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초청강연 김경임 중원대 초빙교수

복장물ㆍ화상 등 약탈증거 ‘명백’
한국불상 대마도에 130여 점 있어
불상 적법소유라는 日해명 촉구
소유권 역사 및 경위 입증해야

 

▲ 김경임 교수는…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 대학교,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애크런 로스쿨에서 연수했다. 국내 최초 여성 외무고시 1호 합격자로 미국과 일본, 유럽 등지서 근무했으며,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과 주 튀니지 대사 등 역임한 바 있다. 현재 중원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세계 문화 유산 약탈사>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등이 있다.

김경임 중원대 교수는 10월 28일 조계사의 초청으로 극락전에서 ‘부석사 불상,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강연했다. 김 교수는 부석사불상 취등경로 등 연구 조사를 토대로 지난 8월 저서 <서산 부석사 관음상의 눈물>를 펴낸 바 있다. 김 교수는 “부석사 불상 문제가 한일 양국과 대마도가 공유해 온 역사의 한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인 만큼 최소한의 공감대가 필요하다”며 “일본은 부석사 불상이 어떻게 처음 대마도로 건너갔는지 경위를 밝히는 데 성의를 보여야 한다. 그 다음 불상 반환을 요구하는 것이 순서”라고 강조했다. 정리=박아름 기자

 

부석사 불상, 어떻게 귀환됐나
2013년 1월 대마도에서 일어난 부석사 불상 도난사건이 언론에 처음 보도됐을 때, 불상의 사진을 대하고 지극히 자비스런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화상을 입은 몸으로 수백 년 만에 홀연히 우리 앞에 나타난 불상이 우리의 잊혀진 아픈 과거를 드러내는 듯 했습니다.

서산 부석사 관음보살좌상은 1330년 서산 마을의 평범한 주민 32명이 관세음불의 연민과 자비에 의해 그들이 처한 당대 화란으로부터 구원 받기를 간절히 빌며 봉안했습니다. 그렇기에 아름다운 고려불사아이라는 예술적, 종교적 존재를 넘어 서민들의 삶의 편린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또한 서산 서민들과 대마도의 유일한 관계를 전해주는 귀중한 역사적 가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어떤 경위를 거쳐 다시 돌아왔을까요? 2012년 11월 초 경찰에 한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국보급인 통일신라 금동여래입상과 고려시대 동조관음보살좌상의 판매를 알선하는 조직이 대구 지역에서 암약하고 있는데, 도난 문화재임이 확실하다는 제보였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2월 17일, 일본 경찰은 인터폴을 통해 대마도에서 일어난 문화재 도난사건 수사 협조를 요청해왔습니다. 일본 경찰이 수사 협조를 요청한 문화재는 국내에서 제보된 도난 문화재와 일치했습니다.

경찰은 수사를 시작했고 2013년 1월 23일 마산에 있는 한 냉동창고에서 불상 두 점을 압수했습니다. 화상(火傷)의 흔적이 있는 두 불상은 모두 진품으로 확인됐고, 그 중 하나가 고즈나 간논지에 있던 관세음보살좌상이었습니다. 이 불상이 바로 1330년 서산 부석사에 봉안된 고려불상이었다는 감정 결과가 나왔습니다. 일본 정부는 도난 문화재인 만큼 즉각 반환을 요청했고, 이에 대해 한국 정부도 외교 채널을 통해 반환을 검토하는 모양새였습니다. 바로 이때 국내 여론이 분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압수된 불상 중 적어도 관세음보살좌상만큼은 반환 되선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1330년 서산 부석사에 봉안된 이 불상은 왜구에 의한 약탈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인터폴에 의뢰했던 한국 절도단의 대마도 불상 절취사건은 어느 틈엔가 일본의 한국 문화재 약탈사건으로 반전되며, 과거 수백 년 전부터 한국 문화재를 약탈했던 일본의 오랜 전력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대마도 작은 섬 안에 백 수십여 구의 한국 불상이 우글거린다는 것은 일본인들도 잘 몰랐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모든 불상이 화상으로 훼손되었고, 대마도로 건너간 경위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마도 불상은 대마도의 ‘수상한 과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만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본인들의 혁혁한 해외진출의 원조가 되는 전설적인 왜구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간논지 불상 도난사건이 야기한 중대한 당면 문제는 그간 한일 양국 간에 신경전을 별여 왔던 일본의 한국 문화재 약탈 규모를 크게 늘려 놓은 결과가 된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나 임진왜란보다도 3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서 14세기 고려 말부터 자행된 일본의 조직적인 한국 문화재 약탈 전력이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내며 드디어 양국 외교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도난과 약탈에 관한 국제법
수백 년 전 약탈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문화재가 절도범들에 의해 원소유국으로 되돌아온 사건이라는 점에서 대마도 불상 절도사건은 국제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희귀한 사건입니다. 도난과 약탈(입증이 되었다면)이라는 두 가지 범죄가 얽힌 이 불상의 처리를 위해서 오늘날 참고할 수 있는 국제법의 규정이나 국제관행은 찾기 힘든 형편입니다.

1970년 성립된 ‘유네스코 불법문화재 반환협약’은 1970년 이후에 도난과 불법에 의해 반입된 문화재는 반환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협약에는 한국과 일본이 가입하고 있는 만큼 부석사 불상이 단순한 도난 문화재라면 한국은 유네스코 협약에 따라 불상을 반환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석사 불상이 약탈문화재라면 문제는 간단치 않습니다.

약탈된 문화재의 경우,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에서 천명된 ‘전시 약탈문화재 반환원칙’이 국제관습법으로 굳어져 가면서 19세기 이후의 전쟁 기간 중 약탈된 문화재가 일정 부분 반환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수백 년 전 약탈된 문화재에 적용되는 국제법이나 국제관례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약탈문화재를 합법으로 인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그리스, 터키, 이집트와 같은 나라들은 과거 수백 년 전 약탈된 문화재 반환을 위해 꾸준히 투쟁을 벌이고 있고, 이 같은 약탈문화재 반환운동은 문화재 관련 학자들을 중심으로 국제사회 호응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부석사 불상은 우선 약탈을 입증해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누가 약탈을 입증해야 할까요? 과거에는 불법 문화재의 경우, 불법을 입증할 책임이 청구국에 있으며, 피청구국은 불법이 입증될 때까지 무죄 추정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관행은 변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박물관협회(AAM)는 문화재의 윤리적 측면에 유의하여 불법 문화재의 협의가 일단 제기되면, 소장 박물관 측에서 먼저 그 문화재의 과거 출처 및 소유권 역사(provenance)와 입수 경위를 설명하도록 책임을 지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관행은 유럽 국가들과 유네스코와 같은 국제기구에서도 수용되어 오늘날 문화재에 관한 한, 기증 책임은 박물관 측으로 옮아가는 추세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대전지방법원이 ‘불상을 보관하고 있던 일본 간논지가 이 불상을 정당하게 취득했다는 것이 재판에서 확인되기 전까지 우리 정부는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에 대한 점유를 풀고 부석사에서 위임하는 집행관에게 인도해야 한다’고 가처분수용결정을 내린 것은 일본 간논지 측에 약탈된 것이 아님을 입증하라는 판결입니다. 이는 오늘날 국제사회 추세를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측이 주장하는 약탈은 수백 년 전에 일어났고, 일본은 이 불상을 500년 가까이 무사히 보존해 왔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법의 잣대로만 해결할 수 없는 과거 역사에 대한 반추가 필수적입니다.

 

대마도서 약탈 증거를 찾다
충청남도 서산시와 비슷한 170㎢ 면적의 대마도에는 오늘날 확인된 한국 불상이 130여 구 존재합니다. 그러나 드러내지 않고 소장하고 있는 불상을 감안한다면 대마도 내에 있는 한국 불상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들은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 초의 불상들인데, 완전한 형태가 하나도 없으며 몇 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화상을 입었습니다. 게다가 전부가 출처 불명이며 대마도에 건너간 경위로 모두 불명입니다. 즉, 불상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조성됐는지, 그리고 어떤 경위로 대마도에 가게 됐는지에 관한 아무런 기록도 없이 대마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접점에 위치한 대마도에 고려불상이 존재한다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치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마도를 막연히 한국과 일본의 중개지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한국과 대마도는 어떠한 관계였기에 불탄 한국불상 130여구가 대마도 곳곳에 존재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석사 관음보살좌상만이 언제 어디서 조성되어 봉안됐는지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불상의 조성 내력을 보여주는 문서가 불상의 복장물 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부석사 관음보살좌상은 고즈나 간논지에서 도난당했습니다.

부석사 불상의 복장물은 언제 발견됐을까요? 우선 불상이 대마도에 건너간 경위는 불명이지만, 대마노 간논지에 안치된 경위는 기록이 있습니다. 간논지의 벽에 ‘당사(當寺)의 유래’라는 벽보에는 이 절이 대영 6년(1526)에 창건되면서 이 관음상을 모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400여 년이 지나 복장물의 존재가 확인됩니다. 1951년 5월, 당시 간논지 주지 안도 료순 스님이 먼지를 털려고 불상을 들어 올리던 중 불상 밑창의 나무판자가 열리며 복장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복장물 속에는 불상의 조성 내력을 기록한 문서가 들어 있었는데, 가로 45.5cm, 세로 56cm의 종이에 묵서(墨書)된 발원문이었습니다. 발원문에는 ‘남섬부주 고려국 서주 부석사 당주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하는 결연문’이라 적혀있습니다.

결연문은 우선 천력(天歷) 3년 2월, 불상을 고려국 서주 부석사에 봉안했음을 밝힙니다. 이는 1330년 2월 서산 부석사에 봉안되었다는 뜻입니다. 부석사 불상은 그 조형상의 우수함과 풍부한 복장물 때문에 불교사, 미술사적으로 중요하지만, 학자들은 발원문에 의해 이 불상이 제작지와 제작연도가 밝혀진 불상이라는 점에서 고려불상의 준거로서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현재 일본과 한국에 남아있는 고려 후기 불상 1백여 점 중 복장물이 들어 있는 관음보살상으로는 한일을 통틀어 이 불상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산은 1352년부터 왜구 침입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했습니다. 왜구에 의해 서산이 적어도 4~6회 약탈됐다는 《고려사》기록이 이를 증명합니다. 물론 고려인 또는 조선인 제3자가 서산에서 불상을 입수하여 대마에 기증했을 수 있다는 가정도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현실성이 전혀 없는 억지 가정입니다. 기증보다는 교역을 주장하는 것이 좀 더 큰 가능성과 현실성이 있지 않을까요?

1972년 대마도 문화재를 조사했던 일본인 학자들은 부석사 불상이 대마도로 간 경위가 ‘교역’일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불상을 약탈한 자에 관한 중요한 단서가 1978년 출판된 《대마미술》의 <조선의 불상> 편에 나옵니다. 《대마미술》은 ‘간 논지의 연혁’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왜구의 한 집단이었다고 생각되는 고노씨가 창립한 간논지에 1330년 제작된 고려불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왜구에 의한 불상 등의 일방적 청구가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일본인 학자에 의한 이 글 역시 부석사 불상이 기증이나 교역이 아닌 왜구에 의한 ‘일방적 청구’, 즉 약탈에 의해 이전된 것임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석사 불상의 손가락 끝과 가사자락 끝이 화상으로 문드러진 것도 하나의 증거입니다. 화상은 불상이 기증이나 교역이 아닌 전투 중의 약탈에 의해 이전됐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습니다. 《대마미술》에서도 ‘대마의 조선 금동불은 오전한 작품이 극히 적은데 불상의 전래에 평상적이지 않은 일이 많았다는 사정이 상상된다’고 적은 것으로 보아 일본인 학자도 스스로 약탈에 의해 부석사 불상이 이전됐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부석사 불상은 기증이나 무역에 의해 대마도에 건너갔다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서산에서 약탈됐음을 직접증거가 없다 해도 약탈되지 않았음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나가사키현은 1973년 부석사 불상을 문화재로 지정한 후 최근까지도 ‘일본에 전래된 경위 미상’이라는 설명과 함께 문화재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약탈 가능성이 있는 불법 문화재를 충분한 조사 없이 현의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은 약탈 문화재를 적극 용인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국제적 관행에 크게 어긋나는 형태입니다. 나가사키현과 일본 정부는 부석사 불상과 관련된 일본 측 기록을 조사해 진상 경위를 밝히는 데 성의를 보여야 합니다. 그런 다음 불상 반환을 요구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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