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최주현

자동차를 너라고 하지 말고 자동차 속의 운전수를 너라고 해라.

믿어서 너를 발견한다면 운전수와 자동차가 콤비가 돼서

항상 같이할 수 있어서 살기가 유유하느니라.

토론토 여러분과 함께 한자리를 하게 된 것을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한자리를 해서 우리가 어떠한 삶의 발전을 해야 옳을는지는 여러분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불교라는 단어는 어느 한군데 국한돼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불은 일체 만물만생의 근본을 불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근본. 또 우리가 태어나서 생활을 하는 이 자체가 바로 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배우고 느끼고 물리가 트이고 지혜롭게 나가는 그 발전력은 바로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진행되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 생활 속이 바로 교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달리 생각하시고 우리가 종교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게 종교가 아닙니다. 불교라는 이 자체는 진리인 것이지, 한군데 국한돼 있는 종교라고 부를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처참하게 공기주머니 안에서 한 발짝도 떼 놓지 못한 채 이렇게 살고 있나를 말입니다. 그거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개미의 삶이나 어떠한 짐승의 삶이나 우리의 삶이 뭐 다른 게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의 공기주머니 가운데서 그 공기주머니가 어디로 돌아가는지도 모르면서 그 안에서 복닥거리면서 서로 투쟁하고 쟁취하고 서로 헐뜯고 네 종교가 옳으니 내 종교가 옳으니 그러고 싸우고 삽니다. 생각을 깊이 해 본다면 너무나 처참하고 너무나 어리석고 너무나 미개하고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인생살이는 한 철입니다. 이 모습을 가지고는, 인생에 한 철밖에는 이 모습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한 철을 사는 동안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또 그 다음 생의 옷이 주어집니다. 모습이 말입니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차원이 주어지고 모습이 주어지고 즉, 자기의 용도가 주어집니다. 생각하면 우리가 모두 나 아님이 없어서 싸울 필요가 없겠지마는 우리는 미생물에서부터 수차에 걸쳐서 수억 광년을 거치면서 진화되고 또 형성되고 진화되고 형성되고 해서 고등 동물에 이르기까지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생물에서부터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형제가 되고, 이렇게 하기를 헤아릴 수 없이 해 나왔겠죠. 그런데 지금도, 사람까지 올라와서도 내 부모 아니고는 남의 부모라고 생각을 하는데, 벌레로부터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고 형제가 있었으니 지금까지 우리가 진화돼서 형성돼 올라온 자체를 볼 때,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고 내 몸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모두가 그러한 고로 우리는 적대적인 마음을 갖지 말고 항상 한마음으로서 살아야 된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대 성인들이 말씀하시기를 ‘못났든 잘났든 너부터 발견하라. 너부터 알아라. 참너부터 믿어라. 예를 들어서 방편으로 말한다면 자동차를 너라고 하지 말고 자동차 속의 운전수를 너라고 해라. 믿어서 너를 발견한다면 운전수와 자동차가 콤비가 돼서 항상 같이할 수 있어서 살기가 유유하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 살아나가는 것을 가만히 볼 때에 당장 내 부모만 아니면…, 내 부모도 싫다고 하는 세대 아닙니까? 내 부모를 싫다고 할 때 내 자식은 나를 또 어떻게 생각할까, 한 번쯤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부처님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이 즉 부처님 법입니다. 우리의 생활 없이 부처님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다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노라.’ 하셨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고등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다 살아나가는 데 정신계 50%, 물질계 50%를 겸해서 정맥 동맥이 같이 돌아가듯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사십니까? 50%의 물질로서만이 위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올라가다 보니까 막히고 걸리고…, 다시는 내 마음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살 수가 없는 그런 환경이 돼 버리고 말죠. 극한 일이 앞에 닥쳤을 때 어떻게 대치를 하시렵니까? 여러분은 모두 항상 자동차를 자기라고 해요. 즉 말하자면 나무로 치면 뿌리를 자기라고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싹을 자기라고 하거든요. 자기가 다라고 그래요. 싹은 뿌리에서부터 에너지를 흡수해서 올려 보내야만 싹이 푸르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꽃도 피고 열매도 무르익어서 남을 주기도 하고 내가 먹기도 하고, 세세생생에 그게 끊임없이 아마 베풀어질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마음이 넉넉해야 넉넉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작으면 작은 대로 작은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천차만별의 차원이 있겠지마는 천차만별의 색상도 많이 있느니라. 그러나 그것이 하나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 우주가 하나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다 보니까 말을 안 해서는 안 되겠군요. 여러분의 마음의 근본은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만물하고도, 우리의 마음하고도 가설이 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자기와 자기가, 즉 말하자면 참자기는 부(父)라고 하고 이 몸은 자(子)라고 합니다. 부와 자가 통하면 일체 만물하고도 통합니다.

이 모두가 삶에서 극복하는 문제도 여러 가지가지겠지만 이 도리를 알면, 그리고 모르더라도 내 주인공 내 주장자를 쥐고 나가면 그렇게 내 마음부터 편안해집니다. 내 가정이 편안하고 내 식구가 편안하고, 위로는 조상, 아래로는 자녀들이…. 도라는 것은 실천이 아니면 도가 아닙니다. 이론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다 자격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고 패기가 있고, 모든 능력이 있는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격과 능력은 아주 문을 닫아 버리고 남의 거를 바라고 이름을 찾는가 하면 형상을 찾고 믿고, 지금 상세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거를 믿어야 되겠습니까? 바깥의 형상을 믿어서 될 일도 아니고, 지금 이 자리에 부처님이 있고 사대 성인들이 있고, 여러 종교의 성인들이 있다고 합시다. 부처가 이 자리에 있어도 나를 배부르게 할 수 없어요. 똑바로 아셔야 됩니다. 내가 죽을 때 대신 죽어 줄 수 없고 대신 아파 줄 수 없고 대신 똥 눠 줄 수 없고, 대신 먹어 줄 수 없고 대신 잠자 줄 수 없고 대신 깨달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셔야 됩니다.

그 도리를 완전히 터득하신다면 여러분은 다 남을 위해서 이끌어 줄 수 있는 구원자가 될 것입니다. “대신해 줄 수 없다면서 왜 그러십니까?” 이렇게 말하겠죠. 어떤 사람이 하혈을 해서 죽게 됐는데 병원에 가니까 도무지 그치질 않더랍니다. 그래서 전화가 왔어요, 그것도 미국에서 한국으로요. 그래서 그랬습니다. “관하라. 알았다.”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기 전에 벌써 멈췄더랍니다. 그래서 한번 찾아와서 머리를 깎아서 신을 삼아 드려도 이 신세를 못 갚겠다고 하더군요. 애 다섯을 두고 내가 죽었더라면 어떡할 뻔 했느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했죠.“이것 봐. 나만이 당신을 위해서 해 준 게 아니야. 너의 전깃줄과 내 전깃줄이 한데 붙어 있기 때문에 불이 들어왔을 뿐이야. 이 도리를 알아야 해. 못났든 잘났든 내가 없어도 아니 되고 상대방이 없어도 안 되는 것을 말해서 상대성 원리라고 해. 그러나 우리의 참다운 참은 누가 해 줬다, 고맙다 이러기보다도 고마우면 자기 주인공한테 고맙다고 해라 이거야. 자기를 리드해 나가고 자기를 운전하는 자기를, 보게 하고 듣게 하고 말하게 하고 만나게 하고 이렇게 하는 자기의 원동력을, 자기 몸뚱이를 이끌어 가는 자기 주인을 진짜로 감사하게 생각하라.” 하고요. 그게 아니었더라면 나를 만날 수도 없고 종교라는 것도 없고 세상도 없어요. 내가 없는데 뭐가 있어요?

여러분이, 못났든 잘났든 여러분만이 귀중한 겁니다. 나부터 귀중한 걸 알고, 나부터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나부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면, 아마 자기는 영원한 자유인으로 벗어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죠. “불교는 참 알기가 어려워.” 이러는데 그게 아닙니다. 불교는 진리입니다, 아까 말했듯이. 그래서 불교가 그렇게 진리라면 그냥 우리가 살아나가는 그 생활 자체를 그대로 진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일을 하고 잠을 자고 서서 다니고 또 앉아 있고, 이 네 가지를 포함해서 본다면 그대로 참선입니다.

아까 공기주머니가 만약에 버스라면 어디로 돌아다니는지도 모르고 그 안에서 복닥거리고 산다고 그랬죠. 모두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것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지금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어느 물질도 돌지 않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 볼 땐 정착돼 있는 걸로만 보이죠. 우리가 거꾸로 섰든 바로 섰든 바로 서 있는 것 같죠? 그러니 생각하면 개미의 살림이나 우리의 살림이나 수만, 그 천차만별의 삶이나 뭐가 다릅니까? 좀 차원이 높고 낮고 이것뿐이지.

그래서 똑똑히 나를 보라. 각자 말입니다. 각자 자기를 보라. 자기 몸뚱이 속에 얼마만큼 생명들과 모습들과 의식들이 들어 있나. 내가 밥 한 그릇을 먹고 물 한 컵을 먹을 때 내가 먹는 건가 한 번쯤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몸뚱이도 지구와 같고 우주와 같고 세계와 같은 겁니다, 몸뚱이 하나가. 모든 분야에서 자기 소임을 맡아 가지고 다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용하고 있으면 있는 대로 무엇이 부족하면 부족한 거를 달라고 합니다. 만약에 수분이 부족하면 물을 달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래서 물을 먹는데 그 물을 누가 먹는 것입니까? 그 육신 속의 생명들과 더불어 같이 먹으며 우리는 심부름을 해 주는 바로 심부름꾼이라 이거죠. 그러나 알고 보면 심부름꾼이 따로 없습니다. 안에서도 그거를 줘야 작용을 해 주고 또 바깥에서도 그렇게 심부름을 해 주지 않는다면 안에서 작용을 못해 줍니다. 더불어 같이 사는 한마음입니다.

그러니 내가 따로 없죠.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아버지가 됐거나 어머니가 됐거나 한 가정에서 살아 보실 때 자연스럽게 “엄마!” 하면 엄마가 되시죠? 그런데 남편이 들어와서 “여보!” 하면 금방 자동적으로 그냥 아내가 되시죠? 남녀를 막론해 놓고 그렇죠. 그뿐인가요? “형님!” 하면 형님이 되고 “얘, 아무개야!” 하면 아들이 되고 말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고자 해서 나중에 아들이 되고 남편이 되는 게 아니죠. 그냥 동시에 그냥 해 버리는 거죠. 그러니 사실 생각한다면 우리가 하나하나 해 나가고 살아나가는 게 과학적이며 바로 천체물리학적이기도 하고 천체의학적이기도 하고 천체과학, 이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을 몰라서 그렇죠.

그래서 도라는 것은 남이 목이 마를 때 물을 줄 수 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물을 먹을 수 있어야만 도니라 이겁니다. 진짜 인간으로서, 자유인으로서, 그렇게 벗어나는 대장부라 일컬어지는 사람이라면 그쯤은 돼야 된다는 얘기죠. 우리 자체가, 그래서 불가에서 이런 게 있어요. 심안으로 보는 거, 심안으로 듣는 거, 그것을 천안통 천이통, 남의 마음을 잘 아는 거를 타심통, 또 신족통, 이 몸뚱이가 오고 감이 없이 가고 온다 이거를 말하는 겁니다. 또 숙명통, 내가 어디서 나온 줄을 아는 것이 바로 숙명통입니다. 그런데 그 오신통이라고 하는 것은 이름이 무색하게도 우리의 대뇌 정수의, 즉 말하자면 부속품밖엔 될 수가 없어요. 도가 아니에요.

내가 아까 말했죠. 물을 보기만 하고 “아, 저기 물이 있더라.” 하고 예언을 해도 그 예언자는 소인이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이 물이 있다는 거를 번연히 보고 알면서 남에게 주지 못하고 자기가 먹지 못한다면 그거는 소인의 예언이니라. 그래서 모두가 “예언자는 소인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자기가 실천을 하는 것만이 도다. 내가 물을 봤으면 갖다 주고 갖다 먹을 수 있어야만이 그것이 도니라.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주 만물 과학자죠. 무의 과학자예요. 유의 과학자가 아니에요. 그러나 무 유를 한데 합쳐서 과학자죠. 이렇게 말한다면 선구자라고 해도 되고요, 구원자라고 해도 좋고요. 그런데 이름을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다 하더라도 그거는 손색이 없는 분입니다. 그분만 그런 게 아닙니다. 여러분도 그럴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그러니 그 오신통이 오신통이 아니니라. 그거를 아주 첨단으로 이 우주를 내다본다고 하더라도 그건 도가 아니니라 했단 말입니다. 그 왜냐? 그 오신통이라는 건 부속품으로서 자동적인 정수의 컴퓨터의 부속이다 이겁니다. 이 대뇌 정수에 자동적인 컴퓨터가 있는데, 그 컴퓨터에서 들이고 내는데 입력을 하기 위해서 그 오신통은 부속과 같은 것이니라.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 모두가 입력이 되거든요. 입력이 돼서 차례차례로 현실로 나오는데 그게 어디서 나오는지, 어떻게 돼서 이렇게 닥치는지 모르니까, 뭐라고 말들을 하시죠? “내 운명이 이것밖엔 안 되나. 내 팔자가 왜 이렇담!” 아, 이렇게 말씀들 하시죠? 자기가 모두 벌여 놓은 거, 자기 운명이지, 누가 어떡합니까? 누가 갖다 주기를 했습니까, 누가 뺏어 가기를 합니까? 수억겁 전으로부터, 광년으로부터라고 해야 옳겠죠, 지금 사람들은. 수억 광년을 거치면서 우리가 살아온,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됐던 그 자체가 그냥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관습을 나쁘게 갖지 마라. 남의 말을 듣고 무조건 믿지 마라. 부처님이 여기 계셔도 따르랬지 믿으라곤 안 그랬습니다. 그걸 아셔야 됩니다. “내 고깃덩어리를 믿지 말고 너부터 알아야 내 마음이 네 마음과 둘이 아닌 줄 알게 되느니라.” 이 말 한마디가, 여러분을 위해서 구원을 하느니 뭘 하느니 하는데 참 중대한 일입니다. 물질로서 보시를 아무리 해 봤던들 그건 공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시를 하되 이거를 주면서 꼭 대가를 바라고 하거든요. 이름이 나거나, 나에게 뭐 나중에 더 돌아올 거를 생각하고 모두 주는 거거든요.

그러나 무주상 보시로 하라. 함이 없이 하라. 보시를 함이 없이 하라. 이거는 너와 둘이 아닌 까닭에 한 게 없다 이거야. 그러면 상점에 물건을 사러 가서 물건값에 의해서 그 돈을 치르고 물건을 가져왔다고 생각하신다면 피장파장이지, 누가 보시를 한 겁니까? 누가 좋은 일을 한 겁니까, 도대체? 진짜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길을 지나가다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한 마리를 본다 하더라도 나와, 내 모습과 둘 아니게 볼 수 있는 사람, 내 아픔과 둘 아니게 아픔을 느끼는 사람, 모든 걸 전체를 둘 아니게, 소뿐만이 아니라 일체를 둘 아니게 보는 사람에 한해서만이 무주상 보시로서 공덕이 주어진다는 얘깁니다.

어떤 때는 길을 가다가 싸움이 벌어진 걸 보면, 어떤 사람은 발길로 차면서 말리는 척해요,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요. 말리는 척하면서 돈 얻고요. 그거뿐이 아니죠. 여러 가지가지죠. 또 돈을 좀 달라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구인이 돼서 휠체어를 타고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런 때도 버젓이 그냥 좋은 일 하는 것처럼 아주 남 보는 데 이렇게…, 그 마음이 말입니다, 그렇게 내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대가 쑥스러워 할까 봐 몰래 그냥 넌지시 얼른 놓고 가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쑥스러워 할까 봐 물건을 아주 비싼 값에 다 팔아 주고 가요, 또. 그런데 어떤 사람은 파는 이가 불구인인데도 불구하고 물건을 깎아서 사는 사람이 있죠, 또. 그러니 얼마나 천차만별입니까, 마음들이.

그런 거를 생각할 때, 나무라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모르니까 도둑질도 하고 모르니까 어리석은 짓도 하고 모르니까 나쁜 짓도 하고, 모르니까 그런 거지 마음이 못돼서 그런 게 아닙니다. 모두가 몰라서, 알 때까지는 그렇게 모릅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모두가 죄가 없다고 할 수밖엔 없습니다. 모두가 죄가 없는 겁니다. 죄가 붙을 자리가 없죠. 왜냐? 쉴 사이 없이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 컴퓨터에 입력이 된 대로 거기다가 되입력을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가르치는 게 그거죠. 주인공에다 모든 거, 일거수일투족 나오는 거, 속에서 들끓어서 나오는 거, 바깥에서 치고 들어오는 액운, 모든 거를 주인공에다가 맡겨라. 그러면 앞서 입력은 없어지면서 새 입력이 들어가서 그 새 입력이 들어간 것이 현실로 나온다. 즉 말하자면 과거하고 현재하고 미래하고 통하는 통로는 여기밖엔 없습니다. 우주하고도 통하는 길이 여기밖엔 없고, 모든 일체 만물하고도 통하는 길은 여기밖에 없어요. 다른 통로가 있다면 말씀해 보세요.

얼마 안 된 일입니다마는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이 고립돼서 은행으로 다 뺏기고 인제는 집까지 뺏기게 돼서 거리로 애들하고 나서게 된다고 하면서, 내가 길에 나왔는데 그 땅바닥에서 절을 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어리석어서 그랬을까요? 보잘것없는 고깃덩어리, 한 중한테 뭐 볼 게 있다고 거기 길바닥에서 절을 하겠습니까? 남의 말은 들었지만 자신은 그 식구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라는 거를 다 버린 겁니다, 아주. 아시겠습니까? 자기라는 거, 자기 위신이라는 거, 양심이라든가 뭐, 이런 것도 다 그냥 몽땅 몸째 버린 거예요. 죽어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요, 아무 생각이 없어요. 아무 생각이 없이 ‘잘 죽었다, 잘 죽었어. 어차피 죽으려면 그렇게 죽어야지.’ 그러고선 왜 땅에서 이럭하시느냐고 일어나시라고 이렇게 해 놓고선 열심히 관하시라고, 그래도 관하시면 좋은 일이 있지 않겠느냐고, 그저 관하시면서 부지런히 뛰라고 이랬어요. 그랬는데 얼마 있더니 “아이, 집은 건지게 됐습니다.” 얼마 또 있더니 와서 “아유, 그 공장 하던 것도 되찾게 됐습니다.” 나는 어떻게 찾게 됐느냐 이런 것도 묻고 싶지 않아요. 죽게 되는 식구를 건진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뭘 물어요? 그렇게 좋다면 나도 좋은 거죠.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죠. 그 이유를 묻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는 이 정신계의 무의 법이 그렇게 귀중하고 사람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들이죠. 바로 그런 법이 50%에 모두 해당됐다고 볼 수 있죠. 할 줄 아는 사람만 하는 게 아니에요. 다 권리를 가지고, 다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항상 그럽니다. 다른 거를, 이름을 믿고 빌고 기도하고 또는 형상을 믿고 기도하고 그러지 말고, 어느 법당에 가든지 강당에 가든지 형상은 네 형상과 똑같이 둘 아니게 보라. 그 마음이 둘 아니다. 내 형상과 둘 아니면 마음도 둘 아니고 법 또한 둘 아니다. 그러니 둥글게 내 마음과 모든 걸 한데 합쳐서, 일배를 올리더라도 둥글게 일배를 지극하게 올리고 나올 때 다시 주인공에다 맡기고 나오너라. 우리가 주인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처라고 말하면, 주님이라고 말을 하면 하나로 이게 벌어지니까, 이것은 내 몸뚱이 속에도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이 있죠?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죠? 바깥의 모두가 초월해서 돌아가는데 어떻게 그것을 님으로다가 하나로 붙이겠습니까? 그래서 주인공이라고 하는데 자기, 자기 주인공입니다, 각자.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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