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이 부산불교 보현회 회장

순간의 발심이 30년 자비나눔으로
1979년 불우아동 도우며 첫발
8남매와 이웃 5명 설득해 시작
1982년 보현회 창립으로 폭 넓혀
현재 각지의 300여 봉사자 이끌어

불심으로 개인의 고통도 승화
희귀혈액질환으로 시한부 선고
봉정암 기도서 부처님 가피받아
봉사활동 반대하던 남편도 동참
인재불사 서원도…“학교 후원 진행”


안성이 회장은 … 1952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난 안 회장은 1982년 7월 부산불교 보현회를 창립하고 1997년 보현 홍법 청년회와 보현 축구 봉사회를 창립했다. 자원봉사와 불교 자비행 실천으로 1996년 진해 해군 법당에서 자랑스런 불자상, 2001년에는 부산 불교 신협 감사장 이후 부산 불교 조계종 포교원장상, 부산 불교 포교사단 공로패, 부산불교 조계종 포교원장상, 대한 불교 조계종 불교 여성 개발원 제1회 108인 선정, 부산불교신도회 포교대상 등을 수상했다.
장애아동 목욕봉사, 결핵 환우 돕기, 무의탁 노인 돕기, 장애우를 위한 체육대회 개최, 군장병 위문과 법회 개최 등을 30년 넘게 이어오고 있는 이가 있다. 바로 안성이 부산불교 보현회 회장(64)이다. 안 회장은 자비나눔을 화두로 남은 인생의 서원을 세웠다. 이런 안 회장을 11월 2일 부산 좌천동 보현정사에서 만났다.

불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나
안성이 회장의 어린 시절은 그리 녹록치가 않았다. 일찍이 안 회장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안 회장의 어머니는 8남매를 홀로 키웠다. 안 회장의 어머니를 지탱한 것은 불심이었다. 안 회장이 처음 불교를 접한 것은 어머니의 기와불사에서였다. 13세 때 어머니를 따라 처음 따라 절을 찾은 안성이 회장은 마음의 고향을 찾은 듯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어려웠던 시절, 절에서 얻은 행복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 안 회장이 발심하게 된 계기가 1979년 일어났다.
“결혼 후 아기를 낳고 얼마 되지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동네 길을 가는데 7세 가량 된 어린아이가 다리를 절고 있더군요. 이유를 물으니 친아버지가 다리를 비틀었다는 겁니다. 술 주정뱅이인 아버지가 술을 가져오라며 그런 것이었죠. 아이 엄마는 남편의 폭행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 상태였습니다.”

안 회장은 아이를 업고 꼬박 7주 동안 병원을 다녔다.
“몸의 상처와 함께 아이의 마음에 친아버지가 남긴 상처는 정말 컸을 거예요. 아이에게 저도 모르게 힘들 때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이렇게 외우라고 했습니다. 신기한 일은 아이가 퇴원하는 날 아이 엄마가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피라고 생각됐죠.”

아이를 돕고 난 뒤 안 회장은 삶의 철학이 생겼다. 주변에 어려운 이웃이 많다는 것을 직접 느끼며 이들을 돕는게 적극 나서게 된 것이다.

뜻 같이하는 도반들 모여 보현회 창립
이후 안 회장은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부터 어려운 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러자 뜻을 같이 하는 도반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에는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이 열악했을 때였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너무나 많았던 상황에서 도반들은 큰 도움이 됐다.

“친구들과 함께 천마재활원, 성우원 등 장애아동 재활시설을 찾아다녔습니다. 5명 가량이 함께 가 40여명에 달하는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기저귀도 갈아주었죠.”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안 회장은 사찰에 함께 다니던 한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게 됐다.
“항상 콩나물을 판 돈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던 분이셨거든요. 안보이시니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할머니 집을 수소문해 찾아간 안 회장은 할머니가 영양실조로 시신경이 손상돼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게 됐다. 할머니는 자식들이 남기고 간 갓난아이까지 돌보고 있었다.

“할머니가 고기 잡는 그물의 찌꺼기를 제거하는 등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밤늦게 까지 일을 쉬지 않으셨어요. 영양상태도 안좋으신데 과로까지 하니 시신경이 회복 될 수 없었던 것이었죠.”

안 회장은 도반들과 함께 쌀을 전달하고 할머니를 위한 탁발도 진행했다. 안 회장은 3일간의 탁발 동안 많은 쌀과 기금이 모였다고 말했다. 안 회장은 당시 노력으로 할머니의 영양식을 제공하고 6개월 간 간호로 할머니를 치료했다.

“그 때 당시 20만원이 모였어요. 지금 돈의 가치로 치면 200만원이 넘죠. 저희 친정 어머님이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10만원을 내시고 도반들과 탁발 등을 통해 10만원을 더 모았습니다. 그 때 혼자서 돕는 것보다 단체를 하나 만들면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 회장은 이 사건을 계기로 8남매와 도반들을 모아 13명으로 ‘부산불교보현회’의 첫 모임을 만들게 됐다.

부산불교보현회는 30년 넘게 군포교 활동도 진행한다. 감사패를 들고 있는 오른쪽이 안성이 회장
부산 보현정사 기반, 300여 명이 활동
1982년 7월 보현회가 창립된 이후 점차 많은 불자들이 활동에 동참하게 됐고 60여명으로 증가했다. 처음 가정법회 위주로 진행되던 보현회 법회도 포교당에서의 법회로 진행됐다.

“법당이 더더욱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불교신협에 법당이 있었는데 그 법당을 사용하기 위해 200여 명으로 조합을 구성했습니다. 17년간 불교신협 법당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2012년 부산 좌천동에 보현정사를 개원하게 됐습니다.”

현재 보현회는 300여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장애인 목욕 봉사를 비롯해 독거어르신 돕기, 결핵아동 돕기, 고아원 지원을 비롯해 소년소녀가장 장학금 및 교복 지원, 장애인체육대회 개최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행려 환자들이 떠돌다 마지막으로 가는 마산국립결핵병원에서 22년째 활동 중입니다. 여기서 병원 법당 관해사를 맡고 계시든 정관 스님의 경우 자신도 1m 앞도 보지 못하는 약시임에도 환자들을 거둬들이고 치료를 위해 노력하셨어요. 봉사 현장에서 이런 분들을 볼 때마다 더욱 열심히 해야 겠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보현회는 매년 겨울이면 환자들을 위한 대중공양을 나선다. 240여명의 환자를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고 생필품을 전달한다. 위문공연까지 진행해 매년 500만원에 가까운 금액이 사용된다. 이와 함께 보현회 내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18년 째 장애아동들을 위한 체육대회를 열고 함께 축구 등을 하고 있다.

“천마재활원, 성우원, 평화의 집 등에는 많은 장애아동이 있습니다. 아프다고 하여 그대로 놔두면 안되죠.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할 것 같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체가 부자연스러운 장애아동들의 건강이 좋아지는 모습을 보고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보현회의 나눔 활동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매년 추운 겨울 설날 전 보현회 회원들은 떡국떡을 마련한다. 복지관에 나누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팔아서 소년소녀 가장들의 교복비 등으로 사용한다.

“종립 학교에서 부모가 없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보현회 회원들이 내는 회비는 모두 정해져 있는 나눔 활동에 사용되기 때문에 떡국 떡을 판 금액으로 아이들 교복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없어서 교복을 어쩔 수 없이 물려 입는 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너무 아파 시작을 하게 됐습니다.”

이런 활동 가운데 안성이 회장은 빠뜨리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포교다. 불교가 주는 참 가르침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 인생을 바로 잡아 주는 진리가 되어 바른 힘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군포교를 갈 때와 장애우를 위한 대회를 할 때, 그리고 대중공양을 갈 때에는 직접 손으로 만든 합장주를 가져갑니다. 500개 혹은 천개씩 매년 만드는 개수는 엄청나죠. 그들에게 불교를 강요 하지는 않습니다. 합장주를 나눠주며 보현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안 회장은 “나중에 커서라도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은 그곳이 불교와 관련 있다는 것을 알면 한번이라도 부처님을 떠올리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런 노력 덕분 일까. 현재 보현회에 활동하는 회원들 중에는 청소년기 안 회장을 만나 나눔활동을 시작한 이들이 많다.

“한번은 군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현재 군법사님을 돕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면서요. 제가 생각이 났다며 연락이 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결손가정 전세금 및 병원비를 보조하고 있는 안성이 보현회 회장(사진 왼쪽)의 모습
죽음의 위기, 봉정암서 기도하고 완치
안성이 회장은 39세이던 1990년 죽을 고비를 넘겼다.
“남편의 건강검진 차 함께 간 병원에서 의사선생님이 당장 정밀 검사를 하자고 하더군요. 무릎이 부서질 정도로 아팠지만 단순한 생활 습관 질환이니 했는데 문제는 생각보다 더욱 심각했습니다.”

안 회장은 지금도 병명을 모른다고 했다. 안 회장은 몸 내부에서 피가 새고 멈추지 않는다고 진단 받았다.
“2주 넘게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원인 불명이라고 하더군요. 3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받고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제 봉사활동을 지지하지 않던 남편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서야 마음을 냈어요.”

이후 남편은 안 회장의 절대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불교와 나눔 활동에 관련한 일은 발 벗고 나서 도움을 준다고 선언 했다.

“보현회는 가족 회원이 많습니다. 한 사람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지요. 한 가족 전체가 모두 나서서 동참합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이 모든 것이 부처님의 가피라 여기고 있습니다.”

안 회장의 남편은 안 회장이 기도를 하고 싶다고 하자 전세버스를 빌려 함께 기도할 이들을 모집해 봉정암에 갔다.

“당시 70세가 넘은 노보살님들과 장애인들도 있었어요. 모두 처음 봉정암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길도 험했지만 신심하나로 오를 수 있었습니다. 무릎이 아픈 저도 끝까지 올라갔으니까요.”

안 회장은 봉정암에서 기도를 하고 몸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 스님께서 ‘아프십니까?’ 하시더니 기도를 같이 해주셨어요. 근데 신기하게도 무릎이 안 아픈거예요. 덕분에 봉정암에서 내려 올 때는 제일 먼저 내려 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 부처님의 가피라고 밖에 생각이 안됩니다. 지금도 몸에서는 출혈이 있지만 아직 살아 있지 않습니까? 죽는다 했는데 지금까지 살았으니 남은 인생 더욱 보살행 실천에 앞장 서라는 부처님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안 회장은 그 이후부터 봉정암에 지속적으로 순례를 가고 있다. 2010년에는 10보 1배로 봉정암에 가기도 했다.  “살려주신 뜻을 생각합니다. 초심이지요. 5년 동안 다녀오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좋은 시간들이었습니다.”

불교의 숙제 인재불사에 앞장서
보현회 활동 가운데 가장 아쉬운 점에 대해 안성이 회장은 인재불사를 꼽았다. 안 회장은 보현회 초창기 어린이를 위한 법회와 불교학교를 주도하며 3년 동안 어린이를 지도해왔다. 하지만 법당이 없던 당시 여러차례 어려움을 겪고 어린이 법회가 사라지고 말았다.

“어릴 때 부처님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고 있습니다. 보현회 활동 가운데 가장 아쉬운 것이 어린이 법회가 중단 된 것입니다. 인재 불사는 불교의 숙제입니다. 인도처럼 성지만 남고 불자는 없는 곳이 될까 염려가 됩니다. 화려한 법당을 세우기 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재 불사입니다.”

앞으로 안성이 회장은 지금까지 해온 봉사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재불사를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그 숙제에 대한 답을 함께 제시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싶다고 전했다.

“종립학교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쏟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금정중학교, 해동중학교, 밀양에 있는 홍제중학교 까지 그들을 찾아 도움을 주려는 이유는 오직 전법이죠. 그리고 스님들을 찾아가 인재불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곤 합니다. 건물 불사에 대한 필요성은 알지만 인재불사보다 우선시 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안 회장은 “기독교의 공격적인 포교를 보면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한번 포교 해본 경험은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안 회장은 “불자들은 사람의 중요성에 대해 너무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재불사는 저도 노력을 기울이며 관심을 가장 많이 갖지만 혼자서는 결코 안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한 가정 한 자녀 법당보내기 운동도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보현정사에서 어린이 법회를 지속적으로 열어 어린이를 위한 방안도 구체적으로 마련할 생각입니다.”

안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유마 거사의 말이 떠올랐다. 오늘도 아픈 중생을 찾아가는 안성이 회장은 말한다. “그들이 부처님입니다. 아픈 중생이 바로 저의 부처님입니다.”

제18회 장애우를 위한 한마음체육대회. 보현회는 장애아동을 위한 축제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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