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호남 佛·儒 교류 다리를 놓다

강진 유배시절 예학 등 학문 매진
대흥사·백련사 학승들과 교우 돈독
이암 혜장, 다산을 스승으로 모셔
불서에도 해박… 당시 巫風 비판도

다산 정약용이 유배 시절 머물던 다산초당
1801년에 다산은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첫 유배지 장기에서 한양으로 압송, 모진 핍박에 시달렸지만 이렇다 할 협의를 찾지 못하자 다시 강진으로 이배(移配)된다. 이런 배려는 수렴청정하던 정순황후의 작은 배려 덕분이었다.

막상 강진에 도착해 보니 다산 자신이 처한 현실이 생각했던 것보다 열악하고 어려웠던 듯하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은 그의 〈상예사전서(喪禮四箋序)〉에 자세한데 이는 “그곳 백성들은 유배 온 사람 보기를 마치 큰 해독처럼 여겨 가는 곳마다 모두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면서 달아나 버렸다”라고 하였다. 백성들조차 마주하기를 꺼려했던 죄인, 다산에게 “한 노파가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자기 집에서 살도록 해 주었다”라고 하였다.

겨우 거처를 정했지만 다산의 처지는 “창문을 닫아걸고 밤낮으로 혼자 있게 되었다. 누구와도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당시의 그의 사정은 ‘객중서회(客中書懷)’에 자세하다.

북풍에 흰 눈처럼 불어 날리어(北風吹我如飛雪)
남으로 강진 땅 주막집에 이르렀네(南康津賣飯家)
산이 바다를 가려주니 다행이고(幸有殘山遮海色)
대나무, 꽃으로 삼을 수 있어 좋구나 (好將叢竹作年華)
풍토병이 있는 땅이지만 오히려 겨울에는 줄어들고 (衣緣地?冬還減)
근심이 많은 밤, 술을 더욱더 마시네 (酒爲愁多夜更加)
나그네 수심을 그나마 녹이는 건(一事?能消客慮)
납일 전에 피는 붉게 동백꽃이라(山茶已吐臘前花)

다산은 바람에 날리는 흰 눈 같은 존재일 뿐이다. 바람이 부는 대로 표류하는 존재, 그렇게 강진 땅에 이른 것이지만 자신의 뜻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인(大人)의 마음가짐은 소인배와 다른 법이다. 현실을 인식하고 풀어나가는 다산의 태도는 달랐던 셈이다. 바로 찬바람을 막아주는 산이 있고 우거진 대나무가 있었기에 좋다는 그의 배포는 본받을 만한 선비의 여유이며 결기이다.

습한 곳에 흔한 풍토병도 기세가 꺾이는 겨울이었기에 긴 밤을 망우주(忘憂酒)로 달랬던 그는 겨울이라 풍토병이 기승을 부리지 않다는 사실에 안심이 된 듯하다. 더구나 그의 수심을 녹여주는 납일 전에 피는 붉은 동백꽃이 있음에랴.

아무튼 지방관의 횡포가 도를 넘었던 시절, 황칠(黃漆)을 공납하던 백성들의 고초를 직접 목도한 그는 ‘황칠(黃漆)’에는 고초에 시달리는 백성의 아픔을 이렇게 드러냈다.

〈중략〉
공납으로 해마다 공장(工匠)에게 통보되는데
(貢苞年年輸匠作)
징수하는 아전의 농간을 막을 길이 없어
(胥吏徵求奸莫防)
토민들은 이 나무를 나쁜 나무라 지칭하여
(土人指樹爲惡木)
밤마다 도끼 들고 몰래 와서 베어내네
(每夜村斧潛來?) 
〈중략〉

황칠나무를 나쁜 나무라 부르는 백성의 뜻이나 밤마다 몰래 황칠나무를 베어 죽여야했던 백성의 고통은 문정의 혼란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다산은 이용후생에 관심이 높았다. 그가 농기구 개량이나 농사법에도 깊이 연구했던 사실은 그의 〈탐진논가(耽津農歌)〉에서 “남쪽에선 아이들도 한 손에 짧은 가래라(南童隻手持短)/ 논 갈고 멀리서 물대기 수월히 하네(容易治畦引灌遙)”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다산초당에 다산 정약용이 새긴 글씨. ‘정석(丁石)’이라 쓰여 있다. 특별한 뜻은 없으나 아마도 자신의 돌임을 표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뿐 아니라 강진으로 유배된 후, 가장 먼저 예학의 연구에 매진했다. 이는 〈상례사전(喪禮四箋)〉과 〈상례외편(喪禮外編)〉의 편찬에서도 드러난다. 예학의 중요성은 ‘상례사전서(喪禮四箋序)’에 “예란 천지의 정이니 하늘에 근본을 두고 땅을 본받아 예가 그 사이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예는 천지의 정이므로 성인이 이것을(예) 꾸미고 다듬었을 따름이다(禮者 天地之情 本於天 ?於地 而禮行於其間 禮者 天地之情 聖人特於是爲之節文焉已)”라고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송재소 선생은 다산이 유배 초기에 상예(喪禮)와 제례(祭禮)의 연구에 천착한 것은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혐의를 벗기 위해 예학에 관심을 두었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가 있다. 따라서 다산은 유배의 어려움 속에서도 수신과 탁마에 열중하였으며 강학을 통해 몽학(蒙學)의 새로운 인연사를 펼쳤기에 그에게 강진 시절은 명성과 정치적 추락을 함께 경험한 시기이라 하겠다.

후일 자신의 의지를 담아 “생각이 맑아야하고(思宜澹), 외모는 장엄해야 하며(貌宜莊), 말을 적게 하며(言宜認), 행동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動宜重)”라고 불렀던 사의재(四宜齋)는 어떤 상황에서도 선비의 도리를 잊으려는 다산의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다산은 무료함과 답답함을 달랠 수 있었던 힘은 저술과 몽학이었다.
사의재 시절, 다산은 황상과 황경 형제뿐 아니라 황지초, 이청, 김재정 등과 같은 평민과 중인의 자제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다. 특히 황상은 다산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종신(終身)토록 사제의 인연을 이어갔던 인물이다. 이들의 인연은 후손까지 이어졌으니 이는 1845년에 맺은 정황계(丁黃契)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뿐 아니라 유산은 황상에게 추사와 그의 형제들, 권돈인과 허련 등을 소개하여 그의 교유 폭을 넓히게 하였으니 이는 1849년경의 일이다.

그는 이들을 통해 초의의 높은 수행력뿐 아니라 차에 대한 안목을 들었을 터이다. 더구나 시에 밝았던 그였기에 초의가 시로서 경향에 알려진 내력 또한 알았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가 지은 ‘초의행’에는 40년 만에 만난 초의의 모습을 “기유(1849)년에 열수에서 돌아와 초의가 계신 대둔사 초암으로 찾아갔는데 머리가 하얗고 주름이 깊어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의 목소리와 모습을 보고 과연 초의인가 하는 의심이 없어졌다(今年己酉 自冽水還訪 草衣於大芚之草庵 雪髮皺皮 乃無始來 未覩之人也 聽其言跡其行 果草衣無疑也)”라고 하였다.

이후 이들의 교유는 더욱 공고했으며 “추사 선생이 보낸 수묵 ‘죽로, 명선(?見秋史先生所贈水墨竹爐茗禪之畵)’을 빌려다 보았다고 하니 이들은 처음 만난 것은 1809년 다산초당이었다. 당시 초의는 운흥사에서 대흥사로 거처를 옮긴 후, 다산초당으로 다산을 찾아 간 해이니 여기에서 처음 만난 셈이다. 이미 아암을 통해 다산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초의가 다산초당을 찾아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초의와 다산을 연결한 아암 혜장은 어떻게 다산과 교유했던 것일까. 그 연유를 살펴보면 다산이 아암혜장(1772~1811)을 만난 것은 1805년 봄이었다. 이들의 만남은 서로에게 빛이 되는 인연이었다. 당시 아암은 대흥사의 이름난 학승이었고 주역에 밝았으며 시에도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시와 주역에 밝았으므로 이에 대한 자신감도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1805년경에 백련사에서 머물던 아암은 다산의 높은 학예의 경지를 흠모하고 교유하기를 갈망했다. 이러한 사실은 다산의 ‘아암장공탑명(兒菴藏公塔銘)’에 “내가 강진으로 귀양 가 5년째 되는 해 봄에 아암이 백련사에 와서 지냈는데 몹시 나를 만나보고자 하였다(余謫康津 越五年春 兒菴來栖于白蓮社 渴欲見余)”라고 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사제 관계를 맺은 이암 혜장과 만나 교류했던 강진 백련사. 다산은 유배 시절 자신의 학문 세계를 완성해 갔으며, 불교와도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들의 첫 대면은 극적이었다. 1805년경에 다산은 백련사를 찾아가 한나절 가량이나 아암과 이야기를 나눴지만 끝내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다산이 돌아간 후 자신과 담소하던 인물이 다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아암은 종종걸음으로 다산을 쫒아가 “공은 정대부 선생이 아닙니까. 저는 밤낮으로 공을 뵙고자했는데 공께서 차마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렇게 만난 이들은 하루 밤 사이에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었다. 〈주역〉에 대해 누구보다 밝은 식견을 지녔다고 자부했던 아암의 승복은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하루 밤 사이에 다산의 넓고 깊은 학문의 세계에 탄복한 아암은 “우물 안 개구리와 초파리는 실로 스스로 슬기로운 체할 수가 없구나”라고 하였다.

이후 다산과 아암은 서로에게 이로운 인연을 엮어나갔는데 이는 다산에게는 자신의 뜻을 피력할 제자들을 얻은 것이며 아암은 다산의 높은 학문의 향훈(香熏)을 누린 연유였다. 실제 다산의 사의재 시절에 든든한 후원자는 아암과 그의 문도들이었다. 고성암 보은산방에 거처를 마련하여 스승을 편하게 묵게 한 배려는 아암이 스승에게 보인 존경의 표현이었을 것이며, 자신이 만든 차를 보내 풍토병에 시달리는 다산의 심신을 위로했던 것은 다산에게는 행운이었다. 실로 다산이 차의 깊은 삼매를 이해한 것이나 차를 실용화하는 방책을 낼 수 있었던 동인(動因)은 바로 아암이었다. 아울러 다산과 전등계 제자들의 끈끈한 학연도 아암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아암과 다산이 만든 유불의 학연은 백련사와 대흥사에 학문의 심연을 깊게 판 일이었던 것이다.

다산은 불서(佛書)에도 해박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초의에게 보낸 글에서 “불서를 보니 여러 가지 화두는 사람에게 의심을 일어나게 만든다. 그 구경(究竟)의 법이란 모두 적멸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어찌 심신에 보탬이 있겠는가”라고 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다산은 불가에서 화두의 궁극이 적멸로 들어갈 뿐 자신을 닦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피력하였다.

이뿐 아니라 신헌의 〈금당기주〉에 실려 있는 다산이 초의에게 준 증언에서 “법신이란 유가에서 대체라 하고 색신은 유가에서는 소체라고 한다. 도심을 불가에서는 진여라 하고 인심은 불가에서 무명이라 한다. 덕성을 높이는 것을 너희는 정이라 하고 도를 묻고 배우는 것을 너희는 혜라고 한다. 피차가 서로 합당하지만 (유가와 불가의 견해를)서로 섞어 쓰지는 못한다. 다만 불가에서 요즘 무풍이 크게 일어나니 이는 잘못된 것이라 할만하다(法身者 吾家所謂大體也 色身者 吾家所謂小體也 道心汝家所謂眞如也 人心汝家謂之無明 尊德性汝以爲定 道問學汝以謂慧 彼此相當 互不相用 但汝家近日巫風太張 是可惡也)”라고 하였다. 따라서 다산은 불가의 교리에도 정연한 논리로 그 미흡함을 지적하였다. 한편 조선 후기 불가에서 만연된 무속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지적한 대목이 눈에 띤다.

다산은 초의뿐 아니라 학문적 소양이 있는 승려들에게 학문의 방법이나 시학뿐 아니라 역사를 편찬하는 방법에도 영향을 미쳤으니 유불의 학문적 교유는 이처럼 은덕이 깊고 넓었다. 그가 해배되어 돌아간 후에도 해남, 강진 등에 포진된 그의 제자들에 의해 유불간의 교유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가 뿌린 인연의 씨앗은 넓은 그늘을 이룬 조선 후기 유불교유의 풍성했던 인맥을 형성하게 만든 실질적인 토대였던 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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