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붓다’ 31회~33회

지난 줄거리
싯다르타는 드디어 고행길에 오른다. 수행자가 된 싯다르타는 알라라칼라마를 만나 가르침을 받는다. 호흡에 관한 수행부터 명상 등을 배운 그는 곧 다시 번뇌에 빠진다. 명상에 빠져있을 때만 고통에서 벗어나고 눈을 뜨면 다시금 고통 속에 들어간다는 것 때문이었다. 싯다르타는 더 큰 깨달음을 위해 길을 떠난다. 이 길 위에서 싯다르타는 빔비사라왕을 만나 동물의 생명도 존귀하게 여기라는 가르침을 전한다. 고향의 길에 수많은 장애가 닥쳐오지만 싯다르타는 이를 하나씩 극복해 나간다.

수행 중 마왕이 보낸 ‘갈애’, ‘색욕’, ‘욕망’을 이겨내는 싯다르타의 모습. 싯다르타는 이 모든 것이 무명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데바닷다는 싯다르타를 죽이기 위해 싯다르타를 찾아 다닌다. 길 위에서 싯다르타는 죽어가는 달팽이를 보고 이를 살리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춘다. 공교롭게도 이 행위로 인해 싯다르타는 데바닷다를 피할 수 있게 된다.

싯다르타는 마가다국의 또 다른 수행자인 웃다까 다마붓다를 만난다. 웃다까 다마붓다는 토굴 속에서 명상에 빠져 있었다.

“못과 나사가 그러하듯, 진리는 나사를 돌아가게 하지만 자신을 움직이지 않는다네. 고요한 상태입니다. 수많은 자연의 중심점이 움직이며 영향을 주고 받는다네…. 나에게 오는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게나. 호흡 속으로 빠져 들게나.”
우주는 자네 몸의 입자 속에 모두 다있다는 말에 싯다르타는 반문한다.

“저는 그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무상만을 보았습니다.”
싯다르타는 영혼이라는 존재가 윤회를 갖고 오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이어 좌선에 든 싯다르타에게 코살라국의 자객이 다가간다. 하지만 웃다까 다마붓다의 신통력으로 이 자객의 암살시도는 무위로 돌아가고, 싯다르타는 이 자객마저 용서한다.

“왕자님은 두 번이나 공격한 저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저처럼 악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를 죽였을 수도 있지만 어떤 진리를 죽일 수는 없다네.”
싯다르타는 “이 삶의 놀이 뒤에 불멸의 진리가 있다”고 말하자 웃다까 다마붓다는 “정진하면 진리와 하나가 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지만 나 또한 그 경지에 들지 못했다”고 말한다.

고행 중인 싯다르타를 찾아와 제자가 되기를 청하는 다섯 비구의 모습. 단식을 끝내고 수자타의 죽을 먹는 싯다르타를 보고 싯다르타를 떠난다.
웃다까 다마붓다는 그 경지에는 아무도 오르지 못했다고 말했다. 싯다르타는 다시금 정진에 들어간다. 싯다르타는 차례차례 스승을 넘어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자기 혼자의 힘으로 길을 개척하고자 결심한 것이었다.
싯다르타는 고행 중 욕망을 제압하는 수행자를 만난다. 여기서 싯다르타는 영혼이 업의 사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조언을 받는다.

삿다르타는 나이란자나강과 우루벨라 연못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수행처를 정한다. 싯다르타는 명상 중 그동안 보아온 수행자를 떠올린다. 음식을 먹지 않는 수행자, 옷을 입지 않는 수행자, 주문을 외는 수행자 등이었다. 싯다르타는 이러한 수행법이 진리를 접하는 방법이 아님을 명확히 알게 됐다. 싯다르타는 극단적인 고행에 들어간다. 바로 단식이었다.

6년 간의 고행 끝에 싯다르타의 육체는 너무나 쇠약해졌다. 수자타는 강가에서 쓰러진 싯다르타에게 신에게 올릴 공양물을 먹인다.
이 공양물을 먹고 힘을 되찾은 싯다르타는 나이란자나강에 몸을 씻고 수자타가 올린 죽을 먹는다. 이후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정진에 들어가기 전 싯다르타는 도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간을 구제하는 길을 찾겠습니다. 그 길을 알려드리러 돌아오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겁니다.”
마지막 수행에 들어선 싯다르타의 머리 속에는 온갖 망념이 떠오른다. 그의 생애와 주변의 인연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다시금 정진에 든 싯다르타 앞에 독사가 나타난다. 하지만 그 뱀 앞에서도 싯다르타는 동요하지 않는다. 머리 위에 뱀이 똬리를 틀어도 싯다르타는 꿈쩍히지 않고, 이 뱀은 유유히 지나간다. 이어 핏빛 구름과 함께 마왕이 나타난다.

“나는 너의 육체이다. 너는 나를 떠날 수 없다. 나는 욕망이다. 너는 나와 싸워야만 한다.”
“나는 영적세계로 들어간다. 너는 나를 묶을 수 없다. 욕망과 싸우면 더욱 욕망은 강해진다. 나는 싸우지 않겠다.”
싯다르타의 앞에 마왕은 ‘갈애’ ‘색욕’ ‘욕망’을 보내고 이는 싯다르타를 유혹한다.

6년간의 고행 끝에 육신이 망가진 싯다르타를 보살피는 수자타의 모습
“이들은 모두 무명에서 나온 것이며 지혜 앞에서는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된다. 지혜를 얻게 되는 순간 무명이 없어지듯, 자기를 알게되면 마음을 유혹하는 것들이 사라지게 된다.”
싯다르타의 말에 마왕의 유혹은 사라진다. 마왕은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사라진다.

한편, 샤카국에서는 왕이 나이를 먹음에 따라 망갈라와 데바닷다의 힘이 강해지고 아소다라를 향한 그의 욕망은 더욱 거세어져만 간다. 하지만 아쇼다라는 싯다르타에 대한 마음을 굳게 지키며 라훌을 키워 나간다.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싯다르타는 최후의 정진에 들어가고 곧 마왕이 나타난다.

리뷰 - 법현 스님이 본 드라마 ‘붓다’
깨달음의 길 위에서

우리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아마도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순간일 것이다. 어떻게 수행하였는지, 악마(마라)가 나타난다는데 그는 어떻게 생겼는지, 그의 세 딸들이 나타나 끝까지 괴롭힌다는데 그것은 어떻게 한 것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 무상(無常)하고, 괴롭고(苦),무아(無我)여서 나라고 할 것도 내 것이라고 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몰라서 탐내고, 성내는 번뇌를 상징한다고도 하고 어떤 동물이나 종족번식의 본능은 버리지 못하는데 여인들은 바로 그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하는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심리적으로 보았을 때는 이런 것들이 궁금하기도 하고 수행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과연 어떤 경지들을 얻었는지 등이 알고 싶을 것이다.

먼저 선정삼매를 닦았다고 한다. 그리고 알라라 깔라마를 만나서 선정수행을 해서 얻은 경지는 무소유처를 얻는 수행인 무소유처정(定)을 닦아서 그 결과 무소유처천(天)을 얻는다. 정(定)은 수행의 방법이며 삼매의 이름이다. 무소유(無所有)는 ‘소유가 없다, 소유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有)가 없다’는 뜻이다. 즉, 존재가 없어진 것과 같은 의식수준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문장의 띄어 읽기를 살펴본다면 무, 소유가 아니라 무소, 유인 것이다. 웃다까 라마뿟따를 만나서 얻은 경지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정을 닦아서 비상비비상처천을 얻었다. 비상비비상이라는 말은 상도 아니고 상아님도 아니라는 어려운 말로 풀이하지만 ‘연상(聯想)작용이 없다’는 말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선입견에 의해 가지게 되는 연상 작용은 제대로 아는데 방해가 된다. 보기를 들자면 뱀에 놀란 사람은 길고 구불거리는 것을 보면 뱀이라고 생각해서 실제로는 새끼줄인데도 놀란다. 물론, 거꾸로 뱀을 새끼줄로 보고 피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연상 작용이 없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이니 상당한 경지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높은 경지를 얻었음에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판단한 싯다르타는 고행을 극심하게 한다. 드라마붓다에서 열연하듯이 물 몇 모금으로 버티고 음식은 아예 밥 한 덩어리도 입에 넣지 않고 나중에는 물마저도 끊는 것으로 나온다. 개인적으로 물만 마시고 열흘을 견디는 단식정진을 해 본 경험이 있는데 몸무게가 무려 12킬로나 빠졌다. 그리고 마치고 났을 때 요구르트 한 병을 마셨는데 거의 한 나절 이상 배가 부르게 느껴졌던 경험이 있고, 의식이 명료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고행을 통해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강가에 가서 몸을 씻고 나오다 지쳐서 쓰러진다. 그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우루벨라의 아가씨 수자타가 유미죽을 먹인다. 그리고 보리수 나무아래 길상초를 깔고 앉아서 아직까지 배우지 않은 수행을 스스로 닦아 익힌다. 나중에 그것은 위빳사나라고 알려진다. 위빳사나는 관법수행(觀法修行)이다. 관법수행은 단어 그 자체의 뜻과 같이 마음(意)의 지각대상인 법(法,dhamma)를 관하는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의 결과는 지혜를 얻는 것이다. 물론, 지혜는 다시 중생이라는 존재로 태어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나름 고민한 흔적이 진하게 배어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번뇌인 마라와 마라의 세 딸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수행력을 출연자들의 연기와 컴퓨터그래픽 등을 활용해서 극화하고 있다.
싯다르타는 무엇을 깨달아 부처님이 되었을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은 반드시 괴로움을 겪게 되었다는 것과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괴로움을 완전히 없애버린 상태가 있고 이룰 수 있으며 이루는 방법을 알고 실천해서 깨달았다.

이른 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사성제(四聖諦)이다. 고(苦)성제, 집(集)성제, 멸(滅)성제, 도(道)성제라고 한다. 문제(괴로움),문제의 원인, 문제의 해결, 해결하는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이 깨달음을 통해 괴로움의 근원이 되는 존재 그 자체를 소멸하거나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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