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화암사 10월 31일 ‘선시비’제막식 봉행

일주문서 법당까지 2km 거리 ‘선시의 길’ 조성
근현대 선사 13명 열반송과 오도송 시비 건립
“순례객에게 깨달음과 비움의 지혜 선사” 취지

“공연히 이 세상에 와서/지옥의 찌꺼기만 만들고 가네/내 뼈와 살을 저 숲 속에 버려 두어/산 짐승들 먹이가 되게 하라.” (고한 희언 선사의 열반송 中에서)

“문득 콧구멍이 없다는 말을 들으매/온 우주가 나 자신임을 깨달았네/유월 연암산 아래 길/하릴없는 들 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경허 성우 선사의 오도송 中에서)

수바위로 유명한 천년고찰 미륵도량 강원도 고성 화암사에 전국 사찰에선 처음으로 역대 선사들의 깨달음을 읊은 선시를 감상할 수 있는 ‘선시의 길’이 조성돼 눈길을 끈다.

선시란, 수행자들이 스스로 깨닫고 체험된 세계를 언어로 형상화하고 표현한 것을 말한다. 즉 돈오(頓悟)적 직관으로 존재의 실상을 깨닫고 내심자증(內心自證)된 세계를 언어로 표현한 작품으로 선적(禪的) 사유(思惟)와 상징성, 압축미 등이 돋보인다. 특히 열반송과 오도송도 이에 속한다.

화암사는 일주문서 절 입구에 이르는 2km 남짓 도로 포장공사를 하면서 길 양쪽 주변에 20여개의 시비를 만들었다. 등장하는 선사들 법명만 들어도 존경심에 절로 합장이 되는 근현대의 선지식들이다.

화암사는 10월 31일 일주문 앞서 ‘선시비’ 제막식을 열었다. 이날 행사는 영은암 회주 정휴스님(前 불교신문사 사장·사진왼쪽서 다섯번째), 윤승근 고성군수, 이병선 속초시장, 정문헌 새누리당 국회의원, 김시성 강원도의회 의장 등 사부대중 100여 명이 참석했다.
보우 휴정 등 고려와 조선시대 선사들을 비롯해 경허 한암 효봉 경봉 성철 일타 스님 등 근현대 한국불교에 족적을 남긴 13명 스님들의 깨침을 읊은 오도송과 열반송을 비석에 새겼다. 흥미로운 것은 우측통행이 상식이라면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는 현대서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깨달음을 이룬 고승들의 오도송을, 다시 내려가는 길 오른쪽에는 고승들의 열반송 위주로 비를 세워서 사찰을 찾는 순례객들에게 깨달음과 비움의 지혜를 비롯해 명상과 사유의 즐거움까지 만끽하도록 했다.

화암사(주지 웅산)는 10월 31일 일주문 앞 특설무대서 ‘선시비’ 제막식을 열었다. 이날 행사는 영은암 회주 정휴스님(前 불교신문사 사장), 윤승근 고성군수, 이병선 속초시장, 정문헌 새누리당 국회의원, 김시성 강원도의회 의장 등 사부대중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이 자리에서 주지 웅산 스님은 인사말을 통해 “일주문서 법당으로 가는 도로를 재정비하면서 올라오는 길에는 오도송의 시비를 읽으며 깨달음을 배우고, 내려가는 길에는 열반송을 보면서 내려놓고 비우는 지혜를 통해 자기현존을 되돌아보게 하는 명상과 사색의 길을 만들고자 선시의 길을 조성하게 됐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이어 윤승근 고성군수도 축사를 통해 “불교는 복을 구하는 기복적인 종교가 아니라 발심과 정진을 통해 대자유를 성취하는 고귀한 종교”라며 “그런 발심과 수행의 길에서 선지식의 가르침은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사찰을 오르내리면서 이 고귀한 글귀들을 가슴에 새기며 치유와 사색의 시간을 갖는 힐링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날 행사는 영은암 회주 정휴 스님의 ‘가을’을 주제로 한 법문으로 마무리 됐다. 스님은 “떠남과 비움이 있는 가을 처럼 우리도 집착을 털어 버리고 비움으로써만이 자유스러워 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행사가 끝난 뒤 주요 내빈과 참가자들은 정휴 스님의 선시비 설명을 들으며 일주문서 사찰에 이르는 선시의 길을 함께 따라 걸었다.



정휴 스님 법문 요약

“가을은 ‘체로금풍’… 내려놓음, 비움 전해줘”

벌써 10월의 마지막날입니다. 대청봉에서는 낙엽이 지고, 이 행사장 주변에만 가을의 끝자리를 볼 수 있는 단풍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가을 아름다운 단풍을 보면서 오색 단풍이 거저 아름다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봄에는 새순으로 돋아서 수많은 비바람을 맞고 때로는 천둥과 폭풍이 지나고 여름에는 가뭄이 들어 타는 목마름이란 역경을 지내고 나서야 가을이 돼서 오색단풍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보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도 이런 역경을 거쳐야 안으로 여물어 지고 영글어 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항상 그 밑바탕에 슬픔과 고통이 깔려 있습니다. 중국의 유명한 운문 선사는 가을을 ‘체로금풍’이라 했습니다. 가을바람에 모든 만물이 제 모습을 드러낸 다는 의미입니다.

가을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깨달음을 주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인간의 감성을 환기시키기도 하고 많은 느낌과 의미에 큰 진폭을 갖게 해줍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우리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연설하더라도 이 가을만큼 우리 인간에게 이 아름다운 감동의 진폭을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가을은 또하나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배우게 하는 계절입니다. 첫째 떠남이 있고, 내려 놓음이 있고 비움이 있습니다. 이 가을 나무를 한번 쳐다보십시오. 이 가을나무가 스스로 내려놓고 비우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바로 이 자리를 통해서 집착에서 벗어나고 자유스러워 져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만큼은 세속적 자리를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안에 갇혀 있는 틀에서 뛰쳐나오시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소중한 정신적 가치를 실종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를 돌아봐도 지금처럼 먹고 배설하는 것이 삶의 중심에 선 시대가 없었습니다. 먹고 배설하는 것은 짐승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정신적 멘토와 가치가 실종됐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가을의 끝자락서 선시의 길을 걸으며 자기성찰의 시간을 갖는다면 오늘의 이 자리가 갖는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선이라는 것은 집중을 통해서 자기 실상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본질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사유하고 몰입하고 명상해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아름다움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 성숙을 통해 여러분의 내면에서도 충분히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선시의 길은 짧지만 이길을 걷는 시간만큼은 자기를 찾는 내적 성숙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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