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길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는 것이 이 공부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
이 여섯 가지의 이름을 배우려고 하지 말고
그 육바라밀의 행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세우기 위해서
당당할 수 있는, 떳떳할 수 있는 참다운 자유인이 돼라!

항상 여러분과 같이 하면서도 여러분 모습이 다르고 내 모습이 다르고 처소가 다르고 그런 까닭에 항상 말씀드리는 거와 같이, 우리가 처음에 어떠한 작업을 해야만 되는가? 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각오가 단단히 선, 견고한 마음으로써 모든 거를 용광로에 넣는 작업이 첫째로 아주 중요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불이 벌겋게 타오르는 용광로와 같은,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가진 마음입니다. 그래서 항시 여러분한테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첫째 우리가 집을 지으려면 기초가 튼튼해야 하듯이, 우리는 일체 모든 생활에서 그 일체를, 자기 몸까지도, 생과 사도 거기에 놓는 작업을 한다. 안 되는 것도 거기고 되는 것도 거기고, 외로운 것도 괴로운 것도,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생겨도 거기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여러분은 살림을 하시는 분들이니까. 잘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그렇게 찰나찰나 돌아갑니다, 빨리. 그렇게 빨리 돌아가는 것을 육안으론 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안 되는 것도 길게 생각을 하지 마시고 거기서 나온 거니까 되는 것도 거기서 빨리 나오게 할 수 있다 이겁니다. 엎드러진 놈이 있으면 “어이구!” 하고 빨리 일어나는 놈도 바로 그놈이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잘된다 못된다를 다 놓는 그 작업에 세 가지 여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기다 놓고 들어가실 때는 모든 일체 오간지옥이 무너지는 겁니다. 그리고 인연에 따라서 온 습이 모두 끊어지는 겁니다. 나중에는 그릇이 꽉 찼던 것이 비고, 빈 것도 없고 담긴 것도 없는 그러한 위치가 될 때에, 바로 ‘나’가 발견이 되는 겁니다. 내가 발견이 되면 그때서부터 기초가 튼튼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기초가 튼튼하게 됐으면 그때 가서는 기둥을 세우게 돼 있죠, 집을 짓는 데. 기둥을 세우는 데는 물론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이론적으로 요거는 기둥이고 요거는 서까래고, 요거는 기왓장이고 요거는 벽돌이고, 흙이고 흙손이고, 재료의 이름은 다 아신다 하더라도 집을 지을 줄 모른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집을 짓는 데는 견고하게, 어떠한 재료든지 이름을 찾지 말고 그냥 갖다가, 벽돌이 있으면 ‘이거 벽돌이다.’하고 있는 게 아니라 “벽돌을 집어 오너라.” 하든지 집어다간 그냥 쌓는 겁니다. 안 그럽니까?
여러분이 이름이 있으면 이름을 불러 가면서 무슨 일을 합니까? 남들을 불러서 가르치려면 “저 서까래를 가져오너라.” 이러지마는 자기가 쓸 때는 그냥 서까래를 집어다가 그냥 쓰는 겁니다. 일꾼들이 아무 소리 없이, “서까래를 올린다.” 하면 벌써 일꾼들이 다 갖다 놓습니다. 그럼 그냥 그냥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집을 짓는 겁니다. 대들보가 올라가죠. 대들보에 간접적으로 붙어 돌아가는 재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듯이 우리 인간의 몸뚱이 하나로 인해서 그렇게 간접적으로 재료가 많이 붙어 돌아간단 말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오신통이 오신통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각자의 재료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재료! 집을 지으려면 대들보가 올라가듯이, 탑을 세우면 위 봉우리가 올라가듯이, 우린 그 재료로 인해서 망상이나 모든 악행, 거기에 쓸모가 있다 하는 것은 그것이 있기 때문에 바로 선자가 되고, 선자가 있기 때문에 바로 봉우리가 올라가고 대들보가 올라가는 격이다 이 소립니다. 그 모두가 없다면 해탈이라는 거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을 짓는 거와 같고, 우리가 벌써 집을 지으려면, 내가 그런 말을 하죠. 항상 기초를 튼튼하게 해야 집을 짓는다 이런 말을 하는데, 그래서 세 가지가 벌써 무너지는 겁니다. 그리고 두 가지가 무너지면 세 가지째는 벌써 나를 발견한 거, 이것이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어떤 분들은 지금 애가 학교에 가야 하니까, 가난하니까, 일이 안되니까, 모두 정신이 다 거기 가 있습니다. 진짜 해결사한테 마음을 둬야만이 그것이 해결될 텐데, 해결사는 벌써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걸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해결사를 붙들고 늘어져야 할 텐데, 그 일하는 걸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거예요. 네? 이름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거예요, 이 해결사를 붙들고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항상 “나는 주인공을 진실히 믿는데도 그렇습니다.” 이러거든. 진실히 믿기는커녕 해결사를 붙들어야 할 텐데 딴 데를 붙들고 있습니다, 지금.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슬픈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저를 슬프게 만들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울면 저도 울어지고 여러분이 웃으면 저도 웃어집니다.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여러분은 둘이 아닌 까닭을 모르시죠. 왜 둘이 아니라고 하나?

그러니까 육근(六根) 육진(六塵) 육식(六識), 이것을 이름 따라서 꼭 외우고 있단 말입니다. 이거를 외우다 보면 재료의 이름을 외우는 셈이나 똑같습니다. 집을 짓는 거를 배우지 않고, 그 재료 이름만 배우는 사람들이죠. 그렇기 때문에 육근을 말하자면 내 몸뚱이에 있는 여섯 가지의 기능이 동시에 나가는 겁니다. 눈이 가는 데에 귀가 가고 귀가 가는 데에 눈이 갑니다. 이게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럼 만약에 예를 들어서 손가락이 다섯 손가락인데 한 손가락 가지고 일하는 사람 봤습니까? 무슨 일을, 뭘 집으려 해도 다섯 손가락이 다 이렇게 가서 집지, 한 손가락만 가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으로써 이거는 육근을 여섯 가지로 보지 말고, 그건 일심에 통하는 겁니다. 그래서 일심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경계가 여섯 가지라면 여섯 가지가 아니라 일체입니다, 전부입니다. 바깥으로 봐서 들이는 게 또 여섯 가지라면 일체입니다. 그리고 받아들여 놓는 거,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의식 자체가 육식입니다. 그래 이것이 한데 합치면 십팔(十八)이 되죠. 십(十) 이러면은 그냥 만(卍)으로 돌아가는 그게, 팔(八) 하면 사유사무(四有四無) 이것을 한데 합치는 겁니다. 그래서 십팔 심(心), 그 인연에 의해 연(緣)에 따라서 뭉쳐진 거죠. 식(識)입니다. 의식으로 한데 뭉쳐서 들이고 낸다 이겁니다.

그러니 분잡하게, 고달프게 이름을 배우려고 하지 말고, 한 일심에서 내 본래자성불(本來自性佛)에서, 자성불이 있기 때문에 행동이 있고 생각이 있고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생각해서 모든 것을 일거일동, 물질로다가 이름을 세우려 하지 말고, 학술로다 이름을 세우려고 하지 말고, 지식으로다가 알 양으로 하지 말고, 아는 거를 쓰려고 하지도 말고요. 그러니까 모든 것을 거기에서, 그것이 둘이 아니요 셋이 아니요 넷이 아니요, 또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과 행, 보는 것 듣는 것, 모든 게 고정되지 않다 했죠. 그것을 옛날의 선지식들은 멈추지 않는다 이런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멈추지 않는다는 말과 매이지 않는다는 말과 끄달리지 않는다는 말과 또는 여여하다는 말과 그것이 모두가 한 뜻입니다, 다. 걸리지 마라 하는 것도, 걸리지 않는다 하는 것도 거기에 모두 포함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걸리지 않는다 하는 거, 멈추지 않는다 하는 것은 둘로 보지 않는다는 것도 되는 것입니다. 둘로 보지 않기 때문에 걸림이 없지, 둘로 본다면 걸림이 벌써 있죠. 그래서 풀 한 포기도 둘로 보지 말라는 거고 버러지 하나도 둘로 보지 말라는 거죠. 둘로 보지 않고 한데 뭉쳐서 씀씀이를 하는 도리가 바로 한마음에서 나가고 한마음으로 들고,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야만이 이 현재 의식 쪽, 잠재의식 쪽이 동시에 써집니다.

여러분이 물질적인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몸뚱이 속에 들어 있는 나 자신의 그 모두를 100% 쓸 수가 없습니다.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 여러분이 그 도리를 모른다면 몸뚱이로는 부지런하나 머리로는 게으르다 이겁니다. 머리로는 따라갈 수가 없어서, 저 서천국이나 딴 나라는 몸뚱이는 게을러도 머리는 빨라서 선진국이 되고 역사를 좋게 가져올 수 있는데, 몸뚱이는 부지런하면서도 한국 사람은 머리가 둔해요. 게을러!

그러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린 역사도 그렇게 가져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건 왜냐? 이거를 감당할 수가 없으니까요. 발전이 돼도 감당할 수가 없고 경제가 넓어져도 감당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한계에 딱 닿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세계로 본다 하면은 우리가 뒤지고 있는 겁니다. 왜 뒤지고 있느냐? 전자에서부터 역사를 보십시오, 얼마나 뒤졌나. 남의 것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남의 것 배우려고 하지도 않고, 또 내 것 주려고 하지도 않으니, 지금 이북에서 하듯이 그렇게 하니까 선진국도 되기 이전에 그 난리를 만나고 집도 뺏기고 온통 난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얘길 하다 보니깐 딴 데로 샜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한데 뭉쳐서 그렇게 하는데, 또 팔정도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여덟 가지 마음이 있어서 마음을 냅니까? 한마음 속에서 그것이 옳게 생각하고 옳게 행하고, 옳게 정진하고, 이런 말이 나오죠. 그런데 그것이 바로 둘이 아닙니다. 한마음 속에서 여덟 가지가 나오는 것은 바로 마음을 들어서 무심 유심이 같이 합해서 이게 팔정도라면 사무사유(四無四有)도 바로 없는 겁니다. 그냥 수레바퀴가 굴러갈 뿐입니다. 우리가 팔정도를 팔정도대로 본다면 ‘이거는 여덟 가지다.’ 이렇게 말을 하겠지만요, 여덟 가지가 바로 한 가지도 없습니다. 왜? 시공이 없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만약에 똑바로만 안다면 나의 자성불(自性佛), 불바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무(無)의 세계, 유(有)의 세계를 같이 해서 굴린다는 뜻입니다. 이걸 바깥으로만 찾고 이론적으로만 배우지 마시고, 그 뜻을 알고 안으로 잡고 해서 바로 바깥으로 나간다면 이거는 심성과학입니다. 이 도리는 생활이자 참선이고, 참선이자 생활입니다. 그래서 심성(心性)을 빼놓고는 과학을 이룰 수가 없고, 그때는 학(學)도 같이 쓸 수 있는 거죠. 전부 버릴 게 없으니까.

그러나 모든 것을 비울 때에, 없을 때에 한 가지도 버릴 게 없다는 문제가 나오는 거지, 이건 소승이니까 버리고 이건 대승이니까 갖고 이런다면 그렇게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릇이 빌래야 빌 수가 없죠. 그릇 자체도 공(空)했는데 말입니다. 공 자체도 공했는데. 응?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그래서 내가 아까 그런 겁니다. “벽돌을 쌓으려면 벽돌을 그냥 집어다가 쌓지, ‘벽돌 벽돌’ 하고 쌓는 게 아닙니다.” 하고요. 쌓고 싶으면 그냥 갖다가 집어다 쌓는 겁니다. 물 먹고 싶으면 그냥 물 마시는 겁니다. 그게 즉석에서 요리하는 방법이고 즉석에서 먹는 방법입니다. 우물쭈물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육바라밀’ 이러는 거는 우리 인간이 깨달은, 즉 말하자면 그 본각심(本覺心)에서, ‘본각심’ 이러면은 모든 것이 다 한데 합쳐진, 아까 얘기했던 불바퀴다 이겁니다. 그 불바퀴같이 굴리는 마음으로서 음으로나 양으로나 마음 한생각을 내주는 것이, 또 물질을 하나 줘도 이게 모두 같이 주기 때문에 보시가 되지만, 물질 하나 주는 것보다 마음으로 한생각 해 주는 보시가 그렇게 크단 얘기죠. 그래서 여섯 가지가, 여섯 가지가 아니라 바로 본각심에서 모든 그 여섯 가지가 다 나오는 거죠. 여섯 가지가 아닙니다, 그게. 일체 하늘 땅 인간 전체를 한데 합친 그런 본각심이다 이겁니다.

그러니 거기서는 무궁무진하게 모든 거에 얽매이지 않고 그냥 슬슬, 멈추지 않는다는 소리가 얽매이지 않는다는 소리거든요. 그냥 슬슬 여여하게 돌아가니까 취할 것도 없고 안 취할 것도 없고, 닥치면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이런 거나 마찬가지죠. 그리고 또 닥치면 닥치는 대로 응(應)해 주고 이렇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보살의 육바라밀의 행이죠. 그러니깐 여러분이 그거를 낱낱이 하나하나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 이 여섯 가지를 다 뜯어서 요걸 하나하나 배우려면 어느 천 년에 여러분이 자신을 알겠습니까? 그래서 이름을 배우려고 하지 말고 그 육바라밀의 행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세우기 위해서 당당할 수 있는, 떳떳할 수 있는 참다운 자유인이 돼라 이 소립니다.

어느 승려들이 쭈욱 앉아서 공부를 하고, 모두 돌아앉아서 참선을, 좌선을 하는데 말입니다, 어느 스님이 쓰윽 돌아보더니 “그 얼굴은 참 잘생겼구먼, 모두 돌아앉아서 벽을 보고 앉았는데 벽에 얼굴이, 사진이 딱딱 박혀 있구먼.” 아, 그러더라는 거예요. “사진은 거기 있는데 어디서 사진을 또 찾노?” 아, 이러더라는 겁니다. 글쎄 자기 사진은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서 벽에 무슨 사진이 붙어 있다고 벽을 쳐다보고 있느냐 이 소리겠죠. 그러니까 서슴없이 자기네들은 자기네들대로 얘기하는 겁니다. 선(禪)에는 어느 거든지 거기 붙어 돌아가지 않는 게 없으니까. 그랬는데 한 철 나자고 하더랍니다, 그 스님께서. 그래서 거기에서 한 철을 같이 나고 있는데, 그 스님이 참, 말이 무겁고 그 한마디 한마디 하시는 게 얼마나 참 따갑게 찔러 주시는지, 모두 숭배를 하고 거기 주지스님으로 올려 앉혔답니다. 그랬는데 아예 ‘주지도 없고 나도 없다.’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는 겁니다. ‘주지도 없고 나도 없다. 그런데 무슨 주지가 있느냐?’ 이 소립니다.

그래도 그냥 그렇게 모두 좋아하고 모시고 있는데, 하루는 “메밀씨를 갖다가 심어라.” 하니까 모두 메밀씨를 갖다가 심었답니다. 그러고는 그 스님한테 여쭤 보기를, “이제는 메밀국수나 메밀떡이나 메밀장국은 틀림없이 먹겠죠?” 하니까 “두고 봐야 알지.” 하더랍니다. 그래서는 또 메밀싹이 나서 커다랗게 꽃이 피니까 이제는 “메밀떡을 꼭 먹겠죠?” 하니까 “그것도 먹어 봐야 알지.” 아, 또 이제 메밀꽃이 시들고 거기에 열매가 맺으니까, 틀림없이 다 익었으니까 “먹겠죠?” 하고 또 물으니까 “그것도 또 먹어 봐야 알지.” 다 앗아서 가루를 만들어 놓곤 “스님! 스님! 이 가루를 이렇게 앗아서 다 해 놨습니다. 이제도 못 먹습니까?” 하니까 “그래도 먹어 봐야지.” 그러더랍니다.

나중에는 메밀을 개서 장떡국을 했단 말입니다. 동글동글하게 해서는 그냥 다 장떡국을 해서 처음 그릇에다 갖다 놓고는 “이제도 못 먹습니까?” 하니까, 하하하, “먹어 봐야 안다.” 그래서 이제 발우공양을 하는데 전부 한 그릇씩 떠서 전부 놨단 말입니다. 떠억 입에다 넣자마자 “삼키지도 말고 뱉지도 말라.” 하곤 그냥 호령이 났거든.

그래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글쎄?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해야 그 메밀 장떡국을 잘 먹겠습니까? 예? 삼키지도 말고 뱉지도 말라 했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신도1(남) 그냥 먹죠. (대중 웃음)

큰스님 허허허. 그럼 그 스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냥, 그 스님이 말씀한 거는 무효가 되잖아요?

신도1(남) 생각 없이 먹는다는 말씀입니다. 일초 전도 일초 후도 생각 없이 순간에, 일초 전도 일초 후도 없이, 그러니까 생각 없이 행한다 이겁니다.

큰스님 우리 처사님, 말만 많이 하면 안 돼요. 그걸 안으로 자꾸 공부하셔야 돼요. 그 말도 맞습니다. 맞는데, 맞는 말을 자꾸 바깥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함이 없이 지금 했다고 봅니다, 함이 없이. 그 정도라면 그래도 처사님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또 그랬는데, 아 이걸 입에다 넣고선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고는, 그 뜨끈뜨끈한 거를 말입니다. 허허허. 그러니 그것을 막돼먹은 분이 그렇게 한다면 별거 아니지마는, 참 그 엄중한 분이 그러시니 도무지 이거는 뱉지도 못하고 그랬는데, 속에서 슬금슬금 그냥그냥 녹아서 넘어갔거든. 허허허. 나중에 “그 떡이 그대로 있느냐?” 하니까 “조금 남았습니다.” 하는 사람도 있고, “아유! 어떡하다 보니깐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러거든. “그것을 어찌 생각하느냐?” “그냥 삼킨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거다. 그 도리를 알겠느냐?” 그때서야 그냥 고만 앉았던 제자들이 딱 깨친 거예요. 그때에 모든 것을, ‘아하! 이것이 생떡국이 생떡국이 아니고, 넘어가는 게 넘어가는 게 아니고, 뱉는 게 뱉는 게 아니로구나.’ 이거는 그대로 아까 저 처사님이 하신 말씀과 같이 ‘그대로, 그대로구나.’ 하고선 깨쳐 가지고 참 열 명이 다 성불을 했답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넘길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는 것이 이 공부입니다. 그건 왜냐? 넉넉한 생각이라면 지혜도 걸리지 말아야 한다. ‘지혜를 얻어야 한다,’ 이런 것에도 걸리지 말아야 된다. 지혜도 공(空)한 것도, 그 공한 것도 또 공했으니, 거기에 제하거나 또는 거기에 또 걸리거나 이래서는 안 되겠다. 그것도 공했으니까. 자기가 생각하는 부처라고 하는 그 마음 자체도 바로 걸린 거니까, 그것도 없으니까요. 그러니 걸렸다 안 걸렸다도 없이 여여하게 우리가 생떡국을 그냥 먹을 수 있다면, 그냥 슬그머니 녹아서 넘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응? 생떡국 하나가 우주 천하를 다 싼 그겁니다. 즉 말하자면 요 그릇 안에다가 (물 컵을 가리키시며) 삼천대천세계의 우주 천체를 갖다 넣어도 그릇이 작지 않습니다. 이 뜻을 아셔야 됩니다.

모두가 공했다면 여러분 마음은 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하면 “마음은 모양이 없느니라.” 그런데 난 애들도 좀 알아듣기 쉽게 하느라고 ‘체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체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게 걸림이 없습니다. 그 마음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 법의 모든 것을 다 결정지을 수 있는 마음이요, 또 유의 쪽으로는 몸이 행하면서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이렇게 둘 아니게 굴릴 수 있다는 뜻이죠.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