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N드라마붓다 27~30회

수행자가 되기 위해 머리카락을 자르고 세속과의 인연을 끊는 싯다르타. 이 소식을 들은 샤카국의 모든 백성들은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삶의 고통을 해결할 해답을 얻으면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한다.
 

지난 줄거리

싯다르타는 매일 성문 밖에서 백성들을 살핀다. 어느날 수행자를 본 싯다르타는 그 자유로움에 또다시 고뇌에 빠진다.
마하파자파티는 싯다르타의 아이가 태어나 싯다르타가 아이를 보면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이란 브라만의 예언을 듣고 이를 막고자 했지만 싯다르타는 아이를 본 뒤 장애를 벗어 던진다는 ‘라훌’이라 이름한다.
이러는 사이 국외정세는 급변한다. 코살라국은 지난 전쟁의 패배를 갚을 복수전을 꿈꾸고 코살라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전쟁을 막기 위해 싯다르타는 마가다국으로 떠난다. 싯다르타가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을 설득해 동맹을 맺지만 그 사이 코살라국의 기습으로 카필라바스투는 피로 물든다. 이런 잔혹한 살생 현장을 보고 싯다르타는 다시금 고뇌에 빠진다.

 

27회는 싯다르타가 카필라바스투의 참극을 목도하고 번뇌에 빠져있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민초들의 죽음과 자신의 행복 앞에 견딜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싯다르타는 이 고통을 끊을 수 있는 길이 있음을 깨닫는다.

마침내 싯다르타는 성을 나서고 출가의 길을 걷는다. 싯다르타가 수행자의 길로 떠나자 샤카국은 큰 충격에 빠진다. 특히 아버지인 숫도다나 왕의 충격은 더욱 컸다. 이 소문은 인도 전역에 퍼진다.

길 위에서 싯다르타는 스스로의 머리를 자른다. 숲에서 수행자의 의복을 입고 사냥을 하는 사냥꾼에게 금의를 건네주고 수행자의 옷을 바꿔입은 싯다르타는 강가에서 수행자를 만나 알라라칼라마구루를 찾아 나선다. 첫 탁발에 나선 싯다르타는 겸허히 자신을 낮춘다. 탁발과정에서 자신을 태자로 알아보는 이들을 만난 싯다르타는 이제 자신은 수행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구루는 단지 청하는 사람이 제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만 본다네…. 자네는 지혜에 목말라있네, 이렇게 심한 갈증은 아직 본바 없네.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불굴의 의지가 있기 때문이네”

싯다르타가 이틀만에 알라라칼라마구루의 제자가 된 뒤 그 제자들 사이에서는 반발의 목소리가 나왔다. 베다 등을 외우며 인고의 세월을 거쳐 제자가 된 이들이었다. 이에 알라라칼라마 구루는 이렇게 말한다.
“참지식은 바닷물에 녹아든 소금과 같아야 한다. 그때 소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 내가 이 물그릇에 모래를 넣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모래 알갱이들은 욕망 분노 자존심 탐욕을 상징합니다. 마음이 이 네가지를 극복할 때 청정한 물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싯다르타는 나무 아래서 계속 정진한다. 배고픔과 병고의 고통, 죽음의 공포 앞에서 싯다르타는 계속 번민한다.

알라라칼라마를 만난 싯다르타가 제자가 되길 원하다.
구루, 마음이 자꾸 아픕니다. 저는 삶의 평화를 얻을 수 없을까요?”
“저기 물에 던진 돌은 물 위에 잠시 튀어 오르지만 곧 물에 가라앉는다네. 저 구름도 생각과 같다네. 다양한 생각으로 떠다니지만 하늘은 그대로라네. 명상을 하면 다양한 생각이 떠오르지만 들어오고 나오는 호흡에 집중하면 완전히 빈 상태가 올것이네. 그 상태에서는 구름조차 없는 저런 하늘 처럼 된다네.”

싯다르타는 계속해서 명상에 빠진다. 다른 제자들의 시기와 질투는 높아만 갔다.
“탁발 나갈 시간이 되면 명상에 빠진 저를 깨워주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싯다르타는 계속해서 명상에 들어간다. 이틀간의 밤낮의 깊은 명상 후 싯다르타는 깨어난다. 싯다르타는 시간이 새의 깃털과 같이 가벼움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에 알라마카라마 구루는 이렇게 말했다. “이 단계까지 나는 70년이 걸렸는데 너는 단지 2달만이 걸렸구나. 참으로 대견하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한다.

“명상에 든 순간에는 가벼웠지만 나오는 순간 다시금 고통에 사로잡힙니다. 고통과 슬픔과 불안으로 가득해져 다시 괴로웠습니다. 이 고통을 없앨 길을 알려주십시오.”

알라마카라마 구루는 내가 줄 것은 더 이상 없다며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고 수행집단을 이끌어 줄 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길을 떠나고자하고 구루는 이를 축원한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을 탁발 중에 만나도 수행하는 싯다르타
“저기 세기의 인물이 가고 있네,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 사람들은 알게 될 것일세”

싯다르타는 마가다국의 우타카르마부타를 찾아 나서고 이 과정에서 마가다국의 희생제를 보게 된다. 싯다르타는 동물을 죽이는 것을 막고, 이는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의 귀에 까지 들어간다.

빔비사라왕은 싯다르타를 찾아 나서고 만난 자리에서 싯다르타는 빔비사라 왕에게 이 같이 말한다.
“수많은 왕국이 일어났다 쓰러지고, 소멸은 삶의 궁극적 진리요. 종교의 이름으로 죄를 지으려 한다면 분명히 반대할 것이요.”

잘못을 깨달은 빔비사라왕이 나중에 가르침을 주길 청하다.
빔비사라 왕은 수도자가 싯다르타임을 알아보고 자신이 큰 죄를 지었음을 참회한다. 빔비사라왕은 그날로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희생제를 중단한다. 빔비사라는 싯다르타에게 함께 가길 원하지만 싯다르타는 많은 인간과 동물들이 그 깨달음을 원한다며 거절한다. 이후 마가다국에서 고행자를 만난다. 이들은 옷을 버리고 음식을 버린 이들이었다. 싯다르타는 고행자들에게 고통 속에서 어떻게 행복을 얻는지를 질문한다.

“자유를 위한 고난, 먼 곳의 천국에 가려는 구원을 위해 이렇게 하지만 다른 많은 이들은 고통에 있습니다. 천국에는 왜 나만 가야 하나,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갈 수는 없습니까.”

고행자들은 오히려 싯다르타에게 “우리들의 안내자가 되어 달라”고 축원한다. 


위대한 깨달음의 길이 시작되다

리뷰 - 법현 스님

우리가 존경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고 나서 중생들을 제도하는 부처님의 모습이다. 드라마 붓다의 시청자들도 어서 그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청년 싯다르타가 고뇌 어린 삶의 체험과 민초들의 험난한 인생을 목도하고 어느 한 사람이나, 신분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게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생명의 근본고통이라는 것을 느낀다. 따라서 드라마붓다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는 시점에 와 있어서 일반인들은 신기로울 것이고 불교인들은 재미있다 못해 자못 흥분해서 떨리는 마음이기까지 하다.

재가자들을 제외한 출가 수행자는 기본적으로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을 나와서 산다. 가정을 떠나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출가라고 한다. 그런데 비구(니:bikkhu,bikkhhuni)를 설명하는 표현들이 꽤 여러 가지가 있다. ‘집 있는 곳에서 집을 나와 집 없는 곳으로 떠난 이’라는 말이 있다. ‘얻어먹는 이(乞士)’라는 말도 있다. 생산 활동을 하지 않고 아침마다 탁발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뜻이 있다. ‘윤회(samsara)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이’라는 말도 있다. ‘윤회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므로 열심히 수행정진해서 결국에는 윤회를 떠나고 윤회를 끝내는 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그것이 비구라는 말이 가진 가장 뜻 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흔히 출가하는 것이 ‘가출’이 아니라 윤회를 끝내는 모범을 보여서 다른 이들도 윤회를 벗어나게 한다는 뜻에서 ‘위대한 포기’, ‘위대한 출가’라고 하기도 한다. 출가 전 그의 인품에 반해 친구가 되기로 약속한 빔비사라왕은 드라마붓다에서 독백하며 눈물을 흘린다.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가난할 수 없이 매우 가난하다.” 그런 것이다. 출가는 바로 그런 것이다. 다만, 치열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이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출가하고서도 권력과 명예를 위해 노력하거나 재산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이들, 그런 이들에게 가까워지려는 이들은 오히려 출가하지 않고 공덕을 쌓는 재가자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가하는 이는 위대한 척 걸음을 걷지만 그(그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부모, 자식이나 부부 또는 애인인 경우에는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기 일쑤이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출가를 막고 위대한 국왕이 되게 하고픈 싯다르타의 아버지 숫도다나왕이나, 어어니 마하파지파티왕비 그보다 더 마음 아팠을 태자비 야소다라, 멋도 모르고 고아가 되어버린 라훌라 등의 마음의 움직임이 경전에도 나오고 드라마붓다에는 정말 실감나게 묘사된다. 세계 어느 종교에서도 여성이 그 종교의 지도자가 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불교에서 부처님이 여성들의 출가를 허용한 것은 세계종교사에 획기적인 사건이다. 물론, 시자 아난다가 세 번이나 어기지 못할 질문을 부처님께 해대자 마지못한 듯 허락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학적으로 본다면 당시의 출가자들이 청년이나 독신만 이었던 것이 아니라 유소년, 청년 ,장년, 노년까지 있었기에 당연히 혼인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니 남편이 출가해버려서 갑자기 홀로된 여인들이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이 생겨나고 그들의 생계와 안전은 사회를 어지럽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회문제도 해결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계발해서 붓다(아라한)이 되게 하고자 여성의 출가를 허용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숫따 니빠따의 ‘어느 장작이나 불을 붙는다’는 말씀은 성의 차별 없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아름다운 가르침이다.

그런데 성인이 아니라 유소년소녀라면 그들의 부모마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도 문제였다. 아들 싯다르타의 출가를 온갖 방법으로 막으려 했지만 막지 못했던 아버지 숫도다나의 아픔은 거꾸로 천붕지통(天崩之痛)이었다. 게다가 친족들을 구하러 온 붓다가 자신을 대신해 왕위를 이어야 하는 다른 아들 난다뿐만 아니라 손자 라훌라마저도 출가하게 되자 그것을 기억한 숫도다나는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 아들에게 간청한다. 미성년자는 부모의 허락을 받은 뒤에나 출가하게 해달라고. 이것은 받아들여져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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