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강 스님

‘판치생모’ 화두 타파하며
전강 ‘대선사’ 호칭 얻어
생명력 자체란 사실 깨달아

▲ 먹(墨), 193×95cm, 종이에 수묵, 2012.생명은 깊은 원리이다. 주와 객은 부정과 부정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 모순과 역설이다.

스님 모습 그리는 것 아닌
살아있는 에너지 마주해

 

창작자는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와 공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특히 그림 도구에 대한 자세는 자신이 어떻게 예술을 생각하는지의 여부와 관련이 깊다. 작품을 하는 모든 재료는 창작자 자신이 몸과 생각을 씻고 관리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일차적 재료인 먹을 가는 벼루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선비들이 거론한 벼루에 대한 글들이다.

“먼지를 털고 벼루를 씻으며, 향을 사르고 차를 끓이고, 화병에 꽃을 꽂고 주련을 걷어 올리니, 일마다 몸소 하기에 힘들지가 않다”
“비록 글씨는 잘 쓰지 못하더라도 붓과 벼루만큼은 깨끗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먹이 켜켜이 앉은 벼루는 주인의 얼굴에 묻은 때다… 얼굴을 씻듯 벼루를 닦는다.”
“문인에게 있어 벼루는 미인에게 있어 거울과 같다. 일생 동안 곁에 두고서 가장 친히 지내는 물건인 까닭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벼루를 깨끗이 씻고 먹을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스님을 그리면서 이 벼루의 검은 먹물 속에서 스님의 모습이 보였다.

스님의 하루는 법상에서 시작한다. 법문은 대부분 새벽에 이루어 졌다. 주제는 따로 정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스님이 하시고자 하는 바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펼쳤다. 스님의 화두는 ‘판치생모’이다. 널빤지와 같은 이에서 털이 난다는 뜻이다, 스님은 이 화두를 타파했다. 그래서 대선사의 칭호를 얻었다.

본래 판치생모는 ‘조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이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판치생모니라’고 답했다는 말에서 비롯된다. 애매모호하다. 깨침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화두를 내린 자와 받은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인가? 깨달았다는 것을 어떻게 제3자가 알 수 있는가? 마음을 통해야만 알 수 있다면 결국 이심전심이 아니라면, 깨달은 경지를 범접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자기들의 아성으로 자신을 숨기기에 급급한 장치인 것은 아닌가? 깨달음은 어떻게 증명하는가의 문제였다.

나는 한때 이런 의문으로 번민한 적이 있다.

내가 학교를 막 가려는 참이었다. 어머니가 내 머리를 툭 친다. 그 뿐이었다. 그리고 학교에 늦을까봐 서둘러 뛰어갔다. 쉬는 시간이었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데 불현 듯 어머니가 왜 내 머리를 쳤는지 생각이 났다. 아, 어머니께서 어제 저녁 자기 전에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라 했는데 깜박했구나. 그래서 머리를 쳤구나. 나는 화두에 대해 이렇게 이해했다.

 어느 날 잘 아는 화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개인전을 준비하는데 그림에 대해 조언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작품에 대해 한참동안 느낌대로 설명을 했다. 작품은 열심히 한다고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 그것이 생명력의 힘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서는 살아 있는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 마지막 한 수가 작품의 질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고수를 찾아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다. 조심스럽지만 그 한수는 맺힘과 풀림의 순간에 있다. 그 방식은 그림마다 다르고 사람의 특성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그는 알아듣지 못했다. 오히려 자기주장에 급급했고 나를 설득시키려 했다. 나는 작업실을 나오면서 “오늘 날씨가 왜 이렇게 춥다냐?” 했다. 이 말은 단순히 날씨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말은 그 말뜻을 알아듣는 자만 알아듣는다. 이처럼 화두도 내리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서로 마음이 통해야만 된다. 두 사람이 마음이 통해야 뜻을 아는 것이다. 말은 이렇게 증명이 되기도 하지만 기실 깨달음이란 그것을 증명하기 굉장히 어렵다. 깨달음은 과학적인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 그렇다고 증명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견해가 한 번 트인 사람은 눈치가 다르다. 영감으로 알 뿐이다. 나는 깨달음의 경지가 이럴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공부할 때의 분위기가 생각났다. 궁극의 경지에 다다른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살아있는 에너지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어 퍼졌다.

가르침이란 그것을 주는 사람의 에너지까지 받는 법이다. 에너지는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죽어 있는 시체를 받았다면 어떻겠는가? 화두가 죽은 것 아닌가?

‘판치생모’. 나는 이 화두를 들면서 송곳으로 뼈 속을 후벼 파듯 궁구해 나갔다. 어떻게 이빨에 털이 날까? 의문이 생겼다. 의문을 키워 나갔다. 그 의문이 선정이 되도록 계속 확장 해 보았다. 그리고 자면서 까지 의문 속에서 잤다. 만약에 오매일여의 경지라면 이런 순간이 아닌가 싶다. 의정에 들다 보면 깨달음의 인연이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전강 스님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스님은 내가 왜 찾아 왔으며 어떤 것을 갈구하는지 알았다. 그것을 알기에 거기에 맞는 처방을 주었다. 그 처방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화했다. 오늘 갈 때와 내일 갈 때가 다르듯 그 경지에 맞는 그대로의 처방을 내려 주었다. 그것은 분명 생명력이었다. 아! 이것이로구나! 무릎을 탁 치면서 일어서려는 순간 또 다른 의문의 경지에 갇힌 듯 혼미했다. 그러면서 또 다시 길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았다. 그 길은 혼자 가야 할 길이다. 세계의 진실을 노래하는 예술가는 선험적으로 고독하다하는데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체득이란 이렇게 멀고도 먼 것인가?

나는 보통 오전에 작업을 시작하여 오후 3시에 마친다. 전강 스님을 그리면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님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설명 할 수 없지만 살아있는 에너지가 맞선 채 들어온다. 진정한 고수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 하고 재주가 다 보이면 이미 재주가 아니라 했다. 진실은 무질서와 열정 속에 뒤섞여 있다.

 

▲ 법(法), 193×95cm, 종이에 수묵, 2012.사상이 높다는 것과 사상이 깊다는 것은 다르다. 스님의 법문은 언어의 표현을 넘어선다. 정신의 최고수는 소박하지만 결이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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