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성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불교에는 ‘소의경전’이 있다. 소의경전은 신행과 수행하는 데 있어 지향할 바, 즉 실천 정신의 근본으로 삼는 경전이다. 흔히 이러한 경전들은 신심의 ‘전제’가 되고, 전제는 비판과 회의가 없는 해석을 낳는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는 지난 10월 15일 미붓아카데미 강의 ‘21세기 불교를 철학하다’에서 ‘불교와 해석학’을 주제로 강연했다. 김 교수는 저서 〈불교 해석학 연구〉(민족사 刊)를 펴낸 바 있다. 김 교수는 “불교는 서양철학의 성질을 닮을 필요가 있다”며 “불교의 역사는 멈춰있다. 새로운 해석을 보태고 더하며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리=박아름 기자

▲ 김호성 동국대 교수는… 동국대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1996년 박사학위 취득, 일본교토 소재 불교대학의 객원 연구원을 역임한 바 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및 일본불교사 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대승경전과 선(禪)〉 〈천수경의 새로운 연구〉 〈천수경의 비밀〉 〈천수경과 관음신앙〉 〈배낭에 담아온 인도〉 〈불교, 소설과 영화를 말하다〉 등이 있다.
서양철학에는 ‘전제’ 없어
회의와 비판의 자유 보장
경전 무거움, 한계 벗어야
멈춰있는 불교역사 발전


서양철학과 불교의 관계
불교를 어떻게 철학할 수 있을까요? 불교와 철학은 어떤 관계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불교 안에 철학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곧 대게가 서양철학과 관련지어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서양철학과 불교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서양철학은 ‘전제의 부재’ 학문입니다. 즉, 무전제의 철학입니다. 서양철학은 전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부처님께서 얻으신 깨달음입니다. 부처님께서 얻으신 깨달음은 불자들 세계에서는 100% 진리입니다. 불자들 중에서 부처님 깨침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불자들에게는 부처님 말씀, 즉 〈팔만대장경〉과 같은 경전들이 바로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전제가 없으면 무엇이든 의심하고 회의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붓다의 깨달음이 전제가 되지 않는다면 모두가 회의하고, 비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서양 철학에는 전제가 없습니다. 세계사적으로 철학의 4대 성인은 동양의 석가모니 부처님과 공자, 서양의 예수와 소크라테스로 평가됩니다. 그런데 현재 서양 철학자들 중에서 소크라테스의 저술이나 저서를 해석하며 자신의 학문을 이어 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는 전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저명한 소크라테스의 철학일지라도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비판하고, 또 요구하면서 자기만의 철학을 세워나갑니다. 앞선 누군가와는 다른 철학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굉장한 자유로움이라는 것이 보장돼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대하는 자세와 출발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또한 힌두교인들이 〈베다(Vedas)〉 경전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도 바라문교에서는 〈베다〉를 최고 경전으로 삼았습니다. 이 경전이 바로 그들에게는 영원한 진리이자 ‘전제’입니다.

그런데 저는 불교와 힌두교 등 전제가 없는 학문들이 서양철학과 닮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제가 지금 우리의 불교를 생각해보면 복사기가 한 권의 책을 복사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의 변화가 반영되지 않은 채 똑같이 복사만 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복사한다고 똑같은 부처님이 나올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생각이 있고 관념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내려놓고 백지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면 공감하되, 동의하지 않는 부분에는 부정의 표시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의 변화가 내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부처님 법을 공부하면 똑같은 부처님이 다시 탄생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면, 그간 불교의 가르침에 어떤 진전과 변화가 있었습니까? 새로움이 없습니다. 2600년 전 우리나라로 들어온 부처님 가르침이 아직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역사는 멈춰있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고, 또 보태지며 발전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철학’입니다.

 

저자의 부재’와 자기 철학
불교를 서양 철학적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자기 철학’을 투영하는 것입니다.

‘자기철학’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다른 사람과 다른 자기만의 철학이라는 말 그대로입니다. 과거 학자들, 조사승, 석가모니 부처님 등과 다른 나만의 철학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감’할 수 있는 얘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편적이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얘기일지라도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자기철학’의 결과물은 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의 역사, 경험 등은 다른 사람과 결코 같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어떤 점이 철학적 사유를 방해하는가 고민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철학할 때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교 그 자체이며, 경전이고, 우리에겐 팔만대장경입니다. 이 모든 것이 ‘진리’라고 전제한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부터가 장애물입니다. 엄청난 부당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삼국유사 이야기에서 손오공이 아무리 도망을 치려해도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부처님 손바닥 안입니다.

저는 이것을 경전의 무거움이라 표현합니다. 항상 경전을 어떻게 가볍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서양 철학자들은 원전(元典)이 없이도 철학적 사유를 잘 지속해갑니다. 아예 원전이 없다는 것은 어패일 수 있으나, 그야말로 권위를 부여하는 원전이 없다는 말입니다. 불교에는 ‘소의경전(종교가 신앙과 수행 및 지향할 바 실천 정신의 근본으로 삼는 경전)’이 있습니다. 소의경전의 존재는 거기서부터 무언가 출발할 수 있는 가능성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무거운 한계가 되기도 합니다. 그 한계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만들면 자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힌두교의 철학 속에서 그들이 〈베다〉를 대하는 자세는 우리와 비하지 못할 정도로 무겁습니다. 이 경전은 사실 쓴 사람, 처음 책을 펴낸 사람이 없습니다. ‘텍스트’ 자체를 그저 따르는 것입니다. 저자의 부재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에도 이 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의상 스님의 〈법계도기〉입니다. 의상 대사(625~702)는 당나라 유학 당시 화엄경 공부를 10년 가까이 하고, 공부가 마무리될 때 스스로 〈법계도기〉 주석서를 펴냈습니다. 그런데 당시 주석서를 다 쓰고 마지막에 펜을 놓기 전에 한 일이 ‘날짜’를 적은 것입니다. 의상 스님은 668년 7월 15일이라고 저술연도를 적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따로 적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이에 대해 “불교는 바로 인연이니 인연을 밝히기 위해 날짜를 적는다. 그러나 인연에는 주인이 따로 없으니, 이름을 적지 않는다”고 밝히셨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베다〉에 이름이 없는 것과는 전혀 의미가 다릅니다. 바로 오늘 우리의 독서행위 속에서 새롭게 저술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 모두 그 저자로서 거듭 태어나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번 책 〈불교 해석학 연구〉에서는 ‘[김호성]’이라고 했습니다. 기존대로 ‘김호성’이라는 이름만 적지 않고 괄호를 함께 표기한 것은 의상 스님의 사례로부터 깨우친 바가 있기 대문입니다. 저자의 부재로부터 상호텍스트성을 읽어내고, 또 상호텍스트성으로부터 불교해석학의 한 독서법을 유추해냈던 입장을 스스로 실천해보고자 함입니다.

 

종학에서 주관성의 가치
참선하는 사람들은 경전에 의지해서 공부 하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에 의하여 교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경전 바깥에 따로 전하는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완전한 경전으로부터 해방입니다. 그렇다면 경전으로부터 해방되고 나서 그 안목으로 경전을 읽으면 어떻게 될까요? 경전이 구름이라면, ‘선’은 구름 위에 떠다니는 것입니다. 마침내 무거운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관심세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 해석학이 학문으로서 형성된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서양 불교학자들이 불교해석학이라는 논문집을 만들면서부터입니다. 당시 서양에서는 해석학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천적론으로 보면 해석학 전통은 사실 매우 깊습니다. 그런데 동양에서 현대 학문으로 자리 잡은 것은 서양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조금 늦은 것입니다.

‘관심세계’는 관(觀, 보다)과 심(心, 마음) 자를 씁니다. 관심석(觀心釋)은 옛 선사 스님들이 처음 쓴 말입니다. 천태사석(天台四釋)의 하나로, 하나의 글귀를 자신의 마음으로 간주하고 그 마음을 관조하는 것처럼 해석하는 방법이라는 뜻으로 일컬어 졌습니다. 예컨대 〈금강경〉을 해석한다고 하면 금강경에 있는 내 마음을 보고, 내 마음을 관찰함으로써 경전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관심석경’ 혹은 ‘관심석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종적인 경전 읽기입니다.

이것의 반대가 ‘관문석’ 내지 ‘관경석’입니다. 경전 속 글을 보면서 내 마음을 그 후에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교종적인 해석학으로 ‘관문석심’ 혹은 ‘관경석심’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경을 공부하면서 마음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말씀을 관찰하고 ‘내가 얼마나 번뇌가 많은가’ 하며 내 마음을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실천적 영역으로 가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관심석은 경전을 가볍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해석의 자유를 키울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불교학’이 아닌 ‘불교철학’을 하고 싶습니다.

해석의 방법론 중 하나에는 종학적 방법론이 있습니다. 종학은 전통시대 각 종파에서 내세운 자기 종파의 학문입니다. 근대 이전의 불교학은 대개 종학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이러한 종학의 극복에 의해 불교학의 근대가 출발했습니다. 종학은 불교학보다 덜 주관적이고, 더 객관적입니다. 종학은 가장 주관적인 학문입니다. 그러나 원효 대사의 경우, 교판을 제시하면서도 종파주의적 입장에 떨어지지 않고 화엄과 다른 대승불교철학, 예컨대 여래장사상 등 널리 포괄적으로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교판을 제시하면서도 포괄적인 회통론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원효 그 스스로 어떤 종파의 개종자나 초시가 되거나 수많은 제자를 거느리는 학문권력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원효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특정한 종파의 이해방식, 즉 종학이나 교학의 눈으로 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저는 모두에게 종학적 성질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자기다운 것’을 되살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재현되고 재조명 돼야할 종학의 가치입니다. 불교학과 같이 기본적으로 고대의 원전을 더욱 더 중시하는 고전학의 전통이 살아있는 경우에는, 시간적으로 고대의 원전에 더욱더 접근되어 있는 해석자의 해석을 더욱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고대의 해석자가 갖지 못한 장점 역시 우리 시대 해석자들이 갖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는 수집하여 활용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고대의 해석자보다 훨씬 더 방대할 수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고대의 해석자가 놓여 있었던 시간-공간의 컨텍스트와 오늘 우리시대의 해석자가 놓여있는 컨텍스트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바로 앞 시대를 살다 간 근현대의 해석자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과연 앞 시대의 사상과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그 확인을 통해 우리 자신의 좌표 내지 출발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