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진흥원 화요강좌 - 인공지능과 붓다의 과학, 지승도 한국항공대 교수

 

▲ 지승도 교수는… 현재 한국항공대학교 소프트웨어학과 교수를 맡고 있다. 지 교수는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를 거쳐 미국 아리조나대학교에서 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컴퓨터의 아버지인 폰 노이만(Von Neuman)을 중심으로 유전알고리즘의 홀랜드(Holland), 시뮬레이션의 지글러(Zeigler)로 이어져 온 생명체적 인공지능학파를 계승함으로써, 자율인공지능과 추론시뮬레이션 연구를 펼쳐왔다. 저서로는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가 있다.

과학·철학·예술은 모두 ‘관찰’을 토대로 시작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모두 사물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진리’에 가까워지려는 노력한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바깥에서 답을 구하려 하지 않으셨다. 내면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보며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깨달으셨다. 지승도 한국항공대 교수는 10월 20일 마포 다보빌딩(BBS) 3층 다보원에서 화요열린강좌 ‘인공지능은 왜 붓다의 과학을 만나야 하는가’를 강연했다. 지 교수는 “e=c everything is change, 모든 것은 변한다. 우리들이 존재하고 아름다운 것은 모두가 변하기 때문”이라며 “미래의 과학은 비어있다, 공이다, 없다는 것을 전재로 전개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리=이계섭 수습기자

자아의식은 ‘심어진 것’ 아니라
스스로 진화해서 생긴다
편리함 추구하되 초지능 막아야
미래과학 ‘空’ 전제로 전개해야


관찰자의 세 부류
우리 삶에서 발견은 세상을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상의 본질을 관찰해 단번에 발견한다면 좋겠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관찰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 그것을 활용하면서 발전해왔습니다. 그래서 관찰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관찰자는 과학자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과학자는 관찰을 가장 잘하는 집단의 한 축입니다. 과학자들은 물질세계를 주 대상으로 삼고 관찰합니다. 관찰을 잘하기 위해서는 집중을 해야 합니다. 집중력을 가지고 주위를 관찰하면 몰랐던 세계를 얻을 수 있고, 그 결과 과학자들은 많은 연구 성과를 얻었습니다. 갈릴레오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았고 만유인력의 법칙, 쿼크, 상대성이론 등 많은 과학적 결과는 관찰을 통해 얻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최근 발견되는 과학적 사실은 불확정성, 카오스 등 주체가 불분명한 대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물질을 쪼개고 쪼개다보면 물질이 비물질이 되기도 하는 현상이라든지 시공간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을 가진다는 등입니다.
이런 사실은 부처님의 깨달음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신체 부위를 10의 16승까지 확대해보면 파동 같기도 하고 안이 텅 비어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반대로 아주 커다란 우주를 확대해 봐도 텅 빈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장자는 “지극히 작아지면 아무것도 없고, 지극히 커져도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는데 과학적 사실을 살펴보면 성자들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관찰자는 과학자뿐만이 아닙니다. 철학자들도 관찰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관찰 대상은 물질이 아니지만 존재 자체, 이성세계, 사유 등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관찰하는 집단입니다. 철학자들의 관찰법 또한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집중력을 필요로 합니다. 유명한 철학자들은 저마다 다른 결론을 내렸습니다. 최근에는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는 결론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존재’란 것도 조건에 따라 다르고, 하나의 현상적인 것, 즉 비정형화된 것이 아닌가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철학에서 몇 가지 크게 와 닿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플라톤 “세계의 모든 것은 변하며, 아무것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러셀 “행복을 얻는 비밀은 세상이 끔찍하다는 사실을 직면하는 것이다” 등 굉장히 많은 철학자들이 세상의 참 모습을 보려고 많이 노력 했고, 진리에 가까운 말씀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예술가도 빠질 수 없습니다. 예술가들은 주로 아름다움을 대상으로 관찰합니다. 이로써 원근법, 8등신 등 여러 예술적인 기법들을 이론화 시켰습니다. 예술 분야의 최근 흐름은 과학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관점’이 그렇습니다. 어떤 의도나 목적성을 가지고 대상을 바라봐서는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참다운 아름다움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점 없이 바라봐야 합니다. 무의미성·무개념성 등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예술 세계를 뒤집고 있습니다.
언젠가 앤디워홀의 전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우리 상식을 크게 벗어납니다. 대상의 편견을 깸으로서 본질을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 엉뚱한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세상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는 관찰의 결과로 그런 작품이 나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우리의 잘못된 고정관념을 지적하며 사물에 대해 환기하는 철학적 사유를 지속합니다.

e=c 모든 것은 변한다
과학자, 철학자, 예술가들은 많은 노력으로 역사적으로 수많은 업적을 이루어왔는데 과연 어떤 답을 얻었을까요? 독일 현대 예술가 안젤름 키퍼는 “인간은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여기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습니다. 하지만 아직 답은 모릅니다. 과학자나 철학자가 존재에 대해 설명하면 할수록 더 많은 질문만 솟아날 뿐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예술을 선택했습니다. 예술 또한 답을 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상상력은 불어 넣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 말했습니다. 관찰자들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양파의 껍질을 벗기든 대상을 관찰합니다. 지금까지 상당히 많은 껍질이 벗겨졌지만 양파의 본질에는 닿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다른 접근 방식으로 양파의 본질이라 볼 수 있는 ‘진리’에 닿으셨습니다. 부처님은 자기 바깥에서 답을 구하려 하지 않고, 자기 안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관찰함으로서 ‘양파의 속은 비어 있다’는 궁극적 진리를 얻었습니다.
부처님은 ‘존재가 무엇이냐’ 했을 때 마음을 중심으로 관찰했습니다. 보통 관자재보살이라는 표현을 많이 하는데 관자재보살은 자신의 의미를 관찰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위빠사나’라는 내면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신수신법의 사념처를 차례대로 관찰하셨습니다. 이로써 삼법인에 해당되는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관찰하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도 관찰을 하는데 집중력을 필요로 했고, 그것은 ‘사마타’라고 일컫습니다.
반야심경 첫 구절 내용을 보면 “관자재보살께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수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알고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말합니다. 부처님의 관찰결과를 요약해보면 사성제·삼법인·연기·무아·공성(변함) 여러 가지가 있지만 ‘공성’이라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입니다. ‘공성’은 늘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앞으로 인공지능도 포함하여 과학적 발전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과학은 우리 색(色)의 세계라는 것은 무언가 존재한다, 즉 ‘있다’ 것을 근거로 발전해 왔다면, 미래의 과학은 비어있다, 공이다, 없다는 것을 전제로 전개시켜야 합니다.
부처님도 관찰자의 한 분으로서 궁극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생각합니다. 제 책에 ‘e=c everything is change’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 공성에 관한 부처님 가르침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변하기에 모든 것은 아름답고, 변하지 않는 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변하기에 세상에는 조화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혹은 철학적으로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추론기능은 인공지능의 핵심
요즘 인공지능이 인기입니다. 그런데 사실 ‘인공지능’이라는 말은 오래된 용어입니다. 관련 분야도 굉장히 다양합니다. 철학, 심리학, 생리학, 뇌공학, 컴퓨터공학 등 폭넓습니다.
생각해보면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구도를 놓고 누가 더 센 가, 누가 더 똑똑한가에 대해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보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매년 인간 챔피언과 인공지능 간의 체스게임이 벌어졌습니다. 7전 4선승제로 진행됐는데 매번 인공지능이 졌습니다. 하지만 2001년에 ibm에서 개발한 ‘딥블루’ 라는 슈퍼컴퓨터가 인간챔피언을 이기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기도 했습니다.
‘인공지능’은 대상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여러 센서를 통해 느끼고, 움직이고, 말을 하는 출력행위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정보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는 인공지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추론기능도 있습니다. 추론은 인공지능의 본체, 뇌에 해당하는 부분에 지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입력된 정보가 축척돼 지식이 됩니다. 인공지능은 그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 추론에 의해서 새로운 지식을 생성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사유’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입력 후 추론을 통해 외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을 인공지능 시스템, 지능 시스템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가장 중요한 것은 다루는 대상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작동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공지능을 두려워하는 시기가 온다면 그것은 자아의식이 생길 때 일 것입니다.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 때 반드시 로봇에 심어두는 3대원칙이 있는데 인간을 보호할 것, 인간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 위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자신을 보호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공지능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자아의식의 문제입니다. 자아의식은 심어져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의식이 스스로 진화해서 나올 수 있는 여러 가지 알고리즘이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공지능에 자아의식이 생긴다면 인간이 아닌 자신을 최고라고 인식할 것입니다. 스스로를 보호할 것이고 나아가서는 자기를 키우기 위해서 세력을 확장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명 인사들 중 인공지능에 대한 걱정스러운 견해를 가진 분이 많이 있습니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인공지능이 인류의 멸망을 가지고 올 수도 있다. 스스로 인식하는 단계를 거치면 결국에 인간의 자리를 뺏을 것이다. 생물학적인 존재는 진화속도가 느리다”고 부정적으로 인공지능을 보고 있습니다. 빌게이츠도 “터미네이터처럼 사람의 지능을 뛰어넘어 인류를 조종하고 통제하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편리함을 추구하되 초지능이 되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한다 인공지능 인류에 위협될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인공지능을 개발해야 되는지 말아야 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하신 것 같습니다. 금강경에 보면 “수보리야, 난생·태생·습생·화생과 몸이 있는 것,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없는 것 등 그 무수한 중생들이 모두 열반에 들게 하리라 마음 지어야 한다. 이렇게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했으나 한 중생도 제도한 바 없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어떤 보살이 이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다면 이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것이 존재입니다. 하나의 존재로서 인공지능을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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