥에 차를 다리자 녹색 물결이 이누나(茶?飛雪綠生濤)”라고 하였으니 담박한 차의 경지는 이미 드러난 셈이다. 물론 이 무렵 그가 마신 차는 산차나 떡차를 마셨을 터이지만 고려나 조선 초기처럼 말차를 즐긴 것은 아니다.

다시(茶詩) 중에 “차 솥에 차를 다리자 녹색 물결이 이누나(茶?飛雪綠生濤)”라는 표현은 단순히 차를 다리는 정황을 시적으로 드러낸 것일 뿐 실제 말차를 즐긴 것은 아니다. 조선 말 무관이었던 신헌이 즐기던 차는 고려시대나 조선 초의 사대부들이 즐겼던 차의 여유와 풍류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시대였다.

한편 그의 학문적 토대는 공맹학(孔孟學)이며 〈심경〉을 탁마했다. 이런 사실은 그의 〈벽간소기(壁間小記)〉에 “아침 차를 마시기 전에 20번을 읽고 차를 마신 후에 20번을 다 읽는다. 저녁에 차를 마시기 전에 20번, 차를 마신 후에 20번을 다 읽는다(朝茶前二十遍 茶後二十遍 暮茶前 二十遍 茶後二十遍)”라고 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그가 주자처럼 음다를 일상화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초의차’가 절정의 진수를 드러냈던 시기에 초의의 초암을 내왕했다는 사실에서 차를 좋아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의 남긴 몇 편의 다시는 이런 정황을 방증하는 자료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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